▲ 김정명 총회장. ⓒ뉴스앤조이 신철민
남도의 쪽빛 바다에 동백의 짙은 녹음이 드리워져 더욱 아름다운 전남 여수. 이 항구 도시에 '은혜의 언덕' 이라는 역시 수려한 이름의 은현교회(여수시 여서동 242-2)가 자리잡고 있다.

82년 은현교회에 부임한 후 22년 동안 은혜의 언덕을 오르내리며 묵묵히 목자의 길을 걷고 있는 김정명 목사(56). 그를 보면 다이아몬드 원석을 24면 체로 깍아 마침내 귀한 보석으로 탈바꿈시키는 장인의 땀방울이 생각난다. 물론 김 목사의 전신을 깨트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게 만든 장인은 하나님이다.

천혜의 자연환경 탓에 미항으로 불리는 여수는 어쩌면 김정명 목사와 같은 인물이 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 목사는 테레사 수녀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인의 대열에 그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가 아름답게 빛나는 것은 누릴 것을 누리지 않는 겸손함, 그리고 정직과 공의를 뜨거운 성령의 감동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일관된 의지를 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전신을 24면 체로 다듬는 동안 뼈를 깎는 고통을 온전한 순종을 통해 견뎌냈다.

지천명의 나이 중반을 넘긴 그에게선 아직도 수줍은 미소가 번진다. 그 미소 띤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지극히 소박하면서도 평범하다. 그렇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예수님의 뒤를 좇는 한 목회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하나님이 쓰는 그릇으로 완성되어 가는지 점차 뚜렷해진다.

김 목사는 1948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병에 걸려 죽을 뻔한 위기 속에서 극적으로 살아 난 후 아들을 목사로 키우겠다고 기도했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김 목사는 60년대의 지독한 가난을 겪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이 비록 고통 속에 살지만 내세는 천국에서 살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김 목사의 사춘기 시절 다짐은 곧 철저하게 무너지고 만다. 대조동 순복음 신학교 재학 당시 막연하게 성자들만 모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신학교가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들로 가득 넘쳐나는 것을 보고 신학을 포기한 것.

하지만 그는 멀쩡하다가 갑자기 간질환자처럼 길에서 쓰러지는 일을 두 차례나 겪으면서 애초의 결심대로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 제 3자가 본다면 신비주의적인 간증거리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본인에게는 매우 중대한 경험이었다.

김 목사가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스스로 포기하기 시작한 것은 28세 때인 목회 초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북 김제에서 교회를 개척할 당시 전주 지역의 탄탄한 교회에서 부임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거절했다.

"젊은 나이에 큰 교회를 가면 빨리 성공할 수 있었겠죠. 도청소재지인 전주는 정읍에 비할 수 없는 큰 도시였거든요. 하지만 목회자의 인격 성숙은 한참 뒤쳐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결정은 지금 생각해도 내 생애 가장 좋은 판단이었습니다."

김 목사의 지론은 큰 교회를 맡아서 소위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 보다 훌륭한 목회자가 되는 것이다. 즉 성공보다는 인격적으로 성숙된 목사가 되기 위해 빨리 성공할 수 있는 길을 포기한 것.

큰 교회 목사 보다 훌륭한 목사의 길 택해
김 목사가 지금 담임하고 있는 은현교회와 인연을 맺은 것은 77년이다. 그러나 연로한 목회자가 담임하던 은현교회의 부목사로 부임한 것은 수년 동안 시련을 겪는 계기가 되었다. 교인들이 젊은 부목사에게 호감을 보이면서 담임목사의 미움(?)을 받게 됐고, 담임목사는 그가 오순절세계대회 참석 차 캐나다로 건너간 후 정해진 기일에 귀국을 못하자 그만 그를 해임시켜 버렸다.

그가 어쩔 수 없이 미국에 머무는 동안 순천교회 청빙 요청을 받지만 은현교회 교인이 한 명이라도 교회를 옮기게 되면 갈등이 더욱 커질 것을 우려해 그것도 포기했다. 그 후 미국에서 자녀 우유 값조차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빈곤한 수년 간의 삶을 보내면서 내심 높았던 자만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는 겸손을 배웠다.

3년 간의 밑바닥 인생(?)을 통해 서서히 미국에서의 목회방법을 체득한 그는 이곳저곳에서 청빙을 원할 정도로 그럴듯한 목회자로서 인정받을 즈음 공교롭게도 다시 은현교회의 손짓을 받게 된다.

▲ 은현교회 전경 ⓒ뉴스앤조이 신철민
당시 은현교회는 연로한 목사가 물러나고 새로운 목회자가 왔지만 부덕한 면이 드러나 교인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김 목사는 미국 목회가 익숙해진 만큼 은현교회에 부임할 생각이 없어 청빙을 거절했다. 그러나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가는 것이 목회자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어 82년 은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은현교회가 일종의 스카웃 조건으로 김 목사에게 제시한 것은 매달 100만원의 사례비와 자동차와 아파트 등이다. 김 목사는 이 같은 조건을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입장에 있었지만 집은 교회 사택을 쓰면 되고 사례비도 60만원만 받겠다고 말했다. 물론 자동차는 거절했다. 

"당시 은현교회 교인들은 좋은 목사가 왔다고 무척 좋아하더군요. 나는 교인들에게 좋은 목사를 기대하지 말고 나를 좋은 목사로 만들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부족한 만큼 허물을 덮어 달라고도 요구했죠."

그는 1000명 가까운 교회로 성장한 지금에도 자가용을 타지 않는다. 교회 봉고차면 충분하다. 그리고 사례비 255만원은 자신과는 조금 다르게 여유 있게 살기 원하는 부인의 몫이다. 사례비와 별도로 받는 220만원의 목회비도 자신의 몫은 아니다. 

"이런 저런 명목으로 매주 40만원 정도 헌금하고 지방회와 총회 상납금으로 매달 20만원을 냅니다. 그리고 남는 40만원은 러시아에 유학 중인 자녀 하숙비에 보태고 있습니다."

결국 김 목사가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은 거의 없는 셈이다. 교회에서 늘 흰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그는 많은 돈이 있어도 쓸 곳을 찾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는 물질 외에도 자신의 몸 속 신장 2개 중 1개를 포기했다.

2개의 신장 누리지 않고 1개 선 뜻 나눠
만성신부전증으로 고생하는 동료 목회자의 사모가 1주일에 3번 투석을 하는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 신장기증을 결심한 것. 김 목사의 신장은 아무 연고도 없는 젊은 여성에게 새로운 삶을 안겨주었다.

한편 김 목사는 가난 때문에 버려질 뻔한 어린아이를 두 번이나 떠맡고 나서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절절하게 체험했다. 91년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23세의 젊은 부인이 애를 키우지 못할 형편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자 선뜻 자신이 키우겠다고 나섰다. 

평화라고 이름의 아이에게 김 목사는 각별한 사랑을 쏟았지만 94년 8월 높은 곳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김 목사는 죽은 아이를 침대에 눕혀 놓고 기도했지만 끝내 살아나지 않았다.

"평화가 묻힌 산에 새벽마다 올라가 울었습니다. 그때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죠. 하나님께서 살리지도 못할 평화를 왜 포기하지 못하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결코 평화를 포기하지 못한다고 대답하면서 문득 내가 죽은 평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결코 나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평화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김 목사는 99년 12월 30일 누군가 교회 앞에 놓아 둔 태어난 지 5일 밖에 안된 아이도 선뜻 맡아 키우고 있다. 김 목사는 아이의 부모가 쓴 쪽지에 '목사님이 돈이 많고 믿음 좋은 사람을 찾아 키워달라'는 문구를 보고 "교회에서 제일 믿음 좋은 사람이 아마 나일 것"이라는 생각에 키우게 됐다고 말한다.

김 목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가고 자신이 위선자라는 생각에 몹시 괴로워할 때 두 어린아이와 만났다고 술회한다.

"두 번째 만난 아이 이름을 시온이라고 지었는데 시온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죠. 시온이를 내가 택한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온이가 연약한 것처럼 하나님은 내가 연약할 것을 아셨지 않았을까. 나는 당시 예쁜 여자를 보면 더 보고 싶고, 육감적인 여자를 보면 만지고 싶은 생각이 드는 어쩔 수 없는 위선자라는 생각에 괴로워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그런 인간인 줄 알고도 선택했다는 깨달음을 얻었죠. 그때 비로소 깊은 자유함을 느꼈습니다."

입양을 통해 깨달은 하나님 사랑
한편 김 목사는 개인 구원과 성령의 은혜를 강조하는 순복음 교단에 속했지만 8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 대열의 전면에 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6.10항쟁 당시 교회에서 함석헌 문익환 한완상 고영근 등 당대의 민주화 인사들을 초청해 시국강연회를 개최한 것은 물론 데모 대열에도 합류했다.

그리고 시위에 교회차를 동원하거나 시위에 참여하는 청년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일도 감당했다. 당국의 도청과 감시 미행이 잇달았지만 그는 옳은 일을 한다는 생각에 결코 민주화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김 목사가 보수적인 순복음 교단 목사로서는 찾아보기 힘든 민주화 운동 대열에 앞장 선 것은 1980년 5.18 당시 광주 현장에서 도피했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이다. 미국에서 광주 처가집에 잠시 들렀던 그는 때마침 일어난 5.18 사태를 보고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부끄러운 기억을 간직하고 있던 그는 6.10 항쟁을 맞아 침묵하는 대신 정의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는 길을 택했다. 김 목사의 결단은 결과적으로 '우는 교회' 혹은 이단으로 불리는 순복음교단에 속한 은현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을 불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김 목사는 60세가 되는 4년 후 스스로 담임목사직에서 물러날 예정이다. 일반 목회자에 비해 10년이나 일찍 은퇴하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것.

"은퇴한 후 성공한 목회자가 아닌 실패하고 영적으로 좌절한 목회자 그리고 신학생들에게 영적인 쉼을 제공하는 수도원 같은 교육시설을 세울 작정입니다. 그리고 노후를 보장받지 못한 채 은퇴한 목회자들이 무료로 생활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 것입니다."

누릴 것을 포기하는데 익숙한 김정명 목사. 그래서 교회 내부는 물론 여수 지역의 존경을 받는 김 목사는 매우 간단한 하나님의 계산법을 직접 실천하는 사람이다.

"언젠가 교인이 차를 사준다고 해서 프라이드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한 때 그 차를 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주위에서 존경스럽다고 하더군요. 존경받는 것 무척 쉽더군요. 그냥 누리지 않으면 되는 것이니까요."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