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텐둠, 즉 기독교 국가 체제에 반대하며 예수 중심의 하나님나라 사상에 관심이 있었던 '아나뱁티스트'들은 종교개혁 시대에 급진적인 개혁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이 땅 가운데 실현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헌신키로 하였습니다. 나아가 이들은 16C의 종교개혁 당시에 다른 종교 개혁자들과 구별된 자들로 서기를 원하였습니다.

이유는 이들에게 '하나님나라'의 근본 사상과 '세상 나라'의 근본 사상은 말 그대로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제자도란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적들까지도 사랑해야 하며, 결코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나아가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은 헌신된 공동체 가운데서 함께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존재들이다."

즉 이들은 모든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 땅 가운데 실현코자 힘썼던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나라' 곧 천국이란 예수를 믿고 죽어서만 들어가는 천국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삶 전체 영역과 아울러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 가운데 하나님의 변화시키시는 능력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대하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 시대 당시 '크리스텐둠'에 영향을 받은 종교 지도자들은 이들 곧 '아나뱁티스트'들을 이단시하며 끝내는 고문하거나 처형하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교회사 가운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교회사적으로 이보다 더 큰 비극적인 사건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운동은 과거 16세기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비록 다수는 아닐지라도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은 1557년에 영국 정부에 의해 체포, 수감, 혹은 처형을 당한 아나뱁티스트들이 그 후 4세기 동안에는 영국에서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재는 영국은 물론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그 외 여러 나라에 신흥 아나뱁티스트 그룹들과 관신 그룹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과거 초기의 아나뱁티스트들과는 아무런 교단적인 연관성이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 스스로 자신들을 가리켜서 아나뱁티스트라고 불리기를 원하거나 혹은 과거 아나뱁티스트의 전통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세우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현재 자신이 속한 교단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아나뱁티스트의 정신을 자신들 속에 적용하고 이들로부터 상당한 도전을 받는 이들도 존재합니다.

이와 같은 과거 16세기의 아나뱁티즘은 이제 더욱더 현시대 교회 공동체의 대안적인 모델 혹은 운동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견해와 생각에 모든 현시대의 지역 교회들이 동의를 표하거나 그 뜻을 같이하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이와 같은 대안적 모델에 대해 생각하는 이들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소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견해를 추구하는 이들이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이 운동에 현시대의 지역 교회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다름 아닌 이들이 추구하는 과거 아나뱁티즘의 정신이 성경이 말하는 근본정신을 지향하려는 자세를 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서글프게 만드는 것은 사실 과거 아나뱁티스트들에 대한 자료들이 그리 풍부하지만은 않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들은 종종 교회사 가운데서 가톨릭이나 개신교회에 의해 이단시되거나 정죄를 당한 소수의 이단적인 집단으로만 이해됐습니다. 솔직히 필자 역시도 신학교 재학 시절에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들을 이해하였습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정통 개신교회에 도전해 왔던 수많은 이단 가운데 하나로 취급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지역 교회에서 사역하면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개신교회, 즉 개신교회에 포함된 모든 교단의 지역 교회들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교회 공동체를 표방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정통을 자랑하는 개신교회에 대해 회의와 절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한가지의 깨달음이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정통 개신교회 역시도 결국 세속주의 곧 크리스텐둠하에서 세워져 왔구나!'

바로 이와 같은 깨달음이 필자인 저로 하여금 정통 개신교 주변의 또 다른 이들에게 눈을 돌리게 한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그 한 가지가 바로 과거 16세기의 아나뱁티즘이었습니다. 물론 현시대의 지역교회들의 대안적인 모델이 아나뱁티즘만은 아닐 것입니다.

솔직히 필자는 과거로부터 정통 개신교회에 속한 이들(아마도 현시대 지역 교회에 속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한 번쯤은 정통주의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나 또 다른 제3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던 이들에 대해 좀 더 진지하고 심사숙고한 자세로 이들을 주목해 볼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필자 자신이 이 글을 쓰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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