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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란 명칭의 허구성

이름과 행하는 것 사이의 괴리

김북경   기사승인 2011.09.23  14:3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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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 전에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기독교 학교, 기독교 병원을 세웠고 그로 인해 한국인의 교육 향상과 건강 유지에 기여한 바가 크다.

최근에 한국에서는 기독교 정당에 대해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그 의도는 고상할지 모르지만, 교회 역사(서양 교회사)를 상기해 보면 종교(서양에서의 기독교)와 정치가 야합을 했을 때 항상 종교가 부패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죄성 때문이다. 정치라는 그 자체가 악해서가 아니라 정치하는 사람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권력을 최고 목표로 하고 있는데 권력(Power)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고(인간이 부패했으므로: 필자 해석)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고 영국의 액튼 경이 말했다. 이렇게 권력 다툼을 하는 정치와 기독교가 야합한 결과, 기독교가 부패한 예는 허다하다.

주후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후 우리가 천주교라 부르는 로마교가 부패했던 것을 볼 수 있고, 영국의 헨리 8세가 로마교를 탈퇴한 후 교회의 수장이 됨으로써 영국 교회가 국교(성공회)가 되고 교회가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유럽에서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유는 로마교가 부패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에서도 영국 국교(성공회) 개혁을 위해서 노력하다가 죽어 간 순교자들이 있다. 결국 영국의 청교도들은 국교의 핍박을 피해서 미국으로 이민 갔다. 그래서 이민들이 미국을 세울 때 정교분리 원칙을 헌법에 써넣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은 정치와 종교가 야합한 결과를 로마교의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었고 또 그 결과를 직접 체험했었기 때문에 정치가 종교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원천봉쇄를 하였던 것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정치와 종교를 불가분의 관계로 보고 그들의 경전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를 하고 있다. 그 결과로 9.11사건이 있었고 아직도 서구는 그 영향 아래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아래, 기독교 정당을 세우려는 의도

첫째로 기독교 국가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특히 세계가 지구촌화되고 종교가 다원화된 사회에서 사는 한 특정한 기독교 이념을 내세워서 국가의 헌법을 기독교적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착상이다. 신학적으로 보아도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신정정치는 끝났다.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도 세속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힘을 잃고 사회의 요구에 따라가는 형편에 있다. 그 예로서 일부 국민이 원한다고 해서 동성 결혼을 인정하게 되고 동성애 경향이 있는 사람도 신부와 주교로 임명할 수 있게 법을 고치고 있다.

그래서 뜻있는 기독교인들은 국교를 해체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공회의 수장인 여왕은 전통적으로 기독교 교회의 수호자라고 자칭했지만 영국 사회가 다문화 다종교 사회가 되면서 단일 종교, 즉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명칭 대신에 다 종교(Faiths)의 수호자라고 부를 정도가 되었다. 이쯤 되면 국교라는 의미가 없어진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정당정치를 한다는 주장

문제는 '기독교'란 명칭의 정의를 내리기가 어려운 데 있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정강을 세워야 하는데 기독교 정신은 성경을 해석하는 데 따라서 기독'사회당'도 나올 수 있고 기독'민주당'도 나올 수 있다. 두 당 모두가 성경을 가지고 자기 당을 정당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 정당의 '기독교'란 단어를 정의 내리기 힘들게 된다. '우파' 라든지 '좌파' 기독교 정당이라고 불러야 하는 희극이 생길 것이다.

이렇게 소위 '기독교' 정당이 기독교 전체를 대표하지 못하고 일부만을 대표하는 정당이 되면 '기독교'란 명칭을 붙일 명분이 없어진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정당 당원들의 성분이 문제가 된다. 당원의 자격은 어떻게 정할 것인가? 세례교인인가? (세례 증서만 들이미는 사람). 몇 달 출석 교인인가? (정당에 가입하기 위해서 몇 달 교회에 출석하고 목사의 추천서를 받은 사람). 그렇지 않으면 중생의 경험이 있는 사람인가? 천주교인도 되는가? 누가 당원의 성분을 결정할 수 있는가?

만약에 다양한 신앙 배경을 가진 당원들이 모여서 정강을 만든다면 결국 공통분모를 찾을 수밖에 없고 이런 공통분모는 기독교의 정수를 희석시킬 수밖에 없다. 이런 정강은 타 종교인이나 비종교인들도 동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전매권이 없어진다.

예로서 정의와 평화를 정강의 대목표로 삼는다면 종교의 유무를 불구하고 이것을 부인하는 정당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정당정치가 기독교적이냐 아니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인간 양심에 기반을 두고 정치하면 되는 것이다.

로마서 13장에서 사도바울이 세상 권세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예수 믿고 예수님 말씀대로 정치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일반 은혜)에 따라서 정치할 것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독교'란 명칭은 필요가 없다

만약에 유명한 몇몇 목사들이 모여서 힘 있는 교인들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정치를 한다면 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하기가 십상이다. 정치 자금을 댄 힘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유리한 정책을 기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약자를 무시하고 힘 있는 자들의 손을 들어 주는 정당은 '기독교'라는 명칭을 붙일 자격이 없어진다(사 58장).

기독교 정당을 창당하려는 기독교 정치인들(목사들)은 앞으로 얻을 표를 의식 안 하더라도 포이동 주민들과 동조했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중소 교회 목사들이 포이동 주민들과 야외에서 주일예배를 같이 드리는 동안 힘 있는 목사들은 화려한 궁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았던가?

힘 있는 목사들이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들의 힘(성도 수나 풍부한 재정으로 생긴 권력이나 유명세)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누리는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가르치고 말씀대로 사는 데서 생겼어야 한다. 그렇게 얻은 힘을 교회의 본래 사명에 쓰지 않고 정당정치하는 데 쓰는 것은 권력의 남용이다. 따라서 정당정치를 하려는 사람은 교회와는 결별해야 한다. 교회 이름으로 정치할 수 없다. 성도들의 지지와 재정으로 정당정치를 할 수 없는 이유는 교회는 정당정치를 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로 기독교 정당을 세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의 지지를 기대하는 것은 천진난만하다고 볼 수 있다(물론 한국 성도들의 의사를 여론조사해 봤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한국 성도들의 기독교 정당에 대한 반응이 부정적이거나 미지근한 이유는 유명 목회자들의 평판이 좋지 않았던 데 있는 것 같다. 이승만 전 대통령 이후로 기독교인 대통령이 보였던 정치는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인은 어떻게 정치에 참여할 것인가

여기서 먼저 '교회'와 '기독교인' 개인을 구별해야 한다. '교회'는 정치를 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가 정치에 참여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단지 기독교인 개개인이 정치에 참여한다고 하는 것이 옳다. 교회나 기독교 학술 연구 기관은 일반 은혜 신학을 기초로 해서 정치를 연구해야 한다. (관련 기사 : 이원론적 사고와 일반 은혜) 즉 기독교 세계관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반 은혜 중의 하나인 정치라는 분야를 연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연구 결과를 가지고 정치에 영향을 끼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기독교 문화 창조의 일환일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서양 문화에서 발전한 것이기 때문에 유교적 한국 문화에 맞지 않는 점이 있다. 마치 한복에 넥타이 맨 격이라고 할까? 민주주의가 잘 실천되려면 몇 가지 기본적인 요소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정치의 중요한 요소 중 첫째는 솔직한 대화와 토론이다. 그런데 유교 문화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대화이다. 말을 적게 하는 것을 미덕으로 본다거나 장유유서의 질서 때문에 대화를 솔직히 할 수 없다. 부부 간에 대화가 없고 부모와 자식 지간에 대화가 없다. 선생(교수)와 학생 간에 대화가 없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인 의사소통이 부족하니 첫 단추부터 잘못 낀 셈이다. 하나님께서 귀와 입을 주셨을 때는 의사 교환하라고 주셨을 것이다. 우리는 대화의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또 하나 민주주의 기본 요소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국민과 정부 간에 정확하고 솔직한 정보의 교환이 있어야 민주정치가 제대로 될 수 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예면 예, 아니면 아니요" 하라고 하셨다(마 5:33~37절). 서양 법정에서 위증죄를 심각하게 다루는 이유는 십계명 중에서 제9계명인 "너희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지 못한다"는 법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교 토양에 심어진 민주주의가 어설프게 자라왔지만 이제는 교회가 복음으로 기독교 문화를 조성하여 정의와 평화가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바이다.

한국 정치의 먼 장래를 위해서는 민주주의라는 큰 기치 아래서 기독교 정신을 가진 젊은 정치인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영국은 젊은 보수당원을 뽑아서 정치 훈련을 시키고 있다. 최근 노르웨이의 총격 사건 현장이 보수당 청소년 훈련 캠프였다고 한다.

먼 앞날을 위해서 기독 청소년들에게 시간과 돈을 투자할 독지가가 나올 만도 하다. 교회에서도 청소년들에게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만 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것이 쉐퍼 목사의 꿈이었고 그래서 '라브리'라는 기독교 공동체를 시작했던 것이다(쉐퍼의 책이나 영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참조하라).

결론적으로 '기독교' 정당은 문화 다원주의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 이유는 하나님나라 가치관의 해석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말하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성경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소수 일부의 이익을 대표하는 기독교 정당은 기독교인 전체를 대표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란 이름으로 나설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기독인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반 은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즉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양심을 배반하는 정부는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서 갈아치우고 민주적인 절차를 방해하는 정부는 평화로운 시민 불복종을 사용하여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최근에 있었던 북아프리카의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그리고 시리아의 시민 투쟁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투쟁할 수 있다는 좋은 예이다. 인간이 종교의 다름을 초월해서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화를 누릴 권리가 있다(일반 은혜)는 사실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일반 은혜의 선물을 잘 사용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본다. 국회의원의 40퍼센트가 기독교인이라면 왜 한국 정치가 잘 안 될까? 이들만이라도 진정한 기독교 정신으로 정치를 한다면 기독교 정당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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