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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CEO가 아니다

'목사를 깨운다' 3부 - 자본주의에 물들어 가는 한국교회

김북경   기사승인 2011.08.26  22: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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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회사는 다른 점이 많다. 그 존재 이유와 목적 그리고 운영 방법이 다르다. 회사는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잘 다스리고 생산하고 매매하는 경제활동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회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 은총 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써야 한다. 회사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전해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자유경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상에서 완전한 제도는 없다. 어떤 이상적인 제도건 차선책밖에 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다. 인간의 죄가 경제활동에도 비집고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회사는 이윤이 있어야 그 이윤을 회사에 재투자하고 그래야 발전이 있게 된다. 그러나 이윤을 절대 가치로 보고 모든 경제활동의 구심점을 이윤에만 둔다면 그 사회는 돈을 숭상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회사 CEO의 연봉이 천문학적인 숫자로 나가는 이유가 회사의 이윤을 최대한으로 올려야 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목사는 어떤가? 미국의 어떤 교회는 연말 공동 회의에서 지난 1년 동안 목사가 목회한 성적을 통계표로 공개한다고 한다. 연보는 얼마나 늘었으며 성도 수는 얼마나 늘었나를 평가한다고 한다. 이사회에서 CEO를 평가하듯이 말이다.

교회도 성장해야 한다.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고 수적으로도 성장해야 한다. 교회가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이후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고 있다. 세계 복음화에도 사람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회가 회사와 다른 점은 목사와 선교사는 돈을 벌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고 사람을 낚으려고 자원한 사람들이다.

물론 사람이 많이 모여들면 연보가 많이 들어오겠지만, 연보 늘리려고 사람을 모으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전도 통계의 굴뚝을 높이려는 것도 아니다. 건축 헌금을 많이 걷어서 궁전을 지으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목사의 연봉을 올려 주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을 보내 준 것처럼 우리도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남을 위해(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희생한 것같이 교회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 희생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교회의 CEO는 예수님이지 목사가 아니다. 목사가 회사 CEO처럼 행동하면 자본주의 사상에 물들기 십상이다. 우리는 세상 문화에 약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였다(마 6장). 돈을 우상시하면 인간이 희생된다. 주일 예배당에 앉아 있는 성도들의 머릿수가 돈으로 보이기 쉽다.

하나님의 좋은 선물은 인간으로 하여금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다. 여기서 '잘'이라는 부사에 유의해야 한다. 자기 배만 생각하지 말고 이웃의 형편을 '잘' 감안해서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웃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예수를 믿건 안 믿건 간에) 이웃의 행복도 내 행복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살라는 것이다. 이 윤리는 구약 희년 법에 잘 나타나 있다.

현재 전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경제 난황이 신자본주의(필자는 이것을 막가파 자본주의라고 부른다)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 사회윤리가 빠진 경제활동은 인간의 욕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돈을 버는 사람들은 사회야 어떻게 되든지 간에 돈 버는 데만 정신을 쏟고 있고(돈에 대한 욕심) 아이러니하게도 회사의 성공이 인간의 소유욕(이것도 욕심이다)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광고의 위력을 생각해 보면 막가파 자본주의의 악성이 이해가 갈 것이다.

이런 세상 철학이 교회에까지 들어온 것 같다. 교회가 질서 없이 여기저기 생기고 그중에서 목회를 '잘' 하는 교회는 살아남고 구멍가게 교회는 문 닫거나 다른 데로 이사 가야 한다. 살아남은 교회는 대형 교회가 되는데 그 과정을 보면 대개는 동네 사람들을 전도해서 커지는 것이 아니라 수십 리를 마다하고 유명 브랜드를 찾아오는 성도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길에서 몇 시간을 허비하면서 유명한 교회를 찾아온다. 자기 동네를 떠나서 말이다. 동네 교회는 죽든 말든, 동네 길에 쓰레기가 쌓여 있든 말든 동네는 뒤로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목사를 찾아 달린다. 그 결과로 자기 동네는 공동화(空同化)가 되어버린다. 마치 시에서 중산층이 살기 좋은 시골로 이사 가서 시 한복판이 텅텅 비게 되는 현상처럼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교회 개척을 질서 있게 할 수 있을까? 각 교회 교파는 대표가 모여서 교구화를 실시해야 한다. 이미 천주교나 성공회는 오랜 역사의 경험으로 교구화가 잘 되어 있다. 교회는 사회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사회에서 혹은 동네에서 등대의 역할을 해야 한다. 기독교인 수가 인구의 10퍼센트만 돼도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기에 충분하다.

영국 교회들을 보자. 동네마다 중심에 교회가 있고 교회는 교파마다 교구화가 잘 되어 있어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대개는 5마일 거리를 둔다) 교회가 있다. 영국 성공회는 국교이기 때문에 신부들이 동네 정치에 참여하고 발언권도 있다. 영국 상원에는 성공회 주교들이 참석하여 정치를 한다. 이것은 긴 영국 국교 역사의 결과이지만 한국교회도 이제는 동네에 뿌리박고 동네 사람들을 전도하고 동네 살림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이 지방자치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지방자치가 잘 되어야 민주정치가 잘 정착할 수 있다.

이렇게 지역 교회(Local Church)의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교구화가 되어야 하고 사도바울의 남의 발등 밟지 않기 원칙을 지켜야 한다. 특히 대기업의 문어발식 성장으로 말미암아 중소기업을 죽이는 상행위를 교회는 닮지 말아야 한다. 목사는 전도는 열심히 해야 하지만 성도 수 늘리는 데 급급하여 멀리서 오는 성도들을 마다치 않고 어서 오십시오 해서는 안 된다. 소위 우주적 교회를 인정한다면 동네 교회가 이단이 아닌 이상 멀리서 오는 성도들을 동네 교회로 쫓아 보내야 한다. 이렇게 자기 동네 교회 다니기 운동이 벌어진다면 정유회사는 손해를 볼지 몰라도 서울 공기가 맑아지겠고 동네 교회가 살고 그 결과로 동네가 살고 지방자치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큰 교회가 먼저 솔선수범해야 한다. 큰 교회가 성도들을 자기 동네 교회로 보내 주는 아량을 보여야 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말이다.

미국의 어떤 교민이 런던을 방문했다. 구경한 후 주일은 런던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계획했는데 미국의 본 교회 목사가 전화해서 주일은 본 교회에서 지켜야 한다고 빨리 오라고 해서 돌아갔다고 한다.

"목사님들, 성도들을 이렇게 괴롭히지 마십시오."

매년 수천 명의 신학생이 배출되는데 기존 목사들의 수명은 길어지니 젊은 목사들이 갈 곳을 못 찾고 있다. 아마 하나님이 그들을 세계 선교에 쓰시려는가 보다. 그렇지 않으면 남북통일을 대비해서 신학생들을 그렇게 많이 준비하시는가 보다.

"목장을 찾지 못하고 고민하는 목사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소. 우선 사도바울이 그랬듯이 기도하던 무릎을 펴고 책을 덮고 두 손으로 천막을 기우십시오.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언제까지 책상에 앉아서 공자 왈 맹자 왈 하고 있을 겁니까? 그리고 리더십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물론 써번트 리더십이라고 변명할지 몰라도 써번트 리더십에서 왕 리더십으로 넘어가기가 쉬우니까요. 저는 천주교에서 정책적으로 신부 후보자는 장교로 가지 않고 사병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듣고 마음속으로 동의했습니다."

영국 라브리에 한국 목사님 한 분이 왔는데 라브리 간사와 같이 마루를 쓸다가 간사에게 라브리 오기 전에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답니다. 교회 목사였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면서 목사가 이런 일을 해서야 되겠느냐고 했다는군요.

"예수님도 목공 일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공자가 죽어야 산다>는 책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었는데 저는 '공자가 죽어야 한국교회가 산다'고 외치고 싶습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계급의식이 한국교회에 아직도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봅니다."

회사 CEO와 돈 그리고 교회에 관한 얘기니 교회에 바치는 연보에 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연보라고 하는 행위에는 회사원이 생각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사상이 들어 있다. 첫째는 연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감사의 표현이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나의 생명과 모든 좋은 것들로 축복하여 주신 데 대한 감사 헌금이다. 그래서 연보의 둘째 의미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이 소유주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소유주가 '지금이라도 당장 모든 것을 내놔라'고 하면 우리는 바칠 수밖에 없다.

쉐퍼 목사는 생전에 이런 말을 종종 했다. "지금 내가 차고 있는 시계, 은행 계좌, 내가 가지고 있는 주식, 이 모든 것은 당분간 쓰라고 나에게 맡긴 것이다. 그렇다면 내 옆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당장에 내주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 자본주의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행 5장)에서 베드로가 개인 소유권을 인정했듯이 우리는 당분간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쓰는 청지기(관리자)임을 알아야 한다.

이 사건에서 또 하나 배울 수 있는 것은 연보는 자발적이라는 것이다. 강제적 사랑이 있을 수 없듯이 강제적 연보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고후 8:1~5). 그렇다면 교회는 성도들에게 연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는 이 '여러 가지' 방법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부언하지 않겠다.

필자가 처음 교회 개척할 당시 재정이 어려웠다. 그런데 어떤 목사가 와서 자기에게 설교를 시켜 주면 헌금을 당장 올려 줄 수 있다고 나에게 은근히 다가온 적이 있었다. 신학교 설교학에서 배운 기술일까? 그렇지 않으면 선배 목사들에게서 배운 것일까?

연보는 교회에만 해야 하는가? 한국 성도들은 자선을 베푸는 습관이 안 되어 있어서 교회에만 연보를 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면 교회에서 알아서 자선사업에 쓰고 선교비로도 쓴다고 한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 성도들은 깨어나야 한다. 한국 사회가 NGO를 잘 발전시킨 것을 보면 이제는 국민의 시민 정신이 높아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교회가 일일이 챙길 수 없는 구제 사업에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도울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할 것이다.

최근 영국 폭동 중에 있었던 아름다운 얘기가 있다. 런던 북쪽에서 이발소를 경영하는 할아버지 가게를 폭동들이 부셨다고 한다. 이 소문이 트위터로 전국에 퍼지자 사방에서 수리비에 쓰라고 보내온 돈이 3만 파운드나 됐다고 한다. 대통령이 전 재산을 사회에 바치는 것은 좋은 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민이 한두 푼 모아서 필요한 사람을 돕는 사회가 지상천국이 아닐까?

김북경 / 국제장로교 영국교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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