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수 믿기 전에는 스스로 왕이 되어서 살아왔다. 세상에 나올 때부터 주먹을 뒤흔들며 내 배를 채우라고 소리 질렀다. 그리고 내가 우주의 중심이 되어 살아왔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에게 붙잡혔다.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겠다고 결심한 후에는 예수님에게 나의 왕좌를 내어 드렸다. 이제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성경 묵상을 매일 한다. 그런데 종종 내가 예수님에게 지시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마치 운전대를 주님에게 맡겨 놓고는 옆자리에 앉아서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목사는 목자장이 아니다. 목사는 양치는 개와 같다. 영국 텔레비전에 '목자와 개'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목자가 양치는 개(콜리라고 하는 개)를 휘파람으로 잘 지시해서 양 무리를 이리저리 모는 기술을 시합하는 프로다. 개는 주인의 입을 집중적으로 쳐다보고 앉아 있다가 주인의 입에서 휘파람으로 나오는 지시가 있자마자 잽싸게 달려가서 양들을 좌로나 우로 몬다. 그리고 경기는 개가 양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양 우리에 몰아넣는 것으로 끝이 난다.

목사는 양치는 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 전에는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주님에게 꼭 묻고 나가듯이 말이다.

라브리(기독교 공동체)의 창시자인 프란시스 쉐퍼 목사 부부는 말씀과 기도로 살아왔다. 그들이 1955년도에 스위스 당국으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은 후에 기도로 살아남은 얘기가 있다. 주님께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신앙이다(이 간증은 <라브리>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래서 라브리는 아직도 말씀과 기도로 먹고산다. 라브리의 신념 중의 하나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다. 성령이 밀어붙이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태도다. 그래서 일이 늦어질지라도 오래 참고 기다린다. 인생의 속도가 굉장히 빨라진 시대에 길옆에 서서 기다린다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다. 더구나 나의 경쟁자가 앞장서 갈 때는 말이다. 일이 오래 걸려도 성령에 앞장서지 말고 뒤따라가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일 것이다.

양치는 개가 할 일은 양 무리를 보호하고 뒤로 쳐지거나 옆길로 빠지는 양을 몰아서 양 무리에 합세하게 하고 안전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양을 해치거나 배고프다고 해서 양을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벧전 5:1~4). 지금은 배가 고파도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주실 상급을 바라고 살아야 한다. 우리가 지상에서 상급을 받을 것으로 기대할 때 세상의 방법을 쓸 유혹에 당면하게 된다.

쉐퍼 목사의 또 하나의 삶의 지침서는 '주님의 일은 주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빨리, 그리고 크게 만들려는 성질이 있는 민족이다. 그래서 경제도 세계에서 놀랄 만한 성장을 빨리 이루었던 것 같다. '빨리'라는 단어는 이미 서양에서도 한국인의 특징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우리 DNA에 새겨져 있는 거 같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크게, 그리고 제일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한두 입이면 먹을 수 있는 영국 사과에 비하면 한국 사과는 그에 몇 배나 크다. 그러나 큰 사과는 작은 사과보다는 그 진미가 떨어진다.

크고 제일이어야 한다는 세상 철학이 교회에까지 들어와서 '교회는 커야 한다'는 신념을 목회자들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대형 교회는 전국의 중소 교회 목회자들을 초청하여 교회 성장학을 가르친다. 교회 성장학을 배우러 으리으리한 교회당에 들어가면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비전(?)이 환히 보인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방법을 배워서 '우리 교회를 이렇게 성장시켜 봐야지!'라고 결심하게 된다.

이런 생각은 예수님이 단호하게 거부하셨다. 산상설교(마 7:21~23)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은 자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눈에는 불법이라는 말이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명예욕?) 세상 철학을 따라 목회했다고 할 수 있겠다. 또 누가복음(13:22~30)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생명의 길인데, 이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꼴찌 같지만(30절)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첫째라는 말이다.

이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열매가 크고 많다고 해도 가짜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가짜 성도가 있을 수 있고, 가짜 목사도 있을 수 있다. 진짜와 가짜는 마지막 날에 주님만이 구분하시지만, 목회자들에게 경고될 말씀이다. 목회자들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고 소위 성공한 목회자들에게는 경고의 말씀이 될 수 있다.

교회가 크든지 작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고 목회해야 한다. 섰다고 자만하는 자들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교회가 빈익빈 부익부 되는 이유가 있다. 이것은 교회를 찾는 성도들의 명예욕에도 탓이 있다. 교회가 크고 화려하고 무엇인가 영차 영차 하는 분위기가 있고 자녀들 교육을 잘하는 교회, 특히 목사님의 설교가 좋은(?) 교회를 찾아다니는 성도들이 있다. 런던의 어떤 목사님이 설교에서 이렇게 도전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 교회에 왜 찾아왔는가? 무슨 소문을 듣고 왔는가?"

유명한 교회라면 십 리도 마다하고 좇아가는 한국 성도들을 보면 브랜드를 선호하는 습관을 볼 수 있다. 큰 교회의 가장 큰 매력은 백화점같이 성도들의 모든 필요를 만족시켜 줄 수 있다는 데 있다. 그 교회 가면 무엇이든지 다 공급한다.

그뿐인가? 그런 교회의 목사를 왕으로 모신다. 목사는 영적인 하나님의 사자이니 목사의 말이라면 하나님의 말처럼 듣고 복종해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목사의 말, "한국 성도들은 피학적 성향이 있다. 강대상에서 무슨 말을 해도 '아멘, 아멘' 해야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이쯤 되면 목사는 왕처럼 군림한다. 그리고 왕과 킹메이커들이 단합해서 하나님나라를 경영한다. 그 결과, 여러 가지 부정적인 사태가 발생한다.

몇 가지만 말해 보자. 성전(궁전) 건축(아직도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교회가 있다), 그래서 구멍가게 죽이기 운동이 시작된다. 그러면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교회는 주변으로 밀려나야 한다. 사도바울의 '남의 발등 밟지 않기' 원칙은 잊어버린 지 오래다. 마치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흡수하든지 죽이는 적자생존의 원칙이 적용된다.

필자가 성경대학교에서 일할 때 문교부에서 정기적으로 성교육을 실시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나의 첫 반응은 성교육은 일반 대학에서나 필요한 것이지 기독교 대학에서 왜 필요할까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교회에서 목사와 성도들 간에 성추행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성추행에 대해서 잘 들어 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단다. 교회의 명예를 위해서(이것은 목사의 명예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 목사를 보호하고 피해자가 희생해야 한다는 통념 때문이다. 그래서 충성스러운 성도들은 이런 사건을 대외비로 취급한다.

목사도 사람이니 그럴 수 있겠다고 치자. 그런데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죄짓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다윗왕은 간통과 살인죄를 진 후에 깨닫고 회개한다(시 51편). 죄에 대한 벌은 받지만 용서도 받는다. 한국교회 목사는 용서받기 힘들다. 좋을 때는 왕으로 모시다가도 잘못하면 절대로 용서 못 한다. 아마도 목사를 너무 신성하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조지 맥도날드 목사가 교회 반주자와 간통했는데 노회의 징계를 받은 후, 성도들이 용서하고 다시 자기들의 목사로 초청했다는 아름다운 얘기가 있다. 교회에 용서라는 것이 없다면 교회겠는가?

목사를 신성시하지 말자. 성직자라고도 부르지 말자. 나같이 살이 있고 피가 끓고 있는 사람으로 보자. 내가 받는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인간으로 보자. 그러면 다음에는 용서하기가 좀 쉬워질 수 있겠다.

김북경 / 국제장로교 영국교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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