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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왜 이러냐고? 묻지 마라 모른다

하우어워스, "기독교인의 삶은 답 없이 사는 것 배우는 것"

김성회   기사승인 2011.03.16  17: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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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윤리학의 세계적인 석학', '미국 최고의 신학자'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스텐리 하우어워스 교수. 그가 일군 학문적 금자탑 저편에는 심각한 정신병 환자인 아내로 인해 겪어야 했던 처절한 외로움과 절망의 시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우어워스 교수는 지난 2월 16부터 이틀간 풀러신학교 심리학부가 마련한 Integration symposium의 주강사로 참석해 아내로 인해 겪었던 어려움을 담담히 고백했다. 그의 부인은 심한 조울증 환자였다.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하겠다고 고집하고, 하나님의 신호를 기다리며 잠들기를 거부하고, 환시와 환청을 반복했다. 그런 아내를 보살펴야 했고, 동시에 그로 인해 고통받는 아들을 아내로부터 보호해야 했다. 하우어워스 교수는 아내의 정신병으로 인해 미칠 듯한 고독함을 감내하며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진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우어워스 교수는 내러티브 형식을 자신의 주된 학문적 방법론으로 사용하는 학자답게 이야기 형식으로 자신의 삶을 신학적으로 조명했다. 정신병 환자의 가족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과정이 자신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하우어워스 교수는 이번 심포지움에서 세 차례에 걸쳐 강의했다. 강의 내용을 앞으로 네 번에 나눠 연재하고, 하우어워스 교수와 참석자들의 질의응답을 마지막으로 올릴 예정이다. 다음은 첫 번째 강연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미주뉴스앤조이> 편집자 주)

앤은 그때 테그레톨을 복용 중이었다. 조울증 증상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약이었다. 나는 정신 질환을 겪고 있는 환자들을 위해 항상 애를 쓰고 있는 정신과 의사들을 참 존경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복불복이었다. 약이 들을지 안 들을지 도저히 알 방법이 없었다. 앤이 아플 때만 해도 전기 자극 치료(electrical stimulation therapy)는 통용되는 방법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비슷한 증상에 가장 흔하게 쓰이는 치료법이 되어 있다.

테그레톨과 리튬을 동시에 복용하자 앤의 상태가 좋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앤은 자신이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상태가 호전됐다고 판단했다. 앤은 동네의 남성복 전문점에 취직을 했다. 그녀는 이틀 만에 해고됐다. 그녀한테 전해들은 바로 보건대 앤은 사장 노릇을 하려 했던 모양이었다.

앤은 점차 조절이 가능한 상태로 호전됐지만 나에 대한 분노는 오히려 더 강해졌다. 앤의 정신과 의사는 우리 부부가 부부 상담을 받아 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동의했고 앤은 반대했다. 결국 앤은 함께 상담받기로 마음을 먹었다.

   
 
 

▲ 솔직하고 진솔한 대화로 청중들을 매료시켰던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 (사진 제공 미주뉴스앤조이)

 
 

아담이 첫 학기를 마치고 성탄절 연휴를 함께 보낸 다음 1월에 하버포드대학으로 다시 돌아갔다. 아담이 돌아간 후부터 부부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3자의 등장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앤은 상담 시간 내내 나를 꾸짖느라 바빴다. 카운슬러는 앤을 제지하지 않았다. 앤에게 그런 식의 분노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결국 3번째 상담 시간 중간에 앤은 더 이상 상담을 받지 않겠다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앤은 나를 떠나겠다고 했다.

닳아 버린 나

난 나가떨어졌다. 아담은 없었다. 앤이 나와 헤어지겠다고 결심했던 그 순간에는 앤이 미쳐 있지 않았었다. 나는 마침내 앤에게 하고 싶었던 대로 하라고 했다. 앤은 노틀담대학이 있는 사우스밴드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차가 두 대 있었던 관계로 앤은 도요다 왜건을 골랐다. 나는 가지고 있던 돈의 대부분을 앤에게 줬다.

나는 앤의 가구며 옷가지를 정리해서 트럭에 실어 사우스밴드로 보내 줬다. 나는 뉴욕 시에서 컨퍼런스가 있었다. 아담은 필라델피아에서 넘어왔다. 제 엄마가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뉴욕현대미술관에 가서 폴 크리의 작품을 함께 감상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울음이 터져 버렸다. 그 지나온 세월을 겪고 나는 슬퍼하고 있었다.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나의 결혼 생활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은 것이었다. 그게 무슨 뜻을 가지는지 난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여태 해 오던 대로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한 발을 앞에 딛고 다른 한 발을 또 내밀고 앞으로 갈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나는 평소에 하던 대로 했다. 나는 출근을 했다.

빈 집에 돌아오는 일은 매우 이상했다. 사실 집이 비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양이들을 키우고 있었으니까. 난 고양이를 참 좋아했다. 샴 고양이 두 마리를 키웠는데 아담은 그 둘의 이름을 닙과 턱이라고 지었다. 그 두 마리의 고양이 덕분에 나는 집에 혼자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외로웠다. 사실 계속 외로운 인생이었다. 그렇지만 이번 경우는 좀 달랐다. 앤이 떠났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라기보다는 24년 만에 처음으로 내가 결혼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이 나를 외롭게 했다.

   
 
 

▲ 2시간 가까이 진행된 강연에 집중하고 있는 청중들. (사진 제공 미주뉴스앤조이)

 
 
앤이 떠나고 나서 우리 부부를 상담했던 카운슬러 조앤을 찾아가 상담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내 외로움에 대해 생각해 봤다. 첫 상담에서 조앤은 나에게 앤과 매일 부딪치며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물었다. 나는 앤의 얼굴 근육이 떨리는지를 관찰하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가 증상을 보이기 직전에 항상 얼굴 근육을 미세하게 떨었던 탓이었다. 조앤은 "당신 일자리를 잃은 셈이군요"라고 했다. 조앤 말이 맞았다. 난 일자리를 잃은 것이었다. 내가 정말 가지고 싶지 않았던 그런 일자리였지만, 난 그 일자리가 그리웠다.

난 계속 조앤을 만나러 갔다. 앤과 살았던 그 세월이 나에게 상흔으로 남아 있었다. 난 그 상처들이 내 인생의 방향을 정하게 둘 수는 없었다.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고, 난 주어진 대로 열심히 살았다. 앤이 떠났다는 소식이 대학 내에 어떻게 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장에게는 내가 이야기했다. 이런 일은 '사적'인 일로 볼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내 이혼이 학교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난 이 사안에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가르치던 대학원생들에게도 이야기를 했는데, 그중 그레그와 수잔은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 함께 식사를 했다. 함께 식사 기도를 하는데 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저 곁에 묵묵히 있어 줄 수 있는 친구들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앤은 사우스밴드의 짐 버첼 신부와 결혼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아파트를 구하고 짐 신부에게 자신은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임을 확신시키려 노력했다. 짐 신부는 물론 앤과 결혼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내가 더햄 시에서 살고 있었던 집은 처분을 위해 내놓았다. 이혼한 앤에게 재산을 분할해 주기 위해서였다. 앤은 가장 빠른 방법으로 이혼하길 원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는 자유의지로 이혼을 할 수 있었다(배우자의 책임 관계 소명이 필요 없이 부부 간의 합의로 이혼이 가능, 역자 주). 그래도 한 이불을 덮었던 부부가 이혼을 하는 데는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나는 이혼을 준비해 줄 변호사를 고용했고, 사우스밴드에서 앤을 위해 일해 줄 변호사도 내가 고용했다. 우리 측 변호사는 반대했지만, 난 앤을 돕고 싶었다. 앤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내기로 하고 별거 동의서를 작성했다.

떠난 앤의 자살 기도 소식

강의 차 출장을 다녀오니 아내가 전화를 했었다고 지인이 전해 왔다. 앤은 전화해 달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내가 다시 전화를 하니 앤의 남동생 데이비드가 전화를 받았다. 데이비드는 미시건 주에서 정신 질환 상담가로 일하고 있었다.

데이비드가 전화를 받아 놀란 나에게 그는 말했다. "모르고 있었어요? 앤이 자살을 시도했어요. 칼로 가슴을 찔렀어요. 칼이 부러져서 피를 많이 흘리지는 않았어요. 그러고 나서 앤은 911에 전화를 했더군요. 지금 병원에 있는데 괜찮아질 것 같아요." 나는 아무 말 없이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대답을 하려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말을 할 수 있게 됐을 때 나는 데이비드에게 "난 갈 수 없다네"라고 말했다.

갈 수 없다는 말을 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앤의 자살 시도 소식을 듣고 나서 그날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을 해 낼 수 없었다. 그날 저녁에 아담에게 전화해서 사실을 알렸다. 내가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난 일상대로 행동하려 노력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출근했다. 내가 일찍 출근할 때 항상 나보다 먼저 나와 있는 사람은 존 웨스터호프였다. 우리 둘은 남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출근하는 경우가 잦았다. 우리는 읽고 있었던 책이나 그날의 사무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존은 UCC의 목회자 출신이었다. 나는 예전에도 앤과의 관계를 그에게 상담하곤 했었다. 존은 앤이 나를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앤의 자살 시도 소식과 내가 가지 않기로 한 결심을 알렸다. 이걸 결심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난 앤이 사우스밴드로 간 이상 서로의 관계를 돌이킬 방법은 없다고 마음을 굳혔는지 모르겠다. 내가 나타난다면 그녀는 또 나를 원망할 것이었다. 나 없이 앤이 그녀의 질환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앤과 함께 계신 하나님

하지만 가지 않는 것은 참으로 힘들었다. 내가 24년간 함께 살았던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우리는 연인이었다. 우리는 함께 인생을 만들어 갔었다. 그녀가 음식을 준비하고 우린 함께 그걸 먹곤 했다. 함께 집을 사고 집을 꾸몄다. 지금 이 사람, 이 사람은 아담의 엄마다. 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아담을 사랑하고 보살폈다. 정말 괴로웠던 것은, 내가 존에게 설명했던 대로, 앤이 이젠 완전히 홀로였다는 것이다.

   
 
  ▲ 스텐리 하우어워스 교수 강연회 전경. (사진 제공 미주뉴스앤조이)  
 
존이 말했다. "아니지, 앤은 혼자가 아냐. 하나님이 앤과 함께 계셔." 우리는 앤을 위해 함께 기도했다. 나는 하나님이 앤과 함께 계셨고 지금도 함께 계신다고 믿고 있다. 그게 꼭 앤의 인생을 더 좋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 전 처남인 데이비드가 전화를 걸어 자기 동네인 랜싱 시로 앤을 데려간다고 했다. 난 데이비드에게 앤이 이제 그 분노를 동생한테 돌릴 것이라고 경고해 줬다. 앤은 자신의 인생을 관할하려는 어떤 사람도 용납하지 않았다.

앤의 아버지가 나에게 전화한 것은 몇 해 뒤의 일이었다. 앤에게 아직도 생활비를 매달 지불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난 그렇다고 알려 줬다. 앤이 몇 달째 아파트 월세를 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파트 주인은 경찰을 불러 앤을 퇴거 조치하려 하고 있었다. 아파트 주민들은 앤에게 겁을 먹고 있었다. 아파트 주인이 앤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앤의 아버지는 결국 랜싱 시로 날아갔다.

앤이 나와 이혼한 후 어떻게 살아갔었는지를 나는 상상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앤은 한 차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아담이 잘 지내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담은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해 줬다. 앤은 아담과 통화하기를 원하면서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아담은 제 엄마와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다고 이미 나에게 말해 놓은 터였다. 난 앤이 불쌍했다. 아담의 전화번호를 앤에게 알려 주고 아담에게 엄마로부터 전화가 올 것임을 알리는 전화를 해 줬다. 아담은 나에게 굉장히 화를 냈다. 전화번호라도 바꿔 주겠다고 했지만, 앤은 그보다 먼저 아담에게 전화를 해서 음성 녹음기에 메시지를 남겨 뒀다.

아담은 나에게 전화를 해서, 제 엄마한테 전화를 걸겠다고 했다. "나 이제 이 문제를 넘어서고 싶어요"라고 아담은 말했다. 나보고 전화기 옆에 붙어 있어 달라고 했다. 엄마와 통화를 하고 나서 다시 나와 통화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담은 제 엄마와의 통화 내용을 녹음해 나에게 들려 줬다.

"엄마, 아담이에요."

"아담, 누구요? (Adam who?)"

"아담이요, 엄마 아들. 엄마가 나한테 전화했잖아요. 그래서 전화 드리는 거예요. 엄마가 전화 왜 했는지 물어보려고."

"어,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전화했지."

이 대목에서 아담은 숨이 가빠져 있었다.

"엄마, 이러기 너무 힘들어요. 끊어야겠어요."

"그래라. (OK)"

앤이 한 말이라고는 OK가 전부였다.

불쌍한 앤, "Adam who?" 불쌍한 아담. 자기 자식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그녀 자신과 또 그녀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 모두가 불쌍했다. 그 통화 내용을 듣고서야 나는 비로소 앤과 살았던 아담의 인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게 됐다. 아담이 엄마 때문에 불평할 때면 나는 정신 질환을 겪는 엄마와 사는 많은 아이들이 더 힘든 상황을 견디며 살아간다고 지적해 주곤 했다.

나중에서야 아담은 나에게 "그때 아빠는 30대 중반이셨잖아요, 난 겨우 7살이었다고요"라고 말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방어기제를 아담은 가지고 있지 못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분노할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아담은 분노로 가득 찬 아이로 자라지는 않았다. 아담은 훌륭하게 자라 줬다.

앤이 죽은 지 이미 10년이나 세월이 흘렀다. 그녀의 어머니처럼 앤도 심장마비로 50대 후반에 죽었다. 앤의 동생인 데이비드가 치아 기록을 찾기 위해 나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서야 비로소 앤의 죽음을 알았다. 앤이 죽고 며칠이 지나서야 시체를 발견했다고 했다. 사망자 신원 확인을 위한 절차였다.

데이비드는 앤과 연락하기 위해 항상 노력했다고 했다. 앤은 데이비드가 자신이 사는 곳에 오지 못하게 막았었다. 앤을 돕기 위해 노력했던 데이비드 가족이 고마울 따름이다. 앤이 죽은 과정은 앤이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적나라하게 보여 줬다. 그것이 그녀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 해도 우리의 슬픔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앤의 인생에 대해 우리가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모른다, 묻지 마라

나는 기독교 신학자다. 사람들은 내가 이런 질문에 답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난 이런 질문에 뭐라 답변해야 좋을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내가 기독교 신학자로 살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이런 질문에 답변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인간성이라는 것은 그런 질문을 자꾸 하게 만든다. 만약 우리가 현명하다면 침묵 안에 머물러야 한다.

기독교가 세상을 이해하는 '정답'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우리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기독교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이다. 그런 '정답'은 기독교를 설명으로 폄하시킬 뿐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배우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답이 없이 사는 방법을 배우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정말 훌륭한 일이 될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답을 모른 채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다. 너무 쉽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나의 주장이 최소한 내가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내 인생이 왜 무진장 흥미로운지를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후속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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