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점점 더 양극화되는 것 같다. 첨예화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경쟁을 더 강렬하게 부추겨서, 성공하는 사람은 살아남고 실패하는 사람은 죽는 두 가지의 길만 보여 준다. 교회도 날로 비만해지는 대형 교회와 갈수록 빈곤해지는 빼빼한 개척 교회 두 종류로 나뉜다. 비만한 교회는 교인들은 많지만 마치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다. 엄청난 재정 수입 대부분을 자기 교회 치장과 유지·보수·관리하는 데 거의 다 소진해 버려 이웃에게 유익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은 아예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 덩치에 비해 아주 미미한 정도다. 이 반대편은 교인 숫자와 헌금 액수가 지나치게 적어서 자립할 수 없는 교회들이다. 이런 영양실조를 견디다 못해 결국 망해서 교회를 팔아넘기거나 아니면 대형 교회에 빌붙어 연명을 하는 비참한 교회도 적지 않다.

제3의 교회

우리 시대가 찾는 교회는 자기 몸 추스르기도 벅찬 비대한 교회도 아니고 그렇다고 힘없고 연약해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작은 교회도 아니다. 비록 크지 않을지라도 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교회를 원한다. 암 조직처럼 스스로 수많은 혈관을 만들어 가며 주변 건강한 세포들의 양분을 착취해 자기 배만 불리는 교회가 아니다.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세포처럼 새로 생겨나 자라다가 적당한 때에 새로 태어나는 다른 후배 교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과 정신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사라진다. 교회들도 생로병사가 있는 법이다. 자연의 이치를 따라 자연스러운 성장을 하고 그 결실을 나누어 주다가 나이 들어 더 이상 새로운 시대에 응답할 기운을 잃게 되면 후배 교회들에게 못다 한 역사의 소명을 남겨 주고 역사의 무대에서 영예롭게 퇴장하는 교회는 우리에게 석양의 아름다움처럼 고상한 여운을 남기며 소멸하는 것이다. 대형 교회들을 창립했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나이 들어 은퇴하면서 자기 자식을 후임자로 세워 그 막대한 종교 권력을 세습하는 것이나, 재정난에 허덕이다가 더 이상 교회를 운영할 수가 없어 돈을 받고 교회를 파는 것 등은 철학과 원칙을 상실한 우리 시대 교회들의 추잡스런 군상이다.

▲ 교회를 창립했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나이 들어 은퇴하면서 자기 자식을 후임자로 세워 그 막대한 종교 권력을 세습하는 것 등은 철학과 원칙을 상실한 우리 시대 교회들의 추잡스런 군상이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건강한 교회로 돌아서기 위해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를 제해 버리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세월이 흘러도 바른 신앙과 삶을 살아가지 않는 말로만 성도인 교인들을 교회에서 명퇴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누가 다른 사람의 신앙을 감히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교회를 나오라 마라 할 권한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복잡한 선별 퇴출을 쉽게 시행할 수 있는 단순한 방법이 있다. 지금처럼 성경 말씀을 듣고 배우는 데 열심을 두는 교회에서 성경 말씀을 가능한 한 문자 그대로 실천하도록 강조하면 된다. 그리하면 주님을 믿는 척하는 신앙에 익숙해져 있는 많은 묵은 신자들이 스스로 이 '과격하고 광신적인 이단' 교회를 떠나 안락하고 편한 '정상적인' 사이비 공동체를 찾아 나서게 되어 있다. 나는 이런 껍데기 신자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교회를 세속화하거나 천박하고 유치한 프로그램으로 이들을 달래는 그런 '쇼'를 그치고, 제자들의 길이요 사도적인 전통인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을 실천하는 교회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공 신화와 고지론으로 무장한 부유하고 윤택한 신자들을 끌어모으는 대형 교회도 아니고, 불확실한 비전과 이해 안 가는 불충분한 설교로 신자들을 실망케 하는 작고 연약한 교회도 아닌, 건강하고 비전과 철학이 분명한 성경적인 '제3의 교회'다.

이런 '제3의 교회'는 자기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빈털터리가 되어 맨몸으로 주를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다. 자기의 땅도 집도 다 하늘나라에 저당 잡힌 채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갖고, 이 땅에서는 마치 객처럼 어디에도 붙박임 없이 주께서 부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일하며 살아가는 나그네들의 공동체다. 자기를 부인하고 무슨 일이든지 하인처럼 묵묵히 수행하는 종들의 공동체다. 철저한 종교개혁을 요구하다가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에까지 박해를 받았던 재세례파들은 세 가지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물의 세례요, 둘째는 성령의 불로 받는 세례요, 셋째는 핍박을 통해서 받는 피의 세례다. 이들은 이런 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믿었다.

나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3난(難)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가난의 세례요, 둘째는 비난의 세례요, 셋째는 고난의 세례다. 누구도 이런 삶과 신앙을 즐거이 따르기는 어렵다. 그러니 제3의 교회는 하나님을 쉽게 믿고 그분의 은혜를 값싸게 얻으려는 사람에게는 불편한 교회다. 우리에게는 쉽게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교회보다 심각한 고민 후에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만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문턱 높은 교회들이 필요하다. 여러 대형 교회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문턱 높은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는 문턱이 아예 없고 부자들에게는 문턱도 높고 출입문도 좁은 교회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를 부인하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것을 기대하며 주님의 고난·배신당함·죽음을 감수하고서라도 주를 따르겠다는 사람에게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노인이든 소년이든, 남자든 여자든 구분과 차별 없이 동참할 수 있는 열린 교회다.

정신 나간 대한민국

왜 우리는 정신이 나갔을까? 왜 우리 국민은 배고픈 인간이 되기보다는 배부른 돼지가 될 것을 선뜻 결단하는 것일까? 도덕도 윤리도 진실도 모두 경제를 위해서는 한갓 검불처럼 가볍게 여기더니 우리 한국 경제는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고, 위정자들은 미국 경기 위축만 탓하면서 오늘날의 경제 위기에 대한 책임 회피에 급급하다. 대통령은 좌우를 함께 아우를 도량이 없어서 자기 측근만 품에 안고 정치를 하려다 보니 국론은 사납게 분열하여 나라에 갈등과 불화가 그칠 날이 없다. 이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과 그에 따른 희생들이 경제 불황으로 암울해진 우리 사회를 더욱 어둡고 우울하게 만든다. 우리 국민은 스스로 개들이 되어 목에 쇠고랑을 차고 개집에 앉아 배고픔을 참으며 기다리고 있건만 주인이 약속한 뼈다귀 국밥은 오지를 않고 있다.

나는 우리 사회의 현상을 히틀러 시대 독일 나치즘과의 연관성 속에서 조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히틀러는 국민이 배부르기 위해 자유와 인권을 유보하라고 요구했고, 국민은 그를 따랐다. 그들은 자신들과 견해를 달리하는 정적이나 집단에 대해 대화와 설득보다는 법과 공권력이라 일컫는 폭력으로 다스렸다. 국민이 느끼는 공포감, 정신적인 위축, 불안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아주 가볍게 여겼다. 그들은 이 모든 희생을 기꺼이 치렀다. 히틀러와 나치가 주리라 약속한 넉넉한 살코기와 따스한 국밥을 상상하며 자신들의 인간적인 존엄성과 권리를 송두리째 포기하고 스스로 개와 돼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와 희망은 빵과 음료는커녕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가정과 가족까지 모두 불구덩이 속에서 잃어버리는 비참한 종말로 끝나고 말았다. 나는 하나님이 2만 불 소득에도 만족할 줄 모르고 진실과 정의, 평화와 자유조차 포기할 터이니 '애굽에서 먹었던' 기름진 살코기를 더 달라고 아우성치는 한국 국민에게 하나님이 저주와 준엄한 책망을 내리기를 바란다. 이것이 우리 민족이 살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가문의 사업이 망하기를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었다. 부모님은 주류 합동 상사를 경영하며 경기 북부 지역의 술 판매 전매권을 갖고 있어 비교적 여유로운 수입을 보장받고 있었다. 술이란 게 호경기에는 사람들이 기분이 좋아서 마시고 불경기에는 기분이 나빠서 마시는 사시사철 장사인데다 전매까지 하니 도저히 망할 것 같지 않았다. 술 사업이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기도하니까, 하나님은 도저히 망할 수 없어 보이던 이 술 전매 사업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완전히 망하게 하셨다. 우리는 한 도시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집을 잃었고, 주민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그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거처가 없어 소양강 호숫가에서 천막을 치고 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결과로 우리 가족들은 잃어버렸던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우리는 다시 가족을 찾았고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부가 아니라 사랑이며, 술 사업으로 뒷전에 놓였던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돈을 빼앗기고 하나님을 찾은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국가 경제가 망하기를 바란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대통령의 장밋빛 환상이 가난과 배고픔의 잿빛 절망으로 변하기를 바란다. 더 이상 맘몬 우상에게 바치는 제사로 분주한 삶을 그치고 안식 속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찾고 잃어버린 국가와 교회의 품격을 회복하기 위한 여유를 얻기 바란다.

우리는 한국인이기 이전에 지구인이다. 나는 우리 한국 땅에서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불이익과 차별을 당하는 다른 지구인들의 슬픔과 아픔에 대해 통감하고 있다. 나는 국익 우선주의라는 모국의 추악한 집단 이기주의를 혐오한다. 그리고 이런 집단적인 악을 애국이라는 허울로 치장하여 시민의 양심에 최면을 거는 국가주의의 주술에 정신을 잃지 말고 공의와 진실의 힘으로 우리의 조국과 싸우기를 부탁한다. 더 정의롭고 더 평화로운 우리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정신 나간 한국 교회

전 국민적인 정신 나감의 현상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이 정신이 나가고 영혼이 텅 빈 육체에 더러운 일곱 귀신이 들린 형국이다. 한국 개신교는 역사적으로 볼 때 처음부터 가톨릭교회와 한 번도 대치하거나 분쟁을 치른 적도 없으면서도 서양 교회가 물려준 칼뱅파와 웨슬리파에 속해서 지금까지도 그 서양인들의 교파주의 감옥을 마치 귀족들의 궁전인 양 착각하며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거기에다 신학 논쟁을 가장한 온갖 권력투쟁과 이해 다툼으로 수백 수천으로 교단이 분열되어 정말 기독교가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또 교회가 하나뿐인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교회들은 이런 교회의 실효성이나 진정성, 정통성과 같은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이나 천착보다는 아직 그 정체성조차 확인되지 않은 개교회의 수적 부흥과 예배 장소의 치장과 같이 부차적이고 지엽적인 부분에 집착하며 온갖 열정을 쏟아붓고 있다.

교회는 누구를 위한 교회인지 무엇을 위한 예배인지 숙고할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예배와 의식을 치르기 바쁘다. 교회 안에서 허상과 우상들이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고 한국교회는 물신주의와 세속화의 파도 위에서 표류하고 있다. 성공 신화는 일반 사회에서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인기다. 교회는 목회 성공을 위한 전략과 프로그램들을 경쟁적으로 수입한다. 그 프로그램이 외제면 더 환영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알파'·'G12'와 같은 해외 유명 프로그램을 수입하여 시행하거나, 릭 워렌의 새들백교회·빌 하이벨스의 윌로우크릭교회·YM· CCC·테제 공동체·헨리 나우웬의 아르쉬 공동체 등 해외 유명 단체의 지점이 되거나 후광을 입는 것은 확실한 생존과 고속 성장의 담보가 되고 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선 단체에게 외국의 유명 브랜드를 선점하는 것은 필사적인 자구책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사대주의나 해외 의존도는 결국 우리 한국 사회 안에 해외의 모든 교파의 지점을 차리게 하여 역사성도 당위성도 없는 무한한 교파 분열을 일으켰다. 오늘날에는 선교를 한다는 명목으로 중국,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까지 진출해서 교파 분열에 기여하고 있다.

미사여구로 꾸며낸 환상과 화려한 프로그램으로 가로막힌 허위의 장막을 거두고 마침내는 피할 수 없이 가야만 하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로 다시금 돌이키자. 나는 칼뱅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나는 모든 교단주의와 교파주의를 거부한다. 그래서 목사가 될 수가 없었다. 그 어느 분파에도 속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의 가르침만을 따르는 예수파가 되겠다고 하면 교계 안에서 목사가 될 수 없는 아이러니한 현실 때문이다. 나는 목사가 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한 불이익보다 내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더 중요했고, 나는 지금도 이러한 선택이 깨어 있는 정신으로 내린 옳은 판단이었다고 믿는다.

정신 나간 인생

요즈음 불경기로 인해 예전보다 실직자들이 훨씬 많아졌다. 이럴 때에 반듯한 직장에 나가거나 안정된 자영업을 하는 것은 인생 보장 보험에 든 것처럼 든든해 보인다. 그러나 돈 버는 재미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우리의 인생은 속절없이 소멸되어 젊음이 다 가 버린다.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하는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초로의 시절로 접어든다. 그리고 한평생 젊음을 팔아 돈을 벌고 영혼을 팔아 쾌락을 사 온 덧없는 세월에 회한을 느끼기 마련이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결코 우리의 젊은 시절에 하나님나라와 그 공의를 위해 살아갈 수 없다. 한 번밖에 없는 우리의 생애를 장렬하게 살아 내고 우리가 정말 살아가고 싶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돈의 유혹에 뇌쇄되거나 돈의 위협에 굴복당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깨어 있기 위해 내가 권하고 싶은 삶은 무소유다. 무소유의 공동체가 내가 발견한 최선이다. 빈손으로, 새처럼 자유롭게 하나님나라 건설에 전념하기 위해 돈맛을 잃어버리자. 그 강렬한 맛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우정과 사랑처럼 은은하고 고상한 맛을 느낄 수 없다. 자본이 중심이 되고 신이 되어 버린 자본주의 사회의 한복판에서 돈의 혜택에 인 박이고 돈의 위력에 벌벌 떠는 자본의 노예가 된 삶에서 탈출하여 자유인이 되자. 이미 돈으로 환산되어 획일적으로 순위가 매겨져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본래 모습을 바라보자. 땅도 나무도 동물도 사람도 심지어는 우정과 사랑과 결혼조차도 가격이 매겨져 있는 돈에 정신 팔린 시대 속에서 생명과 자유의 소중함과 공의와 평화에 대한 간절함을 깨닫고 느낄 수 있도록 정신을 차리자.

이제 우리 자신으로 돌아오자. 성공을 위해 유명세에 무임승차하지도 말고 너무 빨리 앞서 가려고 남의 수고를 도둑질하지도 말자. 타인의 찬사와 존경을 받기 위해 거짓된 성과를 꾸미지도 말자. 이 모든 몰상식은 우리 사회의 관행이 되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시류에 편승하기가 쉽다. 다시금 우리 존재의 근원 우리 신앙의 뿌리로 돌아오자. 하나님의 형상 이외의 모든 치장과 가식을 벗어 버리고 벌거벗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겸손해지자. 성공하는 타자를 흉내 내며 열등의식 속에서 살아가지도 말고, 실패와 좌절의 늪으로 빠져드는 오만과 편견의 삶도 살아가지 말자. 우리 자신의 희망과 꿈, 자기 자신의 신앙과 양심, 자기 자신의 확신과 철학을 찾아내고 이를 용기 있게 실천하자. 불이익을 당할 것이다. 경쟁에서 밀려날 것이다.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신을 비난할 것이다. 그것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망과 기대를 저버릴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의 신념 때문에 괴로울 것이다. 감옥에 갈 수도 있다. 어쩌면 당신의 사랑 때문에 신체 일부를 잃을지도 모른다. 마침내는 눈물로 적셔진 어머니의 가슴에 묻힐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넘어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영광스러운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자. 적어도 우리는 이것을 믿고 있지 않았었던가?

송강호 / 개척자들 부설 코메니우스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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