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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열정과 성서 오남용

비판이 두려우면 교주가 되라

정용섭   기사승인 2010.09.03  16:2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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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목사가 2010년 8월 22일 주일 낮 예배에서 선포한 설교 '주의 종과 성도의 신앙생활'을 텍스트로 읽고 동영상으로 보았다. 그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교를 접한 건 처음이다. 설교를 접하고 다가온 전체적인 느낌은 다음과 같다. 두 가지로 구분하겠다.

하나는 금란교회를 세계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로 키운 목회자의 명성에 걸맞게 설교의 카리스마가 돋보였다는 사실이다. 청중들을 자신의 설교 안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이다. 내용도 단순 명료하고, 전달 방법도 직설적이어서 청중들에게 강하게 전달된다. 이런 요소들은 대중적인 설교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들로 설교자의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고는 이런 카리스마는 확보되기 힘들다. 다른 하나는 설교가 끝난 뒤에 내 영혼이 불편해졌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은혜를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지금 간략하게나마 내 입장을 해명하려고 한다.

위 설교에 은혜가 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케리그마가 빠진 설교였기 때문이다. 성경 공부나 직분자 교육이라면 모르겠으나, 주일 낮 예배의 설교라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의 한 순서인 설교는 바로 그 사건을 선포하는 일이다. 위 설교는 한결같이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복을 받고, 비방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김홍도 목사도 당신의 설교가 주일 낮 설교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이런 설교는 평생에 처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도 위의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신자들이 복 받는 길을 막으면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한다. 복 받는 방법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들에게 위 설교는 공허하다.

복과 화, 축복과 저주라는 이원론적 구조가 김홍도 목사의 설교를 끌어가는 패러다임이다. 한국교회 설교의 일반적 행태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부분에 예민하고 취약하다. 길을 가는 사람을 붙들고 "당신의 오늘 운세가 나빠 보인다" 하고 말하면 누구나 기분이 언짢을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포교하는 종파의 신도들을 간혹 만날 수 있다.

성서는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내리시는 화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런 구절은 모두 고유한 '삶의 자리'가 있다. 그것을 놓친 채 겉으로 드러난 구절을 그대로 청중들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은 영혼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 파멸의 위험성이 있다. 성서의 놀라운 영적 세계를 놓치고 대신 세속적이고 기계적인 세계관의 포로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성서의 놀라운 영적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려면 '성서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작업이 없으면 결국 성서는 죽는다. 성구를 나열하고 예화를 나열하는 게 설교는 아니다.

위 설교에는 성구가 많이 나온다. 각각의 성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문제는 그것을 이현령비현령식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위 설교에서 그런 현상이 어느 정도로 심각하게 나타나는지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주의 종이 아무리 큰 잘못을 행했어도 멸시하거나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술 취했던 노아, 처자식이 있는 몸으로 에티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들인 모세, 밧세바를 범한 다윗,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이야기를 인용했다.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어도 하나님은 주의 종들을 크게 들어서 쓰신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근거로 오늘 교회에서 목사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고 외쳤다. 이런 식으로 성서 이야기를 끌어다 쓰기 시작하면 모든 일이 합리화된다.

김홍도 목사의 모든 주장이 무조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다. 귀담아 들을 말도 있다. 목사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되면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권면하고 위해서 기도해 주고, 그래도 안 되면 혼자서 교회를 떠나라는 것이다. 모든 신자들이 목사와 똑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다. 자기와 생각이 다를 때마다 교회에서 파당을 짓고 모함하고 문제를 일으킨다면 견뎌 낼 수 있는 목사는 없다.

카리스마의 원리에 따라서 교회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옳다. 그렇다고 해도 위에서 인용한 성서 이야기를 근거로 목사에게 대들지 말라고 설교할 수는 없다. 교회에서 공연히 트집을 잡는 신자는 많지 않을 뿐더러, 목사가 진리에 열린 자세를 갖춘다면 굳이 성구를 들이대면서 공포심을 조장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의 질서가 자리를 잡는다.

개신교회(Protestant)는 기본적으로 교회의 수직적인 질서보다는 말씀의 진리를 우선하는 종파가 아닌가. 감리교회도 그런 정신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문제의 핵심은 목회에 대한 반론 제기가 아니라 그 과정의 비민주성, 독단성, 비신학성이다. 목사는 비록 목회의 효율성이 떨어지더라도 교회 안에서 문제 제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두렵다면 교주가 되라.

위 설교에서 성구 인용이 설교자의 주관적인 취향에 따라서 취사선택되고 오해되고 있는지를 한 구절만 구체적인 예로 들겠다. 위 설교의 성서 본문은 빌립보서 4장 16절과 시편 105장 15절이다. 앞의 구절은 주의 종을 섬겨야 할 이유에 대한 근거로, 뒤의 구절은 주의 종을 배척하지 말아야 할 근거로 인용됐다. 뒤 구절의 내용은 다음이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이 구절의 문맥을 살피면 이 구절이 무엇을 말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가나안에서 소수 씨족 공동체를 이루고 살 때 이방인들에게 공격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셨다는 사실을 진술하는 시적 표현이다. 이를 본문으로 설교한다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소수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분의 특별한 방식으로 지켜 주신다고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기름 부은 자들' 아닌가. 거친 세상에서 외롭게 살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 아닌가. 이 구절을 목사의 목회 절대권에 대한 근거로 제시한다는 것은 성서의 오남용이다.

성서의 놀라운 영적 세계를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인격적인 진정성이나 목회 열정에 상관없이 성서의 가르침과는 다른 설교를 할 수밖에 없다. 목회의 열정이 강한 것만큼 기독교의 근본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위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목사의 설교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발언이 나왔다.

"
저는 심히 부족한 종이지만 47년 목회하는 동안 저를 거역하고 비방하고 공격하며 교회를 소란케 한 사람들은 후에 보면 10년 안에 아들이 죽거나 딸이 죽거나 손자가 죽거나 본인이 암으로 죽거나 많던 재산이 다 없어지고 알거지처럼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언급이다. 아무리 금란교회 설교 현장의 분위기가 특별하더라도 이런 정도로 과격하게 공격적인 설교는 다른 데서는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했다. 김홍도 목사도 아마 저 말에 확신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자신의 기억에 그렇게 각인됐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저런 말을 할 수 없다. 선의로 해석하면, 자신이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신자들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좀 심하게 과장한 것일지 모른다. 목적만 좋으면 수단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사랑이 지나치면 거짓말도 진리가 되는가.

위 설교를 접하고 난 후나, 지금 그 설교에 대한 느낌을 쓴 후나 똑같이 필자의 영혼이 불편하다. 교회를 성장시키기만 하면 모든 목회 행위와 설교 행위가 용납되는 한국교회의 풍토를 우리가 어떻게, 언제까지 버텨 낼 수 있단 말인가!

정용섭 / 대구샘터교회 목사 · 대구성서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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