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는 입체적인 예수를 단면적 존재로 박제하고, 무지개색 예수를 무채색으로 탈색해 왔다. 생명의 떡이신 그분을 통째로 먹지 않고 제 입맛에 맞는 데만 떼서 편식해 왔다. 한번 받아들인 예수를 죽는 날까지 절대 바꾸려 들지 않는 외골수적인 태도는 한국교회를 좀먹는 가장 고약한 벌레다." (11쪽)

박총의 글을 읽으며 생각의 편협성을 지적받는다. 미국에서 직수입한 기독교를 한국에서 믿으며 굳어진 생각들을 풀어헤치게 만든다. 입체적이고, 무지개색이며,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단면적 존재로 박제하고 무채색으로 탈색하며 내 입맛에 맞는 부분만 떼서 편식해 왔다. 게리토마스는 그의 저서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에서 영성의 9가지 색깔을 소개하며 신앙의 다양성을 말한다. 박총은 그 자신의 글로 예수의 다양성을 적고 있다.

지중해 영성과 켈틱 영성을 비교한다. '지중해 영성'이란 기독교가 본래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전체로 확산되었고 이것이 북미를 거쳐 한국으로 들어온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영성은 지중해 영성의 한 지류라고 볼수 있다. (173쪽) 지중해 영성은 인간의 죄성에 대한 뼈저린 자각과 그리스도의 가없는 속죄를 쉼없이 고백한다. 인간의 죄악과 세상의 타락에 방점을 놓고 있는 지중해 영성이 영과 물질을 분리시키는 경향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한국교회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성과가 무색하게도 뿌리깊은 이원론의 악습을 좀처럼 쳐내지 못하고 있다. (173쪽)

지중해 영성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무한 강조하는 반면, '켈틱 영성'은 창조의 선함에 방점을 찍는다. 켈틱 신자들은 빙엔의 힐데가르트가 말한 대로 "온 세상이 창조주의 입맞춤에 안겨 있다"는 것을 믿는다. 죄가 하나님의 형상을 흐릿하게 하고 창조 세계를 비릿하게 했지만 본래의 빛깔과 향기를 다 지우지는 못했다. 이땅은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이기보다는 은총과 선함이 가득 찬 세상임을 믿는다.

지중해 영성과 켈틱 영성을 보며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지중해 쪽에 치우친 것 같다. 교회는 사람을 죄인으로 보고 설교도 "죄를 회개하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런 틀 속에서 신앙생활하기에 기쁘기보다 우울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일상을 지낸다. 켈틱 영성을 같이 적용했다면 훨씬 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녀로 설 수 있으리라. 기쁨에 충만해 일상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지중해 영성으로 치우쳐 있기에 켈틱 영성으로 더 나아가야 하리라.

신앙은 내 것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일상의 삶이 다양하듯 신앙의 모습도 다양하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도 옳고 너도 옳을 수 있다. 서로 보충하여 온전할 수 있다. 구속 신앙에만 치우친 우리들은 켈틱 영성을 통해 창조의 선함과 일상의 아름다움을 배운다. '정의로운 전쟁론'에만 익숙한 우리는 메노나이트 전통을 통해 평화의 그리스도를 만난다. 복음의 사회 정치적 에너지를 잃은 우리는 해방 신학을 통해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삶을 배운다. 신비 체험에 두려움이 있는 우리는 오순절교회로부터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자본주의와 소비 문화가 성경적이라고 믿는 우리는 유럽의 사회주의 기독교인들로부터 다른 사회 정치적 관점도 성경적일 수 있음을 배운다. (181쪽)

우리는 보고 듣는 것을 통해 세계관을 정립한다. 미국의 교회 프로그램들을 도입하고 미국의 영성을 수입한 우리는 한국이라는 땅에서 그것만이 옳은 것처럼 여기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런 관계로 신앙의 폭이 좁고 생각의 폭도 좁았다. 나와 맞지 않으면 다른 것인데 틀리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했다. 이런 우리는 켈틱 영성, 메노나이트 전통에 속한 평화의 그리스도, 해방 신학을 통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삶을 배울 수 있다. 오순절교회로부터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는 법을 ,유럽의 사회주의 기독교인들로부터 다른 사회 정치적 관점도 성경적일 수 있음을 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삶과 사상을 통해서 나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갈 수 있다. 완전한 균형을 잡기는 쉽지 않지만 다른 내용들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통해서 균형 잡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박노자의 저서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에서 우리 대한민국이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쳤기에 왼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듯이, 우리의 신앙과 삶이 한쪽으로 치우쳤기에 다른 쪽으로 나아가야 함을 깨닫게 한다.

박총(寵)을 통해 여러 번 '총'(銃,gun)을 맞는다. 그 총을 맞음으로 이전에 생각들은 죽고 새로운 생각들이 생겨난다. 기분 나쁘지만은 않다. 과거의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시간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과거의 생각들이 죽고 새로운 생각들이 살아남을 통해 고통을 겪는다. 피하지 못할 고통이다. 지중해 영성과 켈틱 영성을 통해서, 서로 다른 사상들을 통해서 서로 보완하고 내 생각을 다듬어 나가게 한다. 좁을 생각을 틀을 깨게 만들고 나와 다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만든다. 욕쟁이 예수는 나를 욕하게 하고 예수와 닮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욕하게 만든다. "야, 이 씨발 새끼야!" (15쪽)

배상수 / 화평교회목사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