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항쟁에 나섰다가
목숨을 읽은 류동운. ⓒ자료사진
사람은 누구나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한다. 제 아무리 믿음이 크다고 자랑하는 사람이라도 믿음과 생명을 바꾸자는 제안에 쉽게 응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기에 고통과 아픔을 온전히 알고 계셨던 예수님의 죽음이 위대한 것이고, 믿음과 목숨을 바꾼 순교자들의 삶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자신의 믿음을 지켜냈다. 그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역사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자신의 생명을 불살랐다. 그들의 죽음이 있었기에 우리는 아직도 믿음의 고귀함을 이야기할 수 있고, 인간의 존엄을 꺾으려는 폭력이 결국에는 패배하고 만다는 진리를 말할 수 있다. 류동운. 문용동. 김의기. 이들은 과연 무엇을 지키려고 가장 소중한 생명까지 던졌단 말인가.

류동운은 류연창 목사(대구 봉산성결교회 원로목사)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1961년 경북에서 태어났다. 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그는 학생이던 1976년에 구속된다. 그의 아버지 류연창 목사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던 당시, 집안을 수색하던 기관원들이 독재 정권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류동운의 글을 발견한 것이 이유였다. 류동운은 아버지의 강력한 항의로 3일만에 풀려날 수 있었지만, 이 일은 그의 가슴에 독재 정권의 부당성을 심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79년 광주진흥고를 졸업한 류동운은 한신대에 입학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가 성결교단에 속한 목회자였음에도 사회 복음을 더 자세히 배우려는 목적으로 한신대를 선택한 것이다.

1980년 5월, 류동운은 대학 2학년의 청년이었다. 그는 광주의 소식을 접하고 5월 초 아버지가 계신 광주로 내려와 전남대 학생들과 시위에 나선다. 그러던 중 5월16일께 계엄사에 연행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고 풀려나게 된다. 잠시 안전한 곳에서 광주의 비극을 목도하던 류동운은 5월25일 친구의 형이 거리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현장을 목도한 후, 다시 거리로 나선다. 이즈음에 쓰여진 그의 마지막 일기는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이 역사를 위해 한 줌의 재로 변합니다. 이름 없는 강물에 띄워주시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미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거리로 나섰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곧장 도청에 들어가 시민군과 합류하여 여러 활동을 벌인다. 아들이 죽음을 사이에 두고 도청에서 계엄군과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류 목사는, 5월26일 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온다. 목욕하고 친구들에게 그동안 잘못한 일의 용서를 구하며 마지막 정리를 한 류동운은 다시 집을 나섰다. 이 때 류 목사는 아들을 붙잡으려 했다고 한다. 류동운을 만류하는 류 목사에게 그는 “아버지 붙잡지 마세요. 다른 집 자녀들은 다 희생하고 있는데, 왜 자기 아들만 보호하려고 합니까? 평소 소신이 왜 변합니까? 아버지 설교 말씀에 역사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만 이 역사가 큰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를 붙잡지 말아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류동운이 언급한 설교는 바로 류 목사가 한 것이었다.

류 목사는 이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이 때만큼은 자신이 그런 설교를 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류 목사는 자신이 지지 못한 십자가를 아들이 대신 졌다면서, 그런 십자가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류동운은 계엄군이 도청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던 5월27일 밤,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생을 마감한다. 류 목사도 이빨을 보고서야 아들의 시신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시신은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온몸은 화상으로 검게 그을려 있었고, 군화로 잔인하게 짓밟은 흔적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이후 류 목사는 아들의 추억이 남아 있는 광주를 떠나 대구 봉산성결교회에서 새로운 목회를 시작한다. 류 목사는 당시만 해도 광주의 사정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대구에서 새롭게 민주화운동을 하고,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1984년에는 안전기획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기도 한다.

비록 사람들 대부분이 류동운의 이름을 모른다고 해도, 류동운을 기억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그의 정신과 죽음을 기리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86년 류동운의 모교 한신대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졌고, 1989년에는 그에 대한 명예학위 수여식이 열린다. 류동운 열사의 추모비는 전국 대학 중 최초로 세워진 것으로 상당수의 다른 학교 기념물들이 정권에 의해 제거되는 수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신대를 굳게 지키고 있다. 류연창 목사의 둘째 아들 류동인도 한국방송(KBS)이 광주민중항쟁에 대해 왜곡 보도하는 것에 분노해 시위를 하다가 2년 넘게 옥고를 치렀다.

▲광주의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꾸짖었던 청년
김의기는 죽음으로 바로잡으려 했다. ⓒ자료사진
김의기는 류동운보다 2년 빠른 1959년 4월20일 경북 영주에서 6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김의기의 가족은 1970년대 초 상경해 근근히 가정을 꾸릴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1976년 서강대 무역학과에 입학한 김의기는 대학생이 없었던 그의 가족의 희망으로 자리잡는다. 당시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지닌 의미를 생각한다면 그의 가족이 김의기에게 걸었던 기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족의 기대와는 다르게 농민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의 일기를 보면 농민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자신이 자라온 삶의 터전을 버리지 않고 새롭게 바꾸어 보겠다는 의지는 동아리 활동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유신 정권의 몰락을 보면서 졸업을 늦추고 당시 정지되어 있던 학생회 활동을 부활시키는 일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김의기가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당시만 해도 김의기의 가족 중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그는 형제교회에 출석하면서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감청)와 기독교청년협의회(EYC)에서 농촌 선교에 대한 꿈을 키워 나간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가난한 농촌이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새롭게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김의기의 관심은 결국에는 신학대학교로 편입하여 농촌 목회를 하겠다고 결심하게 만든다. 비록 식구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의 신앙에 대한 열정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김의기에 의해 그의 가족은 전부 형제교회에 출석하는 신앙인이 된다. 김의기의 죽음 이후, 신앙에 대해 부정적이던 부모님도 교회장을 치른 것이 계기가 되어서 신앙을 가진다. 김의기의 바로 손위 언니인 김주숙씨(47)는 “의기가 역사적으로 볼 때는 열사겠지만, 우리 가족의 입장에서는 복음의 씨앗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그녀는 강화도에 있는 작은 섬에서 남편과 함께 교회를 섬기고 있다.  

농촌 선교의 꿈을 키우던 김의기는 1980년 5월 광주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삼엄한 경계를 뚫고 광주로 달려간다. 그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살육의 현장을 목격한 후, 이 사실을 서울 시민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광주의 실상을 알리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작성한 후, 5월30일 낮 기독교회관 5층에서 유인물을 살포하고 투신하기에 이른다. 김의기에게는 자신의 생명과 바꾸어서라도 하고 싶은 간절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땅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는 김의기에게 사람들은 다가설 수조차 없었다. 계엄군들은 접근하는 시민들을 막고, 그가 뿌린 유인물을 수거하는데 바빴다. 사람들이 조금만 서둘러 김의기를 병원에 후송했다면 그의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후 경찰은 김의기의 어머니에게 그의 죽음을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고, 그의 방을 뒤져 증거가 될 만한 자료를 찾아가는 데에 바빴다.

그가 죽으면서까지 알리고 싶었던 광주의 진실은 그의 마지막 유서라고 할 수 있는 '동포에게 드리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 성명서에서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 우러르며 자유 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살 것인가? 또다시 치욕의 역사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조상이 될 것인가?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힘 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방향에 서 있다.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라고 말한다. 당시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살육에 대한 무관심과 왜곡을 꾸짖는 그의 준엄한 목소리는 20대 청년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1980년 6월2일, 경기도 금촌 기독교 공원묘지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김동완 목사(전 KNCC 총무·김의기가 출석하던 당시 형제교회 담임)의 집례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수백 명의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참석해 광주민중항쟁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대규모 집회가 되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추모는 끊이지 않았다. 해마다 김의기의 모교 서강대에서는 '의기제'라는 이름으로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고, 그가 생전에 활동하던 감청과 형제교회에서도 그를 기억하는 예배가 드려진다. 1988년에는 모교 서강대에 그를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졌고, 1999년에는 광주 5·18 묘지로 이장하게 된다.

▲호남신학대학교에 세워진 문용동 전도사 추모비.
이제서야 프락치의 오해를 벗고 재조명되고 있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류동운과 김의기에 비해 추모 열기는 덜하지만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1980년 광주'를 살다 간 사람이 문용동 전도사이다. 문 전도사는 1952년 9월6일 전남 영암에서 3남5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70년부터 친구의 전도로 광주제일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시작한다. 고등학교 때 시작된 신앙은 날로 깊어져서 1972년에는 광주제일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1973년에는 호남신학대학교에 입학하기에 이른다. 이후 광주제일교회의 '제일중등성경구락부'의 교사로 봉사하던 문 전도사는 군입대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79년 7월, 호신대 3학년이었던 그는 전남노회여전도회연합회의 파송으로 상무대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시작한다.

그가 4학년이 되었을 때 광주의 비극과 마주하게 된다.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되던 5월18일은 주일이었는데, 상무대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집으러 돌아가던 문 전도사의 눈에 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들어온다. 이를 말리다가 항쟁에 휘말려든 문 전도사는 이후 헌혈운동 등으로 광주민중항쟁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공수부대원들이 물러간 뒤, 문 전도사는 도청 지하실에 있던 무기고 경비를 자원하고 나선다. 당시 무기고는 문 전도사를 비롯한 5명의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들 중에서 따로 지휘자는 없었지만 문 전도사가 가장 연장자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들을 주도해가기 시작했다. 문 전도사는 극도의 공포와 불안이 넘쳐나던 도청에서도 틈만 나면 기도하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메모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도청을 둘러 싼 긴장이 고조되고, 계엄군의 도청 진입이 확실시되던 5월26일 저녁, 문 전도사의 누나가 곧 계엄군이 쳐들어올 거라며 집에 가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문 전도사의 대답은 단호했다. “내가 나가면 누가 여기를 지키느냐? 내가 죽거든 태극기에 싸서 묻어 달라.” 결국 문 전도사는 자신의 예감처럼 5월27일 새벽, 가슴에 계엄군의 총을 맞고 목숨을 잃고 만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는 방송에 안심하고 나가는 순간, 문 전도사의 가슴을 노린 총구가 불을 뿜은 것이다.

문 전도사의 고귀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모하는 움직임은 최근에야 활발해지고 있다. 그의 이름을 마음놓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다른 학교에서는 대부분 1980년대 말이나 1990년대 초반에 명예졸업장이 수여되고, 추모비가 건립된데 반해 문 전도사에 대한 명예학위는 2000년에 주어졌고, 추모비는 2001년이 되어서야 세워졌다. 문 전도사에게 꾸준히 제기되었던 프락치설이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는 상무대의 전도사였다 △친여적 성향이 강한 광주제일교회를 출석했다 △그가 행한 TNT 뇌관 제거 작업은 첩자 행위이다 등의 이유를 들어 그의 순수성을 의심했다.

그러나 5월22일자 그의 일기를 보면 그가 첩자였다는 추측에 무리가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남녀노소 불문 무차별 사격을 한 그네들/ 아니 그들에게 무자비하고 잔악한/ 명령을 내린 장본인/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 광주의 비극을 가져온 장본인에게 역사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첩자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TNT에서 분리한 뇌관을 언제든 연결만 하면 다시 쓸 수 있게 밖으로 유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계엄사의 지령으로 시민군의 마지막 무기인 TNT를 무력화하기 위해 파견된 첩자라는 일부의 추측을 무색하게 만든다.

때로는 열사로, 때로는 민주화 투사로 불리는 그들의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기독인으로 몸을 바쳐 믿음과 정의를 지킨 사람들 대부분이 20대의 청년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들의 무덤은 말이 없지만 그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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