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의 경험

나도 그렇지만 또래 친구 부부들도 육아에 정신이 없다. 만나면 나누는 대화도 이제는 아이들 이야기가 반 이상이다. 한번은 친한 친구 한 녀석이 지난 주말에 놀이터에 나가 아이랑 노는데 자기 애보다 몸집이 큰 애들이 괴롭히는 걸 보고 있자니 화가 나더라고 이야기했다. 애들이 다 그렇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하며 웃었지만, 사실 나도 요즘 그런 경험을 자주 한다. 애지중지하는 내 아이를 다른 부모가 막 대해서 울린다거나, 다른 아이들이 내 아이를 때려서 울리면 애처롭기 그지없다. 솔직히 내가 대신 맞아 주고 싶은 심정이랄까. 이러다 아이 버릇 나쁘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매번 자주 조심하게 되지만, 아이가 없었을 때 자신했던 것만큼 아이를 강하게 키우는 게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뿐이 아니다.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던 TV 채널에서, 유아 살해 사건이나 고질병에 걸린 영· 유아, 전쟁 중인 나라에서 다치는 아이들 보도를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그 아이의 부모가 되었을 때 갖게 될 심정적인 아픔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 같다.

전라도 조교에 대한 기억

돌이켜 보면 대학 새내기 시절 실험 수업 조교는 유독 무서웠다. 실험에 사용하는 약품이나 시편, 장비들이 위험했기 때문이었는지, 혹은 단지 고가의 장비들을 망가뜨릴까 봐 노심초사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자한 교수님의 이론 수업이 끝나면 실습 조교가 들어와서는 '군기'를 잡곤 했다. 그중 유난히 물리학 수업 조교가 특이했는데, 우리는 그를 '전라도 조교'라고 불렀다. 때때로 어떤 이들은 그를 '전라도 사이코'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수업 시간 중에도 실습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간혹 길게 했다. 그것은 약간 악순환 같아 보였는데, 특유의 사투리를 쓰면서 고향에서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할 때면 학생들이 하나둘씩 수근거리기 시작했고, 이내 눈치를 살피던 그는 점점 더 흥분하여 우리들에게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전라도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지 못할 거란 말을 되뇌곤 했다. 우리는 그나마 부족한 실습 시간에 대수롭지 않은  일로 자꾸 시간을 낭비하는 그런 그가 이상해 보였다. 우리는, 아니 나는 전라도 조교인 그가 많이 이상해 보였다.

5·18이 뭐길래

지난 5월18일은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이었다. 기념행사에 대통령도 불참했고 끝날 때 방아 타령을 연주한다 하여 논란이 일기도 한 이날은, 벌써 30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젊은 세대 다수가 5·18에 대해 모른다는 기사가 간간이 나올 때면 마음이 답답하다. 다행히 몇 년 전 5·18을 직접 다룬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로 인해 대중들은 좀 더 가까이 5·18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극장을 나오면서 '우리나라에서 정말 저런 일이 있었냐'며 눈시울이 붉어진 학생들이 다소 놀란 듯이 대답하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난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어린 나이에 경상도에 살면서 겪은 80년대는 우리나라에 빨갱이가 있다더라, 학생들이 과격한 시위를 한다더라, 전라도 사람들이 유별나다더라,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의 지역감정이 나쁘다더라, 김대중 씨는 대통령병에 걸린 사람이라더라,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남한이 빨갱이 나라가 된다더라 하는 정도의 이야기들이었다. 때론, 대부분의 말들이 정부가 유포한 잘못된 이야기라는 말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스포츠 신문을 대하듯, 사실 그런 면이 있으니까 그런 소문이 떠도는 것 아니겠냐고 이야기하면서 어느 정도는 긍정을 하는 느낌을 자주 받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광주'를 모르고 자랐다.

5·18, 지옥 같은 기억들

5·18은 알다시피 광주에서 있었던 민주화 운동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고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거세지자 전두환 보안 사령관을 우두머리로 하는 하나회가 12·12 사태를 통해 정권을 탈취하고 개헌을 막기 위해 전국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1980년 5월 17일에는 광주에 2개의 대대가 진주했고, 18일 오전 10시에 전남대, 조선대 등에서 시작된 비상계엄 반대 시위를 강경 진압하면서 시위는 점차 시내 중심가로 퍼졌고, 시위가 거세지면서 공수 부대원들이 시위대와 시민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강준만 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학생들은 '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곧 대치 중이던 공수부대 책임자가 '돌격 앞으로' 하고 명령을 내렸고 공수대원들은 학생들에게 파고들면서 곤봉을 휘둘렀다. 그 곤봉은 쇠심이 박힌 살상용 곤봉으로, 이를 맞은 몇몇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 차 위에서는 무전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되어 올라온 즉시 발가벗기고 굴비 엮듯 엎으리게 하고는 계속 난타했다. … 공수부대 병사들은 … 첫날부터 대검을 사용하고 지나친 폭력에 항의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 대며 구타하고, 여성들에게 폭행하고 옷을 찢고 심지어 젖가슴을 대검으로 난자하였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 1권' 중,122~123쪽)

"당시 시민군에게 붙잡힌 공수부대원은 광주에 배치받기 전 3일 동안이나 식량 배급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투입되기 직전에는 소주를 공급받았다고 증언했다. … 사람을 죽인 건 순간 미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잡혀 온 시민들을 대상으로 워커발로 얼굴 문질러 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 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오줌 먹이기, … 송곳으로 맨살 후벼 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트기, 손톱 밑에 송곳 밀어넣기 등과 같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같은 책, 127~128쪽)

"도청에서 철수한 공수부대는 … 철수하던 중 진월동에 이르러서 인근 지역에 장난삼아 총질을 가했다. … 이 학살에 대해 송기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농부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히고 저수지에서 목욕하는 중학교 1학년짜리를 오리 사냥하듯 쏘아 죽였으며, 배수관 밑으로 숨어 들어가는 여인에게 6발이나 총을 쏘아 죽이고, 도망치다 벗겨진 고무신을 줍는 국민학교 4학년짜리한테 10여 발이나 총을 갈겨 몸뚱이를 걸레로 만들었다.'" (같은 책, 148쪽)

역사가 내 삶으로 들어오기까지

내가 처음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알게 되었을 때 새내기 때의 그 '전라도 조교'가 떠올랐다. 그가 항상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피해 의식, 자기와 자신의 부모님들이 경험한 일들을 너희가 겪는다면 알게 될 거라던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글자로 접한 그 사건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땠을까. 만일 내 아버지가 내 앞에서 피를 흘리며 구타를 당했다면, 만일 내가 그 지방에 살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그 조교보다 더 멀쩡한 모습으로 살 수 있었을까. 아내와 나는 지금도 내 아이가 잘못되지 않을까 지나치게 걱정하고 조바심을 낸다. 세상에 그렇지 않은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하나의 객관적 사건이 아닌 관계적 아픔으로 다가온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감정 이입이 된다.

그렇다면 5·18은 끝난 사건인가.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뒤에서 자주 듣던 말 중 하나는 '저 사람 고향이 전라도래'였다. 전라도가 고향인 지인 중 하나는 아버지가 아들이 차별받을 것을 걱정하여 주민등록상의 주소지를 서울로 옮기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얼마 전 강준만 교수 책을 읽고 약간 흥분하여 서평을 쓴 적이 있었는데, 댓글을 쓴 어떤 이는 자신이 전라도 사람이라고 밝히면서 전라도 사람들은 더 이상 광주를 언급하는 걸 싫어한다고 했다. 차별을 받는 것도 연민의 눈으로 대하는 것도 피한 채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처럼 상처를 숨기고 살아야 하는 우리 역사의 한편이 너무 답답하다.

우리는 너무 역사에 둔감하다. 냄비 근성으로 대변되는 초고속 사회의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과거를 잊은 채, 혹은 모른 채로 현재를 사는 일에 너무 익숙하다. 때때로 역사가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의 한 사건들은 우리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으며 그 일그러진 방향들이 지속적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그것을 먼저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의 이웃과 사회를 이해하는 길이며 내 삶으로 들어온 역사를 끌어안는 길이다.

* 이 글은 웹진 <크리스찬 인사이트>(http://www.christianin.co.kr/)에도 중복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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