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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바치는 '떠돌이 목자의 노래'

문동환 목사 미국인 아내 문혜림 여사와 '두레방'

박은영   기사승인 2009.10.07  14:3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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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다.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9월 28일 월요일 오후 5시경,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 수도교회(목사 정현진) 예배실에서 흘러나온 찬송가는 한 노신학자의 일생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그날 자서전 출판 기념회에서 신길순 사장(도서출판 삼인)이 헌정한 자서전을 아내에게 다시 바친 그는 마치 할 일을 다 해낸 사람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 아내에게 자서전 <떠돌이 목자의 노래>를 바친 후 문동환 목사는 자서전 <떠돌이 목자의 노래>를 52년 동안 함께해 준 아내 문혜림 여사에게 바쳤다. (사진 제공 도서출판 삼인)

 
 
이날 수도교회에서 자서전 출판 기념회를 연 이는 문동환 목사(88)였다. 고 문익환 목사의 동생이기도 한 그는 1976년 3·1민주구국선언문 사건으로 투옥되어 2년간의 옥살이를 했고, 2년 뒤인 1978년 석방되었으나 YH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

1979년 10·26으로 유신 정권이 막을 내리고 나서는 신군부의 등쌀에 미국으로 망명을 갔다. 미국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애쓰던 그는 1985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한신대에 복직했다.

정년 퇴임 후에는 재야에서 민주화 활동을 하다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1988년 정치에 입문하여 평민당 수석 부총재로,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91년 이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젊은 목회자들과 성서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주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두고 그들을 생산해 내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민중신학을 더욱 심화한 '떠돌이 신학'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 문 목사의 집에 초대받았던 박형규 목사가 돌 밥을 먹었다는 이야기에 "지금 밥에는 돌이 없는 거 같네요"라며 웃는 문혜림 여사. (사진 제공 도서출판 삼인)

 
 
문동환 목사의 반생을 돌아보면 그의 옆에는 문혜림 여사(73)가 항상 함께했다. 미국의 하드포드 신학교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 문 목사는 아내인 헤리엇 페이 핀치벡에게 문혜림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 주었다.

결혼 초기에는 한복만 입으면 한국인이 되는 줄 알고 한복을 입은 채 한국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한국과 미국 문화의 차이도 많이 느꼈고, 크고 작은 실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워 나갔다.

문 목사 부부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은 뒤 막내인 영혜 씨를 입양했다. 버려지는 많은 아이를 한국의 기독교인이 한 명씩만 입양해도 외국으로 입양을 보내거나 고아원으로 가는 아이가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문 여사는 한국인이 입양에 대해서 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남편을 두어서 문 여사도 많은 어려움들을 겪었다. 중요한 사건이나 시위가 있을 때마다 문 목사와 함께 감시를 당하거나 가택 연금을 당했다. 문 목사가 감옥살이를 할 때는 구속된 민주 인사의 부인들과 함께 행동했다. 당시 그녀는 의정부에 있는 미군 부대에서 사회사업가로 일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외국으로부터 들어오고 나가는 우편물이나 지원금, 물품들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할 수가 있었다.

문 여사가 남편인 문 목사의 뜻을 지지하고 한평생 정의롭게 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린 시절 교회의 중고등부 교사들 때문이었다. 예일 신학교의 신학생들이었던 교사들은 당시의 흑인 인권 운동에 관여하고 있었고, 어린 학생들과 함께 뉴욕의 흑인 빈민가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이 경험은 그녀가 올곧은 삶을 살게 해 준 초석이 되었다.

   
 
  ▲ 의정부 캠프 스탠리 앞에 있는 '두레방'의 전경. 예전에 이 자리는 성병 진료소였다. 아픔을 안고 모여들었던 기지촌의 한국 여성들은 모두 떠났고, 지금은 필리핀 여성들이 '두레방' 사무실로 모여든다. ⓒ두레방 박은영  
 
문 여사의 한국 생활에서 '두레방'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두레방'은 1986년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전국연합회가 설립한 기지촌 여성을 위한 특수 선교 센터이다. '두레방'은 당시 의정부와 동두천에서 미군들을 대상으로 매매춘을 하는 여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사랑방이자, 그들의 어려움과 호소를 들어주는 곳이었다.

70년대 중반부터 동두천과 의정부의 미군 부대에서 일했던 문 여사는 미군 기지 근처에서 일하는 한국인 여성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85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문 여사는 이듬해부터 유복님 씨와 함께 동두천과 의정부의 뺏벌(배가 많이 생산되던 지역으로 배나무가 많아 배벌로 불렸고, 그러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다가 뺏벌로 불리게 되었다. - 편집자 주)에 있는 '두레방'에서 기지촌 여성들을 위해 영어도 가르치고 상담도 해 주었다. 또한 기지촌에서 늙어가는 여성들을 보며, 그녀는 나이 든 여성들이 자립하고 정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그녀들과 함께 '두레방 빵'을 만들어서 팔기도 했다.

   
 
 

▲ '두레방' 유영님 원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문 여사. 두레방 앞마당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유영님 원장. 그녀는 초기 문 여사가 함께 일을 했던 유복님 씨의 동생이다. ⓒ두레방 박은영

 
 
지난 8월 31일 그녀가 거의 20년 만에 다시 찾은 '두레방'은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기지촌 여성들이 한국인에서 필리핀 여성들로 바뀌었기 때문에 '두레방'의 역할이 달라졌다. 또한 미군 기지가 거의 평택으로 이전을 한 탓에 현재 '두레방'이 있는 뺏벌은 예전처럼 활기가 없다.

예전에는 클럽 뒤에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밤이 되면 군인들이 여자를 찾아왔다. 그녀는 군인들과 한국 여성들이 떠나서 문 닫는 클럽도 많아졌는데, 이 상황이 잘 된 일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녀는 옛날을 회상하듯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는 클럽이라고 쓰인 간판을 쳐다보기도 하고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리기도 하며 꼼꼼히 훑어보았다.

캠프 스탠리의 후문 근처에서 만난 세 명의 중년 여인들이 문 여사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그녀가 문동환 목사의 부인인 것과, 문 목사가 문익환 목사의 동생인 것과 그녀가 두레방의 창시자인 것을 힘주어 말하는 그녀들도 오래전 문 여사의 '두레방'을 찾아오던 이들이었다. 그녀들은 여전히 뺏벌을 떠나지 못하고 이곳에서 식당을 하거나 클럽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 문 여사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영미 씨 집에서 지냈다. 두 외손녀와 키니라는 고양이가 그녀의 벗이 되어 주었다. 거울 속에 딸인 영미 씨의 모습이 보인다. ⓒ두레방 박은영

 
 
지난 8월 중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그들 부부는 10월 1일 오전 11시 비행기로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그녀는 다시 사회사업가로서 일을 시작할 것이다. 이번에는 노인들과 아이들이 함께하는 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은 삶이 그녀를 그녀이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50년 전 사랑을 좇아 모든 것을 버리고 태평양을 건넜던 그녀. 이제 남편 문 목사가 건네주는 자서전 '떠돌이 목자의 노래'를 받아 든 두 손이 기쁨으로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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