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항을 하든지 진압을 하든지 비폭력을 원칙으로 하고서 지켜지도록 하여야 합니다. ⓒ뉴스앤조이 자료사진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어떤 사람들을 교회로 세우셨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합니다. (딤전 3:15)

교회는 교회의 존재와 삶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분별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분별하여야 합니다. 약 80일간 지속된 평택 쌍용 자동차 파업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의 한 내용입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레 19:15). 하나님의 의(義) 곧 공의에 입각하여 그 사태를 분별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그 사태의 양쪽 편인 노동자와 그 이외의 여러 세력들에 대해 어떤 쪽도 두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 사태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고 협상을 통하여 이 정도로 끝나게 된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막바지를 지났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에서 합의를 도출하여 정상화를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동시에 그 사태에 대한 사법적인 처리 등의 문제로 인하여 여전히 불씨를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평택 바로 옆 도시인 안성에 살면서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 관계로 쌍용 자동차 노조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오랫동안 평택에 살면서 노조원들과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교회의 지체들을 통하여 듣습니다. 쌍용 자동차 노조에 대한 평택 시민의 일반적인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라고 합니다. 쌍용 자동차 근로자들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파업 사태가 시작될 때에 시민들은 거의 대부분 냉담한 반응이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들의 모습이 시민들에게 매우 부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노조는 사용자들에 비하여 약자인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용자들이 부당하게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 보상은 최소화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법적 장치입니다. 노동자들이 부당하게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하면서 업무 환경 등에서 필요한 부분들을 갖추는 것도 한 역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노조는 어떻게든지 최소한으로 일하고 최대한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합니다. 최대한 성실하게 일하고 적정하게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으로 일하고 최대한으로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쌍용 자동차 노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관점에서 이 부분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쌍용 자동차가 지금과 같이 된 데에는 근로자들의 책임을 벗어나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경영자들이 경영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발생한 면이 아주 큽니다. 시장 예측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자동차 생산이나 자동차를 제대로 판매하지 못한 것, 방만한 경영 등등.

그런 상태에서 구조 조정이라는 명목으로 근로자들을 해고하여 비용을 줄이려고 하는 것은 수용하기 어려운 면이 많습니다. 다른 선진국들과 달리 노동 시장이 유연하지 못한 상태에서 해고는 생활고와 직결됩니다. 그러니 어떤 근로자가 해고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경영진에서는 구조 조정을 피할 수는 없지만, 좀 더 심사숙고하여 최소한의 희생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협상을 통하여 타결된 안이 처음부터 구조 조정안에 포함되어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타결된 안이 처음부터 제시되었다고 하더라도 노조는 그 안을 거부하고 파업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형태의 희생도 감수하지 않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지금과 같이 장기간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부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 파업 사태의 진행 과정에서 나타난 모습은 하나님의 의와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경영진과 노조는 쌍방 간에 상대방에서 전적인 항복을 받으려고만 하였습니다. ⓒ뉴스앤조이 자료사진

파업 사태의 진행 과정에서 나타난 모습은 하나님의 의와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경영진과 노조는 쌍방 간에 상대방에서 전적인 항복을 받으려고만 하였습니다. 각기 자신들의 입장만 내세우고서는 상대방이 수용하기만을 바랐습니다. 해고에서 제외된 노동자들과 해고에 해당되는 노동자들을 대립시켜서 서로 간에 격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형제간에 공장 안과 밖에 자리를 하고서 서로 대립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경영진 쪽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만들어낸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주 비인도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관점에서 결코 반복되지 않아야 할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폭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지 않은 크기의 볼트를 새총으로 쏘아서 많은 노동자들이 다쳤습니다. 치료를 위하여 안으로 들어갔던 의료진의 말에 의하면 뼈가 부러지고 살갗이 찢어진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정도가 어떠하든지 상대방에게 상해를 입히는 폭력은 어떤 이유로든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더 심하고 덜 심하고의 차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폭력은 어떤 노동 운동에서든지 근절되어야 합니다. 폭력은 형사상뿐만 아니라 민사상의 책임을 물어서 대가를 치르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공정하여야 합니다. 파업을 진압하기 위하여 움직인 공권력에게도 똑같이 그 대가를 치르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경찰의 진압을 보면서 광주 항쟁의 현장에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였다고 합니다. 방패로 내리찍고 쓰러지면 집단적으로 진압봉으로 때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권력도 폭력 진압에 대하여 민형사상의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저항을 하든지 진압을 하든지 비폭력을 원칙으로 하고서 지켜지도록 하여야 합니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면 저항 자체가 되지를 않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 말이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저항에 있어서 폭력을 사용한다고 하여서 목적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오히려 폭력을 키워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다치게 될 뿐입니다. 굳이 폭력을 방법으로 저항하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화해 분위기를 앞세워 폭력에 대한 대가를 면제하려고 하지 말고 그와는 별도로 폭력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지불하도록 하여서 폭력이 재발되지 않도록 환경을 만들어가야만 합니다.

마지막 과정에서 나타났던 단수(斷水), 단전(斷電) 등은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악행입니다. 생명의 위험을 무기로 삼아서 목적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위하여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악행입니다.

쌍용 자동차와 같은 기업이 건실하게 운영되느냐 무너지느냐 하는 것은 국가적인 문제입니다. 직접, 간접으로 그 기업에 딸린 너무나도 많은 수의 국민들의 생활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부도 위기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은 경영진이나 노동자들의 몫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경영진에게나 노동자에게서 부정과 부패가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어떤 형태로든지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태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연관된 그리스도인의 태도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경영자든지 노동자든지 간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태도를 가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관점으로 현상을 분별하고 그 의를 드러내기 위한 태도를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때로 그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더라도 말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서도 그러한 징후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공권력이라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에게서부터 일선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타까움을 넘어서 슬퍼하심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대안 사회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방식과는 다른 삶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소금과 빛으로서 부패를 방지하고 살맛이 나게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반영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정교 분리라는 말을 앞세워서 뒷짐을 지고만 있는 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모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행하면서 교회의 이익과 직결된 사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그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나타내기까지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씁쓸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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