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높은뜻숭의교회의 분립안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지강유철 전도사가 쓴 것으로, 분립을 안건으로 열린 공동의회가 열리기 한 주 전에 작성한 것입니다. <기독교사상>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편집자 주

김동호 목사님

높은뜻숭의교회에 출석하는 지인들로부터 목사님께서 안식년으로 한국을 떠나 계시는 동안 주춤했던 교회가 다시 활기를 되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목사님과 교회에 허락하신 일생일대의 기회로 인해 목사님께서 요즘 “평생 최고의 흥분”을 느끼며 지내신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리더군요. 높은뜻숭의교회를 4개로 분립하시겠다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도 그렇게 가슴 벅찬 기쁨을 느끼셨다니, 과연 교회개혁에 생사를 건 목사님답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교회의 개혁을 바라는 성도라면 누구든 자신의 교단이나 출석교회와 상관없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결정을 이번에 목사님께서 내리신 것 같아 한국 교회의 개혁을 열망하는 한 사람으로 참 고맙습니다. 정말 한국 교회로 인해 이런 감동을 느껴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2004년, 정주채 목사님이 담임하고 계신 향상교회가 교회당 이전에 따른 시세차익 40억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이후 처음이지 싶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 이번 결정을 교회 앞에서 추진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그리 유쾌하지만 않군요. 3주간을 끙끙거리다 어렵사리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정용섭 목사님께서 잘 지적한 것처럼 목사님이 “한국교회의 목사로서 찾아보기 드물게 자기 성찰에 철저한 사람”이라는 확신에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잘난척하는 비평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잘난 척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방의 문제점만을 트집 잡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서글픈 것은 자기에겐 아무런 오류가 없는 것처럼 오로지 상대방의 약점 찾기에 골몰한 비평가들 중 대다수가 개혁이나 진보를 좋아하더군요. 소위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 비평가들이 상대방을 향해 독설만을 퍼붓는 무례를 저지를 땐 민망함을 넘어 분노를 참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비평가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목사님께서 교회 분립을 위해 행하신 두 편의 설교 동영상에서 느꼈던 고마움을 먼저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싶습니다.


지난 9월 7일, 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한 교회 분립을 성도들 앞에서 선포하는 과정에서 당회나 팀사역을 하는 목회자, 심지어 공동의회까지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습니다. 300명 총동원 주일을 위해 진력하던 목사님은 어느 새벽기도 때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이나 교회를 위한 게 아니라 목사님 자신을 위한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는 실수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즉시 행사를 중단했다고 털어 놓으셨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그 어떤 목사로부터도 그렇게 용기 있고 감동적인 실수의 고백을 들어보지 못했던 터라 꽤나 놀랐습니다. 통쾌했지요. 저는 목사님께서 그때 “다시는 교회와 목회의 목적과 목표를 숫자 위주의 성장에는 두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었기에 오늘날 김동호 목사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목사님의 교회 분립 설교로부터 받은 두 번째 감동은 목사님의 설교가 서재에 꽂혀있는 죽은 책들의 연구와 사색의 결과가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관찰과 기도의 산물이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목사님의 설교는 제가 90년대 초반에 처음 들었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쉽고 생생하더군요.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설교에서 다이어트를 소재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목사님들과 달리 목사님은 성도들을 잠시 쉬어가게 하려는 목적으로 다이어트를 설교에 끌어들인 게 아니라 높은뜻숭의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기 속에서 "교인들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으면 그것 때문에 생겨나는 성인병과 같은 문제들이 나타나 오히려 교회를 약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묵상하셨더군요. 보통 사람들의 조금은 사치스럽고 흔해 빠진 일상의 고민 속에서 목사님은 교회의 존폐 문제를 해결할 해법을 찾아내셨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제가 느낀 세 번째 감사는 목사님께서 여전히 교회의 민주화를 평생 목회의 화두로 붙잡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젊은 한 때의 치기로 교회 개혁과 교회의 민주화 문제에 몰두하는 목회자를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5000명이 모이는 준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자신의 나이와 명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교회 개혁을 외치고 있다면 사정은 다르겠지요.  

네 번째 감사입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교회 분립이 하나님의 뜻이란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신 말씀들, 이를테면 한국의 대형교회가 거의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가 지나친 담임목사에 대한 의존이란 지적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너무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목회자와 당회 중심으로만 움직이는 것”이나 “담임목사에 대한 거수기 역할만 하는 당회”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교회의 부패를 막을 수 없다는 비판도 적절합니다. 교회에는 “교회의 민주화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며, 어떤 때는 교인들의 생각을 살피는 것보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회의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갈 수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지적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저도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이며 그분의 뜻을 찾으려면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는 말씀에 찬성합니다.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설교이며, 그 설교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작업”이란 평소 지론도 지지합니다. 아무리 전문적으로 훈련받고 위임받은 목사라고 할지라도 언제든 “자신의 생각과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될 수 있으며, 설교자의 그런 타락이야말로 “한국교회를 부패하고 수치스럽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란 질타도 문제의 핵심을 잘 짚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저는 목사님의 총론에 대체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방법론이랄까 각론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르지만 말입니다. 목사님의 건강한 교회상은 공감하지만 교회의 민주화라든지, 하나님의 뜻을 찾는 방법에 대해선 상당한 차이를 느낀다고나 할까요?

김동호 목사님.

교회 분립을 위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저는 높은뜻숭의교회를 바라보는 목사님의 상황인식에 놀랐습니다. 목사님은 숭의여대로부터 장소를 비워달라는 공문을 받고 몇 개월이 지난 현재 상황을 “인간적으로 이야기하면 호랑이에게 물려 호랑이 굴에 잡혀 들어 온 상황”에 비유하셨습니다. 교회가 얼마든지 “무너지고 와해되고 힘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란 말씀도 잊지 않았습니다. 숭의여대가 건물을 비워달라는 과정에서 성도들에게 말 못할 고민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높은뜻숭의교회 사정이 어렵기로서니 1800~2000하던 주가가 1200으로 추락한 것에 충격을 입은 개미투자자들에 비교하겠습니까. 집이 철거당하여 보금자리를 잃고 내쫓긴 영세서민의 절박함에 비교하겠습니까. 대통령이란 자리도 그렇지만 한 교회나 시대를 책임진 리더에게 가장 요구되는 자질은 시대에 대한 영적 민감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탄은 성도들과 사도를 때리고 옥에 가두고 심지어 죽일 수는 있었어도 초대교회를 망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목사님께서는 높은뜻숭의교회 현 상황을 중대한 위기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헷갈리는 것은 목사님께서 바로 그 설교의 후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높은뜻숭의교회 담임목사인 제가 엄청난 일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30분 정도 당황하고 안절부절한 것을 빼 놓는다면 지금까지 정말 단 일분도 당황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제 생각과 판단으로 이 문제를 풀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면 외롭고 불안했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결국 지난 1년 동안 첫 30분을 빼고는 당황하거나 불안하지 않았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도들에게는 어떻게 높은뜻숭의교회 장래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높은뜻숭의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자신의 설교가 “설교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란 점을 솔직하게 시인하신 것은 목사님의 미덕입니다. 기도하는 신령한 목사라고 해서 모든 하나님의 뜻을 단 번에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을 목사님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생생하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진단에 문제가 발생하면 필연적으로 효과적인 처방이 나올 수 없거나 그 처방으로 인해 또 다른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것도 아실 줄로 믿습니다. 

김동호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높은뜻숭의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교회 분립에 있다는 점을 설교하면서 이 일에는 타협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했습니다. 높은뜻숭의교회를 목회하는 7년 동안 가장 노력하고 기도한 부분 중에 하나가 “민주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움직이는 민주적인 구조”를 만드는 일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께서는 교회가 회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필 수는 있어도 중요한 몇 가지 문제는 회의로 대체될 수 없음을 강하게 주장하신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그러고 나서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가장 중요한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일의 위험성을 경고하고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목사의 중요성을 역설했지요. 목사에게 설교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설교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작업이기 때문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사실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란 목사가 그 분과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게 과연 그러한 것일까요?

저는 목사님의 주장처럼 교회 대부분의 문제 처리가 민주적인 합의나 절차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몇 가지는 반드시 회의로 결정될 수 없다는 주장에 의문점을 갖습니다. 신학자들은 통상 사도행전 15장의 모임을 예루살렘 1차 공의회(또는 총회)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불거진 초대교회 최대 위기 속에서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발견했는지를 보여주는 게 사도행전 15장이지요.

목사님의 주장에 따르면,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와 율법을 받아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이후 역사에서 너무도 중요한 사건이기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바울, 바나바, 베드로, 야고보 중 한 사람이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여 그 뜻을 발견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웬일인지 하나님께서는 그 방법을 좋아하지 않았지요. 그 대신에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유대인과 이방인 합동의 최초 연석회의를 모이게 하십니다.

성경은 이때 저들이 이 문제를 두고 길고도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고 말합니다. 그런 후, 베드로를 시작으로 바울과 바나바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의 순서로 사도들의 의견을 경청합니다. 놀라운 것은 예루살렘 1차 총회가 내린 결론입니다.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1차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 사항을 문서로 만들었고, 바울과 바나바의 편에 들려서 문제가 발생한 안디옥으로 보냅니다. 저들을 보필하는 사람으로 선택한 실라와 유다에게는 이 결정사항과 당시 분위기를 말로 전달해야 한다는 명령을 전달받습니다. 그 이야긴 2천 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우리 신도 중 몇몇이 여러분에게 가서 엉뚱한 말로 여러분을 괴롭히고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시킨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표 몇을 뽑아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울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 바르나바와 바울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 대표로 가는 유다와 실라가 이 편지의 사연을 직접 말로도 여러분에게 전해 드릴 것입니다마는 다음 몇 가지 긴요한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더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 성령과 우리의 결정입니다(굵은 글씨는 필자 강조). 여러분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지 말고 피나 목졸라 죽인 짐승도 먹지 마십시오.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마시오. 여러분이 이런 몇 가지만 삼가면 다 잘 될 것입니다. (행15:24-29)

제가 사도행전 15장에서 주목하는 바는 하나님의 뜻이 격렬한 토론과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발견되고 확정되었다는 점입니다. 2천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한국 교회들은 성령의 보호와 간섭 속에서 이루어지는 격렬한 토론에 대해 아는 바도, 그런 토론을 해 본 경험도 거의 전무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기도와 꿈과 환상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회의와 토론을 통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불경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물론 교회가 모든 것을 민주적인 방식의 회의로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주제 넘는 짓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을 바꿀만한 매우 중요한 사건도 경우에 따라서는 사도나 목사가 아니라 공동체의 합의와 토론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도 부정하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사도행전에서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바울과 그의 선교팀이 의식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전파되도록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자신의 뜻을 여러 경로와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바울의 선교팀이 아시아에서 복음 증거하는 일을 계속 막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도시를 옮겨 다녔을 뿐 복음을 증거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성령께서는 바울의 선교팀을 지금의 유럽 땅인 마케도니아로 보내시기 위해 환상 중에 도움을 청하는 한 마케도니아 사람을 보여주십니다. 이 대목에 대해 존 스토트는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다음 날 아침 바울이 동료들에게 그 환상에 대해 말했다는 것, 그들이 함께 그것의 의미와 암시하는 바에 대해 논의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마케도니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셨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말합니다. 존 스토트가 옳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도행전 15장에 이어 16장에서도 자신의 뜻을 깨닫게 하기 위해 환상을 주시고, 그 환상이 토론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신약에서 한 가지 사실만 더 상기해 보도록 하지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인 고넬료가 복음 전도를 받고 구원 얻는 역사적 사건을 일으키실 때에 베드로 뿐 아니라 고넬료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훈련받은 목사에게 다른 이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간섭하는 가운데 깨닫게 하신다는 목사님의 생각 역시 반만 옳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의 전통과 상식에서 보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책임 있게 해석할 수 있는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 또한 당시 세계의 공용어였던 헬라어로 성경을 쓰기엔 그의 지식과 헬라어 실력이 보잘 것 없었습니다.

구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쩌면 신약보다 더 분명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를 책임진 족장 아브라함이나 사사들, 선지자나 왕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은밀하게 나타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을 주실 때 온 백성이 모두 볼 수 있도록 불과 연기 속에 강림하셨고, 광야에서는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 사방에 진을 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명백한 인도를 받을 수 있도록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앞서 가게도 하시고, 멈춰 서게도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때로 자신의 뜻을 보여주시거나 자기 백성들을 인도해 가실 때 모두가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에 불로 임재하시거나 불기둥이나 구름 기둥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때문에 저는 말씀 해석이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하나님의 뜻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주실 수 있다는 사실에 제한을 가하는 일에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당시 최고의 말씀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만큼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란 사실을 깨닫지 못한 집단이 당시에 또 있었을까요? 물론 목사님께서도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말씀의 전문가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목사의 신앙과 목회적 양심에 문제가 생길 때 심각한 부작용이 생긴다는 사실을 충분히 지적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만으론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 있도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유연해지고 겸허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한 가지 더 말씀드릴 필요성을 느낍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과 ‘특별한 뜻'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관련되며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뜻인 우리 각 사람을 위한 것들, 이를테면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 누구랑 할 것인가 따위의 문제들, 그리고 어떤 교회를 결정할 것인가, 또는 우리 교회가 어떤 동네로 이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분립 개척을 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따위의 문제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주의 깊게 생각하고, 기도하고, 성숙하고 경험이 많은 신자들이나 앞선 신앙인의 서적에서 조언을 구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구별하는 것이 옳고, 개별적인 하나님의 뜻이란 묵상과 기도와 토론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게 틀리지 않다면 높은뜻숭의교회의 분립 결정 또한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김동호 목사님.

이제 조금은 헐거운 몇 가지 사안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우선은 호칭의 문제. 언제부턴가 당회장이란 호칭이 담임목사나 위임 목사를 대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문제 제기가 교계 일각에서 있었습니다. 좀 미안한 말씀이지만 목사님들께서 당회 석상이 아닌 자리에서, 그러니까 교회 생활 전반에서 담임목사나 위임목사보다는 당회장으로 불러주기를 원한다는 사실이 제 눈에는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 70~80세 되신 은퇴 목사님들이 당회장이란 호칭에 향수를 느낀다면 그건 이해가 됩니다. 저분들이 주님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던 때는 그 누구도 호칭 문제까지 따지며 교회의 건강성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50대 목사님께서 아직도 당회장이란 호칭을 더 선호한다면 그건 좀 따져 볼 필요가 있겠다 싶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저는 목사님께서 간혹 당회장이란 호칭을 사용하시는 게 꽤나 낯설었습니다. 누구보다 교회의 민주적 제도 정착에 신념을 가지고 계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시 담임목사나 위임목사란 호칭이 탐탁하지 않다면 당회보다는 개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공동의회 의장이란 호칭을 쓰는 게 더 적합해 보이는데 목사님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제까지 쓴 내용만으로도 목사님께 용서받을 수 없는 무례를 저지른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렇더라도 조금만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제 고민을 더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25년이 조금 넘는 동안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담임 목사님들로 인해 가장 속상할 때가 성경과 교회 헌법이 보호하고 있는 성도의 마땅한 권리나 교회의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워둔 제도들을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하여 무력화시킬 때였습니다.

한국 교회의 많은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거나 그 말씀에 “설교자 자신의 욕심과 야망과 같은 사심”을 끼어 넣었던 것만큼이나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성도들의 신앙 양심과 정당한 권리를 별 양심의 가책 없이 묵살할 때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당회나 제직회나 공동의회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지요. 저는 목사님께서도 이번 교회 분립을 하나님의 뜻으로 깨달아 그것을 성도들 앞에서 선포하는 과정에서 당회나 팀사역을 하는 목회자, 심지어 공동의회까지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은 “교인들이 우리 교회 장로님들을 거수기라고 부른다는 이야기” 들으시고 절망을 느끼셨다고 하셨지만 제가 보기에 그 지적이 그리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번 사안에 대해서만큼은 말입니다. 물론 저도 교회의 민주화에 있어서 목사나 장로의 재신임이라든지, 담임목사의 정년 축소, 그리고 원로 목사 제도의 폐지와 같은 일들이 결코 가벼운 일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도의 민주화가 좀 더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문화의 성숙이나 인권의식의 향상이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이 신장되고 그 어떤 차별로부터도 자유로워 졌다고 하더라도 만약 선거를 통해 우리가 국회의원을 선출할 수 없거나 자신이 직접 국회의원에 입후보할 자격을 행사할 수 없다면 그 또한 문제 많은 민주화가 아닐까요. 목사님께서는 교회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담임 목사가 하나님 사이에서 그 분의 뜻을 발견하고 확정짓는 게 옳다는 입장입니다만 저는 그 주장은 보완되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높은뜻숭의교회의 분립과 같이 보편적이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는 목사님과 함께 동역을 하시는 전임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과 함께 교회를 향한 주님의 뜻을 찾기 위해 기도하고 토론하고 사색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게 훨씬 건강할 것입니다. 게다가 목사님과 함께 팀목회를 하시는 전임목사님들은 목사님처럼 목회전문가가 아닙니까. 

제가 높은뜻숭의교회에 출석하지 않지만 목사님께 가장 서운했던 것은 10월 5일에 있었던 비전선포 때문입니다. 제가 상식이라고 믿는 게 틀리지 않다면 저는 교회 창립 7주년 비전 선포는 교회 분립 문제에 대한 공동의회까지 끝내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게 옳습니다. 이미 목사님께서는 두 번의 설교에서 교회 분립이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한다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회가 분립 계획을 통과시켰다 하더라도 아직 공동의회가 열리지 않은 상황에서 네 교회로 분립이 되며 그 네 교회의 담임은 어떤 목사님들이 맡을 것이라고 비전으로 선포하셨습니다. 과연 그 비전 선포 후에 열리는 공동의회가 무슨 의미를 갖게 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후가 바뀐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함께 사역하시는 전임목사님들이나 당회, 그리고 공동의회를 일부러 무력화시키려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제게도 곤혹스러웠던 이 공개편지를 끝내려고 합니다. 부디 목사님께서 가지고 계신 간절한 소망처럼 높은뜻숭의교회의 이후 7년이 이전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영광스럽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소중한 역사에 그 어떤 지체나 기관도 차별되거나 배제됨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의 강건하심을 기원합니다.

<기독교사상 11월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