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최진실 씨 자살 사건이 10월 2일 일어났으니까, 20일가량 흘렀다. 한 시대를 풍미한 유명 연예인이었기에 언론의 추적은 당분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강남에 있는 대형 교회를 다니던 교인이었던 탓에 ‘기독교인의 자살’에 대한 논의가 기독교 안에서 제법 활발하다. ‘교인(敎人) 최진실 씨 자살의 원인과 자살 방지 대책’에 대한 목사들의 설교와 전문가들의 칼럼이 쏟아지고, 관련 책이 나오는가 하면, 심지어 탤런트들까지 출연한 이벤트도 열렸다. 이런 표현이 좀 그렇지만, 마치 교회가 ‘자살 특수’를 누리는 것 같다.

내용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정답을 제시하기 위해 애를 쓰는데, “그래 맞아, 바로 이거야” 하는 감탄사는 쉬 나오지 않는다.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루머’, ‘인터넷의 악성 댓글’, ‘우울증’이라는 일반적인 원인을 바닥에 깔고, ‘영혼의 약함을 극복하지 못해서’, ‘자살이 죄라는 말씀에 충실하지 못해서’, ‘교회의 성공주의 신앙관 때문에’라는 종교적인 진단을 덧씌웠지만, 가슴속으로 허한 바람만 스쳐갈 뿐이다.

이런 용어가 정식으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답 강박 증후군’에 빠져 있는 한국 교회만 보인다.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빨리 정답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에 제대로 여물지도 않은 답들을 쏟아낸다. 그런 답에 힘이 있을 리 만무하다.

정답을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디기는 일반 교인들도 매일반이다. 송구영신 예배에 가서 성경 구절이 담긴 쪽지를 바구니에서 꺼내 쥐고는 “하나님이 새해에 내게 주신 말씀”이라고 받들어 모신다. 대개는 서너 달을 못 넘기고 까맣게 잊어버린다. 우주의 생애에는 “요이 땅” 하고 시작하는 출발점과 도착 테이프를 끊는 도착점이 뚜렷하게 있어야 한다. 우주의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으면 불안하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확신이 없으면 가짜요, 지옥 행이 예약되어 있다. “당신이 갖고 있는 ‘구원의 확신’이 당신의 구원을 보증하지 못한다”고 하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

정답을 쥐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이들과 정답을 주지 못하면 허전해하는 이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종교 비즈니스는 날이 갈수록 번창하고 있다. 자살하면 지옥 가니까 자살하지 말라고 정답을 제시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자살하는 사람의 숫자가 줄지 않아서 OECD 국가 중 자살 랭킹 1위를 유지해야만 한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정답을 열나게 외치지만, 지옥 갈 불신자들이 줄어들면 곤란하다. 종교업자들이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니까.

최진실 씨의 자살과 관련해 증세가 심하게 드러난 정답 강박 증후군의 백미는 ‘기독교인이 자살하면 지옥 가냐’는 논쟁이다. 최 씨 이전에 기독교를 믿는 여러 탤런트들이 자살을 했기에, 기독교인의 자살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기독교 내부에 뭔가 심각한 구멍이 뚫려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자살하면 지옥 가냐’는 엽기적으로 진지한 논쟁으로 승화될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꼭 그렇게 몰고 가야 직성이 풀린다.

이쯤 되면 고인에 대한 예의나 유족에 대한 배려는 온데간데없다. 자살한 고인을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면 내 믿음에 금이라도 갈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티끌이라도 묻을 것처럼 상처 난 곳을 헤집는다.

▲ 고 최진실 씨의 자살 사건을 정점으로 '기독교인의 자살'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왼쪽은 최진실 씨의 생전 모습이고, 오른쪽은 조성돈 교수와 정재영 교수가 쓴 책 <그들의 자살, 그리고 우리>이다.
논쟁이 뜨거운 곳은 <뉴스앤조이>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신학을 가르치는 조성돈 교수와 종교사회학을 가르치는 정재영 교수가 <그들의 자살, 그리고 우리>라는 제목으로 책을 한 권 냈다. 오래 전부터 자살 문제를 연구해서 기독교 잡지에 연재한 것을 종합했다고 한다. 그 책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댓글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기사에 나온 책 내용을 인용하면, “자살은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질병으로 봐야 한다”,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속설이 교인들뿐 아니라 목회자들에게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공포가 한편으로는 기독교인의 자살을 상대적으로 줄이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기독교인 중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이러한 경고가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았다는 인식을 갖게 만들어 더 심각한 상황으로 몰아가게 된다”고 했다.

쟁점은 두 가지다. “자살은 분명히 죄인데 그것을 질병으로 오도했다”는 것과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인데 어찌 속설이냐”는 것이다. 비록 엽기적인 논쟁이기는 해도 나름 진지하다.

“자살은 죄인데 질병으로 오도했다”는 주장은 “자살해도 천국 갈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자살하라는 말인가?”, “자살하면 천국 가니 자살 많이 하라는 주장을 하는 것인가?”, “사회적인 질병을 위해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단 말이냐?”, “그러면 가룟 유다의 자살도 질병인가?” 하는 희한한 논리로 단박 뛰어오른다. 나도 궁금하다. “그럼 삼손도 지옥 갔나? 신약에서는 삼손의 믿음을 칭찬하던데?” 풍부한 상상력과 허무맹랑한 비약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걸 모를까.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것이 속설이라는 거짓 선지자”, “자살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도 문제지만 하나님 말씀을 속설로 치부하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자살하고 싶어도 하나님 말씀이 무서워서 자살을 못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을진대, 그 사람에게 자살을 해도 좋다는 말이군요”, “자살은 십계명 중에 1계명부터 시작해서 4가지 이상의 중요한 계명을 다 어긴 결과로 마땅히 지옥 간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맞다”는 주장까지 튀어나온다. 성경을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성경을 덮어놓고 믿는 이들의 주장이다. 성경은 ‘덮어놓고’ 믿지 말고 ‘펼쳐놓고’ 읽어야 한다.

이러한 진지함 속에서 ‘확신’과 ‘정답’은 보이는데, 인간에 대한 애정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고인의 영정 앞에 ‘성도’(聖徒)라는 단어를 쓴 것을 나무라고, 자살한 사람의 장례예배에서 목사가 뭐라고 설교했느냐고 따진다.

너무나도 사랑했던 두 자녀를 남겨두고 이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이라는 낭떠러지 추락 행을 택할 때까지 그의 가슴에 켜켜이 쌓인 고통의 무게를 함께 짊어질 맘이 확신범, 정답주의자들에게는 아예 없다. 자살 외에는 더 이상 다른 길이 안 보이는, 그런 극심한 고통을 겪어본 적도 없을뿐더러 그런 이들의 얼굴을 내 왼쪽 심장에 묻고 함께 통곡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아마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주는, 확신범들이 주는 ‘정답’에 대한 미련을 벌써 버렸을 것이다. 그런 정답들이 나날이 쌓여가는 이 세상의 다양한 고통을 해결해줄 ‘원조 정답’이 아님을 진즉 간파했을 것이다. 오히려 가녀린 생명을 무참히 짓밟는 살인 무기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저 멀리 십자군부터 요 가까이 부시까지 ‘정답 확신범’들이 휘두르던 대량 살상 무기의 잔인함을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고인이 폭음을 했다는 그날 밤 만약 예수님이 그의 곁에 계셨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얘야, 술 먹으면 지옥 간다” 하셨을까. “얘야, 죽으려고? 그럼 천국에서 나 못 만나” 하셨을까. “얘야, 얼마나 힘들었니, 얼마나 아팠니, 얼마나 외로웠니”, 함께 울어주셨을까. 어느 게 ‘원조 정답’일까.

소망의 바다가 부른 ‘그댄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의 노랫말이다.

이젠 다 끝이라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혹 엉뚱한 선택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해 버리고 싶을 때
그대 향해 손 내밀고 있는 누군가 있다면
그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나요
그댄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그댄 더 이상 혼자가 아니죠
이미 오래 전부터 그댈 따듯하게
지켜보고 있던 한 사람 있었기에
그댄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그댄 더 이상 혼자가 아니죠
이미 오래 전부터 그댈 따듯하게
지켜보고 있던 한 사람 있었기에
그댄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김종희 / <미주뉴스앤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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