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沖縄石垣島등대 (사진제공 김응교)
"저희는 일본 오키나와 단기선교를 갑니다. 한 달 동안 일본어 찬양을 연습했습니다. 기독교인이 1%도 안 되는 일본, 오키나와에도 어디를 가든지 쉽게 볼 수 있는 것들 중에 오키나와 수호신인 '시사'라고 하는 우상이 있습니다. 제주도 어디를 가든지 하루방이 있듯이,  우상이 넘치는 오키나와, 그 일본 땅에 복음 전하러 갑니다."

이때쯤 되면 단기 선교지로 일본을 선택하는 교회들이 있다. 그중에 오키나와를 단기 선교지로 선택하는 교회들이 있다. 오키나와에 가시려는 분들께, 그 섬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하고 싶어 이 글을 쓴다. 거기에 사는 분들의 아픔을 모른다면, 정성스레 준비한 찬양이 허공에 던져놓는 낱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혹시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쓴다.

네 가지 폭력과 기억

오키나와(沖繩)의 원래 이름인 류큐(琉球) 왕국에는 총은커녕 창이나 칼도 없었다고 한다. 단지 몸을 다스리기 위해 가라테를 만들어냈다는 평화의 유토피아였다. 12세기 이래 농업생산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류큐는 14세기에 들어 중국과 책봉관계를 맺고, 조공무역을 하면서 독자적인 왕조를 성립한다. 이 아름다운 섬나라는 네 가지 침략으로 기억된다.

첫째, 평화의 공동체였던 류큐는 일본의 침략을 받는다. 15세기 임진왜란(1592~1598)의 패전으로 인한 손실을 채우려는 일본은 류큐를 점령한다. 1609년 일본 샤쓰마한에 정복되어 일본과 중국의 공동속국이 되었다가, 1879년 3월 27일, 순사 160명과 보병 대대 400명이 수리성(首里城)에 입성하여 메이지 정부의 오키나와현이 탄생한다.

둘째, 1945년,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의 최후 격전지가 된다. 1945년 3월,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 18만 명에 대항하여 일본군 7만 명이 전투를 벌였다.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최대한 저지하기 위해 일본은 오키나와에 미군을 최대한 묶어두려 했다. 6월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하기까지, 3개월의 짧은 전투에서 오키나와 주민 4분의 1인 12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의 지연 작전에 총알받이가 된 이들 중에는 미군에 붙잡히기 전에 집단 자결한 민간인 수천 명이다. 일본 제국은 주민들에게 ‘미군에게 잡히면 여자는 능욕당하고 남자는 사지가 찢겨 죽는다’며 ‘교쿠사이’(玉碎, 깨끗이 부서져 죽음)를 강요했다. 이른바 군민공사(軍民共死), 곧 동굴 속에는 칼과 끈으로 서로 죽인 처참한 시체들, 오키나와 역사의 가장 끔찍한 장면이다.

셋째, 일본의 패전 이후 1951년 오키나와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미일안전보장조약’에 의해 미국 정권 아래 놓인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일본 본토에서 행해진 베트남 반전운동과 더불어, 오키나와 문제는 일반인에게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을 위해 오키나와는 B52가 출격하는 후방지원 기지였다.

넷째,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에 반환된다. 그러나 오키나와 사람들은 본토 일본인에게 차별과 소외를 받아 왔고, 주둔해 있는 미군 기지의 병사들에게 수많은 여성과 소녀들이 성폭행을 당해 왔다. 이후 일본에 있는 미군기지의 75퍼센트가 있는 오키나와는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군사 방패막이다. 오키나와는 동북아, 미주, 동남아 세 지역이 접속하는 군사 요충지다. 오키나와는 인간의 존엄과 공생이라는 측면에서 외면할 수 없으며, 근대국가의 모순이 종합적으로 얽혀 있는 소외지역이다. ‘국가’와 ‘민족’ 게다가 ‘소수민족’ ‘마이너리티’ 문제가 얽혀 있지만, 동아시아 문제에서 소외되어 있는 지역이다.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인권운동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대상이다.      

이후 오키나와는 에메랄드빛 산호바다와 야자수, 망글로브 등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리조트가 되었다. 또한 세계 제1의 장수 지역이자 오랫동안 '시마우타'(島歌)라고 불려온 전통 음악과 아무로 나미에(安室奈美恵) 등의 ‘오키나와 팝’이 유명하다. 너무도 평화로운 민요와 노래 가사는 오키나와의 비극적 역사를 너무도 서정적으로 담아냈기에 전율할 정도이다.

▲ 오에 겐자부로 (사진제공 김응교)
오에 겐자부로의 ‘전후민주주의’와 오키나와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의 <오키나와 노트(沖縄ノート)>(岩波書店、1970)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다. 오에가 이 책에서 오키나와 전투 당시 “주민들이 일본군의 명령으로 집단 자결했다”고 썼는데, 당시 일본군 지휘관들이 소송을 걸어, 2007년 11월 현재 재판에 계류 중이다. 24일자 <산케이(産經)신문>은 오키나와 전투 당시 자마미(座間味)섬 수비대장을 지낸 우메자와 유다카(梅澤裕, 88세) 등이 오사카 지방법원에 오에 겐자부로와 책을 출판한 이와나미(岩波)출판사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실었다.

<오키나와 노트>는 오키나와인에 대한 본토인의 차별과 미군 기지나 집단 자결에 대해서,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는 1972년의 불과 2년 전에 생생하게 그려낸 에세이집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는 1969년 1월 9일에 죽은 평화운동가 후루겐 소우켄(古堅宗憲) 씨의 삶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글이다. 프롤로그 이후 9개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장에는 ‘일본이 오키나와에 속한다’는 역설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이 글에서 오에는 류큐소년원을 다녀왔을 때 선입관으로 잘못 기록했던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면서, 오키나와를 보는 일본인의 태도가 얼마나 그릇되어 있는가를 고해한다.  

첫째, 오에는 이 책에서 일본인이 아닌 ‘비국민(非國民) 일본인’의 시각에서 오키나와를 바라보고 있다. “오키나와의, 류큐 처분 이후의 근대, 현대사에 한정한다 해도, 오키나와와 거기에 사는 인간에 대해 본토 일본인의 관찰과 비평이 쌓이고 쌓인 것에는, 정말 대량의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관계없이 수치를 모르는 왜곡과 착오가 있다”(17면)면서 일본인이 오키나와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오에는 자신이 ‘일본인 아닌 일본인’이 될 수 있는지 즉 ‘비국민(非國民)’의 가능성에 대해 스스로 묻는다. 

미리 정해놓았던 여행의 스케줄을 끝내고나서, 나는 단지 천진난만한 여행자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 혼자 나하(那覇)에 남아, 다음의 말로 시작하는 문장을 썼다. 이 때 이미, 지금 오키나와의 상관관계에서 나를 잡고 있는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이같이 일본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나의 위치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18면, 강조는 인용자)
 
강조된 구절은 오키나와에 대한 일본인으로서의 반성을 깊게 드러낸 표현이다. “일본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나의 위치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가”(日本人ではないところの日本人へと自分をかえることはできないか)라는 말은 이 책에서 18면, 33면 등 수차례 반복되어 가장 마지막 면인 228면에도 나온다. 그만치 이 질문은 그가 벗어나기 힘든 굴레였다. 이 말은 ‘일본인이 아닌 일본인’ 곧 비국민으로 일본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둘째, 오에는 미국과 일본이 오키나와를 핵무기의 캠프로 사용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마이너리티를 차별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국가폭력에 대해 오에는 끊임없이 비판한다. 미군에 대한 비판은 그의 소설에서 자주 나온다. 단편집 <보기 전에 뛰어라>에 실려있는 단편<인간의 양><어두운 강, 무거운 노><불의의 벙어리><결전의 오늘>에는 강자인 미국과 약자인 일본 민중을 대비시킨다. 그런데 <오키나와 노트>에서는 핵을 둘러싼 폭력의 주체로 미국과 일본 국가를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가해자로서 미국와 일본, 그리고 피해자로서 오키나와인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오에에게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 국민’이 아니다. 그는 오키나와인이 일본과 다른 ‘이민족(異民族)’임을 여러번 강조한다. 

셋째, 집단자결 강요, 오키나와 부녀자 강간, 조선인 학살을 일본의 수치(羞恥)라고 오에는 지적한다. 집단자결을 강요했던 군인이 태연히 오키나와에 위령제를 하러 가는 기사를 보고 오에는 분노하다. 여기서 ‘집단자결의 강제’라는 표현을 이해하려면 좀 더 자세히 그 현장에 접근해야 한다.

집단자결의 강요

1945년 3월 24일 미군은 오키나와 바다에서 함포사격을 시작했고, 4월 1일 상륙 작전을 했다. 당시 일본군은 오키나와에 7만명 정도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공군・육군・해군이 합세하여 공격하는 18만 명의 미군을 도저히 대응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미군을 끌어들여 섬에서 지구전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3월 6일 방위대원을 소집하기로 했다. 오키나와 민간인 중에 남자 17세부터 45세까지 징병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이 제한은 무의미했다. 미군에게 포로된 방위대원 중에는 70세의 노인도 징병되었고 14살 소년도 있었다. 이른바 몽땅 뿌리째 동원한다는 ‘네코소기 동원’(根こそぎ動員)을 했던 것이다. 총을 쏴보기는커녕 만져본 적도 없는 이들에게 일본군은 ‘키리코미’(切り込み)라는 기습작전을 시켰다. 이 작전은 몽뻬 입은 민간인들이 폭탄을 들고 탱크 밑에 들어가기 같은 것이었다.

한 달 만인 5월말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슈리(首里)가 점령당하고, 일본군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격과, 바다에서 쏘아대는 함포 사격을 피해, 가마(ガマ)라 불리는 동굴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숨을 곳이 없던 민간인들도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 안에서 일본군은 아기가 울면, 그 울음소리 때문에 미군에게 들키니까 찔러 죽이겠다고 했어요. 또한 미군에게 항복하면, 여자는 강간당하고 남자는 탱크에 깔려 죽는다고 일본군에게 들었지요.”
당시 20살이었던 나카소네 히테(中宗根ヒデ, 2004년 당시 86세) 할머니는 증언한다.

“사이판에서 남자를 줄지어 세워 놓고 탱크로 밀어 죽였다고 일본군이 발표했습니다. 미군이 여자는 모두 강간한다는 말을 듣고 스무살이었던 누나도 죽겠다고 했더랬죠.”
이젠 여든을 훌 넘은 나카무라 다케지오 씨는 증언했다. 거짓 위협 속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결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오키나와인은 40만 명이었는데 그 4분의 1인 10만 명이 이렇게 죽어갔다.

그런데 오에가 ‘집단자결’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모두 집단자결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가령 동네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했던 치비치리 동굴에서는 85명의 유골이 발굴되었는데, 이들 중 12세 이하는 47명이었다. 그중에는 3개월 된 아기도 있었다.(주-1) 아기가  스스로 자결(自決)하여 목숨을 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키나와 전투로 미군 1만 2513명이 숨지고, 3만 8916명이 부상했다. 일본군 전사자는 6만 6000명, 부상자는 1만 7000명에 이르렀다. 민간인 희생자는 12만 명을 넘었다. 동굴 속에서 수십 명씩 한꺼번에 자살한 이른바 '집단자살' 희생자도 1000명 가까웠다. 이렇게 강요된 '집단자살'에 오키나와 주민들은 특별한 분노를 표해왔다.

넷째, 일본군이 오키나와 여자를 강간하는 경우(209면)도 기록하면서, 오에는 집단자결을 강요하고, 강간을 행하고서도 태연히 정당화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차갑게 지적한다. 집단자결을 강요했던 책임자의 심리상태를 오에는 예리하게 분석한다. 이러한 정당화의 심리는 비단 그 책임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폭력의 도구로 이용되는 하수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합리화의 심리일 것이다. 오에는 이런 이들은 사실 “이스라엘 법정에서 선 아이히만처럼, 오키나와 법정에서 재판 받아야 한다”(213면)고 지적한다. 

다섯째, 오에는 과거의 폭력이 현재 구조화 되고 축적되는 과정을 지적한다. 현재도 과거의 폭력이 일본에 내재해 있고, 반복되고 있다며, 대표적인 예로 재일조선인 차별을 든다. 

▲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되어 있는 오키나와 소년특공대 (사진제공 김응교)
이전 전쟁에서 여러 사건과 부친의 행동에 책임도 없이, 신세대(新世代)들이 그것을 뒤따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젊은 세대의 윤리적(倫理的) 상상력의 세계에서,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을 둘러싸고 어떤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가를 보라. 극히 소수의 어리석은 고교생이, 뭔지도 모르는 사명감, ‘혹은 앙양감(昻揚感, 어떤 의욕-옮긴이)’에 충동되어 그 유치한 수치심조차 상하지 않고, 조선 고교생을 때리는 실상을 보라. 이전 전쟁에서 여러 사건과 부친의 행동과 완전히 같은 행동을, 신세대 일본인이, 정말 죄책감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반복해 버린다고 할 법할 모습을 보는 이 때, 그들에게서 ‘가짜 죄책감’을 없앨 절차만을 행하고, 거꾸로 그들의 윤리적 상상력에서 진정한 죄책감의 씨앗이 발화하도록 촉진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대규모 국가범죄로 향하는 실수의 구조를, 새로이 하나씩 쌓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214~215면, 강조는 오에 겐자브로)

과거 오키나와인을 차별하고, 현재 재일조선인을 차별했던 일본인은 같은 일본인이다. 그들의 윤리적 구조에는 세뇌된 국가의식이 있다. 일본국 안에 들어오지 못한 오키나와인과 재일조선인은 차별의 대상이 된 것이다. 실제 오키나와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많은 조선인이 미국의 스파이라는 명목으로 학살당했다. 오키나와 평화박물관 앞 희생자 돌비석에는 다니가와 노보루(谷川昇) 부부와 아이 5명이 희생되었다고 써 있다. 다니가와는 일본 여성과 결혼했던 구중회 씨였다. 오키나와 전투 때 조선인이란 이유 때문에, 미군의 스파이가 될 가능성이 많다며 부인과 5명의 아이가 모두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주-2) 이외에도 조선인 학살에 대한 기록은 너무도 많다. 오에는 그러한 행동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한 행동의 반복은 ‘대규모 국가범죄로 향하는 실수의 구조’라고 지적한다. 이렇게 ‘일본인이 아닌 일본인’, ‘비국민’의 입장에 서려고 애쓰는 작가가 기록한 이 책은 오키나와라 하면 관광 안내와 영웅적인 전쟁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 밖에 모르는 평범한 일본인에게 경종을 울리는 호소문이며  참회록이다.

‘전후민주주의’와 ‘시바’ 사관의 대립

1994년 10월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에게 일본정부는 천황이 주는 문화훈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오에는 곧바로 “나는 전후민주주의자(戰後民主主義者)이며 그러한 나에게 문화훈장은 어울리지 않는다. 문화훈장은 국가와 관련된 상이기 때문이다.”라며 상을 거부했다. 일본의 봉건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정치체제를 비판했던 전후민주주의자 오에는 만세일계의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식 민주주의’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전후민주주의자 오에 겐자부로의 <오키나와 노트>에 대해 우익은 비난을 퍼부었다. 우익에서는 오에의 전후민주주의와 <오키나와 노트>에 나타난 태도를 서구 추종 혹은 사르트르의 모방이라 했고, 오에는 한물간 과거의 인물이라 했고, 오키나와 전투에 참여했던 영혼을 모독했다고 비난했다.(주-3) 이러한 우익의 비판은 이른바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를 지탱하고 있는 자유주의사관이 뒷받침하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는 2007년 4월 4일 기자회견을 열고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이 주민들의 집단자결을 강제했다는 고교 역사교과서의 내용을 일본 정부가 수정하도록 요구한 것에 대해 “참으로 유감스럽다”고 개탄했다. 일본 오키나와 주민들이 중앙 정부의 교육정책이 역사를 왜곡한다며 2007년 9월 29일, 해변도시 기노완(宜野灣)시에서 오키나와 주민 11만 명이 모여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규탄했다. 이날 집회에는 오키나와 41개 기초지방자치단체 의회가 모두 참석했고, 이 지역 출신 여야 국회의원들이 초당적으로 전원 참석했다. 시위의 이유는 1945년 패망 직전 일본군에 의한 오키나와 주민 집단자살 강요 사건을 일본 문부과학성이 교과서에서 삭제토록 한 사실이 2007년 3월 밝혀졌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즉각적인 원상 복구를 요구하며, '집단 자결이 일본군의 관여 없이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책무>라는 결의를 채택했다.

비국민의 역할과 탈출

▲ <오키나와 노트> (사진제공 김응교)
오에 문학은 장애인, 이방인, 차별받는 이에 대한 인간적 애정에서 시작한다. 초기 오에 문학의 중요한 테마는 뇌장애를 지닌 장남 히카리의 삶이었다. 소설<개인적인 체험>(1964)은 작가 자신의 체험, 즉 기형아 아들의 출생이 그려져 있다. 이 책은 기형아와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모색했던 작품이었다. “내게 이 저능아가 태어난 것은 이 세계에 대한, 내게 두 번째 이니세이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겠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아이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고조차 느껴집니다”(주-4)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장애인 아들을 향한 개인적이고 가족사적인 사랑은 시대의식으로 넓어진다. 그 가능성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책은 <히로시마 노트>(1965)였다. 이 책에서 오에는 본격적으로 피해자와 차별받는 마이너리티의 대변인이 되기 시작한다. 이 책에 이은 <오키나와 노트>에서도 일본인 고교생에게 폭행당하는 조선인을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오에 문학에서 조선인은 자주 등장한다. 가령 <외침소리> <짓밟힌 싹들> <손수 눈물을 닦아주시던 날> <동시대의 게임> <만년 원년의 풋볼>등에서도 조선인은 차별받는 마이너리티로 등장한다.

약자의 편에 서서 거대 권력에 저항했던 오에의 문학에는 히로시마 대(對) 핵병기, 오키나와 대 ‘본토’(일본)가 대립되어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오에는 박정희에 대항하는 김지하 석방운동을 지원했던 것이다. 재일조선인 그리고 오키나와인이 진정한 인간으로 대접받는 공동체가 되어야 일본은 속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오에의 생각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반전평화문학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이 장애인인 데서, 평생 함께 해온 장애자에 대한 사랑이 사회적 마이너리티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총체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총체적인 사랑과 평화를 방해하는 세력인 ‘시바사관’에 오에는 반대하고 그리고 미국에 대해 본능적인 반발을 보이고 있다.

오에의 에세이는 ‘기억에 대해 참회’를 요구하고 있다. 오에는 오키나와 인을 ‘일본 국민’과 분리하고 있다. 이른바 오키나와 인은 ‘주권이 존재하지 않는 일본국민(主權の存しない日本国民)’이라는 오에의 표현이 다른 작품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이미 일본군이 자신들을 ‘버린 돌(捨て石)’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수민족 오키나와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표현한 이 산문집은 아시아 소수민족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일본인이지만 일본국민이 아닌 ‘비국민’의 자세를 취하는 오에의 자세는 거짓된 국가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지식인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는 일본 국민을 구원해줄 가능성을 가질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교컨대, 치비치리 동굴에서 약 1킬로쯤 떨어져 있는 시무쿠 동굴에는 약 천여 명의 주민이 피난해 있었는데, 이들 중에 하와이에서 꽤 긴 시간을 살다가 귀향한 두 명의 오키나와인이 있었다고 한다. 한명은 5년, 다른 한명은 25년을 살다 왔는데, 이들은 집단자살하려는 주민들에게 미군은 절대 그렇게 잔인하게 죽이지 않는다고 설득하여, 천여 명의 주민을 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은 주민들이 동굴에 들어가기 전에 일본과 일본국인을 비판하는 말을 자주 하여, ‘비국민’으로 인식되었다.(주-5) 그런데 바로 이러한 ‘비국민’이 천여 명의 생명을 살렸던 것이다. ‘비국민’ 오에 겐자부로의 태도가 희망이 되는 이유는 이러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평화 르네상스를 작품으로 실천하고 있는 세 사람의 ‘비국민’의 업적은 오키나와나 일본의 경험에 한정되지 않고,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사는 작가들이 어떤 글을 써야 하는가 하는 진지한 과제를 던져준다.

버려진 돌 오키나와에서 기독교는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아시아와이드캠페인(AWC: Asia Wide Campaigne)의 오키나와 대표인 니시오 이치로(50) 목사는 반전평화운동의 중요한 리더다. 오키나와 미군 기지 문제는 평택과 필리핀과 제주도와도 연결된다. 일미군사동맹은 아시아와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패권적인 계획으로 보기 때문이다. 나하시 ‘나하중앙교회’의 긴조(78) 목사는 오키나와 전투 때의 집단자결에 대한 교과서 기술에서 ‘일본군에 의한’이라는 주어가 삭제된 것에 대해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소수에 불과하지만 몇몇 기독교회들이 오키나와 문제 해결을 위해 참여하고 있다. 오키나와에 가시는 분들은 에메랄드 해변만 즐길 것이 아니라, 오키나와 분들의 얘기를 진득이 들어보셨으면 한다. 

우리말로 번역된 하이타니 켄지로의 장편동화 <태양의 아이>(양철북, 2002) 그리고 메도루마 슌의 소설집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아시아, 2008)는 꼭 읽으셔야 할 필독서다. 기타를 들고 오키나와에 선교하러 가시는 분들의 발걸음은 귀하다. 어떠한 방법이 오키나와인의 상처를 감싸고 위로할 방법인지… 찾아가시는 발걸음이 더욱 의미 있는 길이 되시기를 기도한다.

(덧말) 마침 이 글을 구상하던 2008년 3월 28일, <오키나와 노트> 판매금지에 대한 소송에서 오에 겐자부로가 승리했다는 뉴스가 보도 되었다. 반가운 소식이다. 

주-1) 林博史、<沖縄戦と民衆>、大月書店、2001. 158~159면.
주-2) MBC<3.1절 특집 오키나와>2005년 3월 3일.
주-3) 徳永信一、<大江健三郎と戦後民主主義><靖国特集 沖縄集団自決冤罪訴訟が光を当てた日本人の真実> <正論>2006年9月号(産経新聞社・扶桑社)
주-4) <谷川俊太郎との対談─表現行為と子ども><文学>、1976. 12.
주-5) 屋嘉比收、<ガマが想起する沖縄戦の記憶><現代思想>6월호. 2000.122면.

김응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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