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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있던 차별이 폭발하는 순간

[엄기호 칼럼] 왜 억울해할수록 차별은 더 공고해질까

엄기호   기사승인 2020.02.06  15: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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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보러 갔다. 사람이 많아 우버를 타는 게 더 효율적이라서 늘 우버로 다녔다. 그러다가 함께 갔던 동료가 버스를 한번 탔는데 그게 더 골목골목으로 다녀 경치가 좋다고 해서 타 보기로 했다. 버스를 타서 확 달라진 것은 창밖 풍경만이 아니었다. 사람들 풍경도 확 달라졌다. 흔히 알려져 있기로 백인들 비율이 가장 높은 중미 국가였지만 버스 안은 도심이나 관광지보다 훨씬 더 원주민과 아프리카계 쪽으로 쏠려 있었다.

쿠바에서 머물 때도 마찬가지였다. 구도심의 올드아바나보다, 약간 벗어나 있는 중산층 지역에 백인들 비율이 훨씬 높았다. 인종·계급·장소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이 가는 경우가 많다. 인종 '분리'는 법적/제도적으로 작동하는 경우보다 사회적으로 실천·실현되는 경우가 많다.

분리는 차별이 작동하는 가장 좋은 방식의 폭력이다. 분리되면 물리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일은 없다. 차별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다. 모든 게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평화롭게 보인다. 분리되면, 분리된 존재들은 각각 다른 '장'(field)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분리 자체가 폭력임을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일상이 평화롭기 때문이다.

장이 달라진다는 것은, 더 큰 장을 상정하지 않는 한 무관한 일처럼 보인다. 버스를 타고 세상을 다니는 사람과 태어나서 한 번도 버스를 타 보지 못한 사람은 일상적 수준에서는 무관한 사람이다. 이 둘은 만날 일도 없지만 만나서도 서로 주먹다짐할 일도 없다. 매우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헤어지면 그만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폭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분리'가 차별의 구조적 폭력임을 인지하기는 쉽지 않다. 무관해 보이는 두 '장'을 연결하는, 하나의 더 거시적인 장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굳이 노력하지 않더라도 장의 분리가 폭력임을 인식하며 구조가 길거리로 걸어 나오는 순간이 있다. 무관해 보이는 두 장이 직접적으로 부딪칠 때다. 남미는 오랫동안 북미와 유럽처럼 제도화한 인종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신화가 있었다. 그러나 <연합뉴스>가 2005년 6월 7일 보도한 내용처럼, 남미 볼리비아에서 진행된 시위에서 원주민들이 수도 라파스의 사무실에서 백인들에게 "야, 백인들 넥타이 풀어"라고 말한 것은 부를 독점한 백인을 향해 원주민이 반감을 표출한 상징적 사건으로 여겨진다.

제도화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남미의 사회 계급 구조가 혼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어제와 오늘>(아담북스)에 따르면 유럽에서 이주한 백인,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 그 백인들과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메스티소,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물라토, 흑인과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삼보, 원주민, 흑인 등등이 사회 계급 구조와 층층이 얽혀 있다. 미시적이고 일상적 수준에서 분리되어 무관하게 살아가는 두 장이 부딪칠 때 격렬한 폭발이 일어난다.

또 다른 방향이 있다. 하나의 장(인 줄 알았던 것)이 분리할 때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차별의 폭력이 바로 이런 경우다. <한국경제>가 2월 3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일본 나리타공항에서 중국인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귀국을 기다리던 사람들 중 우한에서 온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가 감염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이 왜 우한에서 온 사람과 같은 비행기를 타야 하는지 항의하면서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이 방송 후에 중국인들이 일본 상점에서 마스크를 사재기하는 모습이 방영되었다고 한다.

이 장면을 보는 일본인들은 대부분 "역시 중국인들은…" 하면서 혀를 찼을 것이다. 싸우는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우한인과 다른 중국인을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일본인들 눈에는 그저 같은 '추한 중국인'들일 뿐이다. 물론 그들은 이탈리아의 500년이나 된 유서 깊은 음악학교에서 일본인 학생들을 강의에서 배제한 것을 보며 억울해하겠지만, 이탈리아인들 눈에는 같은 '중국인'들처럼 보일 뿐인 것처럼 말이다.

인종차별에 대한 흔한 착각은 차별의 구조가 이분법적으로 단순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백인과 흑인 사이의 문제다.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고 흑인이 부당하게 취급받는 것이 대표적이다. 서구인은 비-서구인을 차별하고, 일본인은 한국인을 차별하며, 한국인은 중국인을 차별한다. '차별'을 다룰 때 이처럼 우리는 전체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하는 자'와 '차별받는 자'라는 두 개의 범주를 가지고 사고한다.

차별의 구조는 이렇게 두 그룹으로 이분법적으로 단순하게 나누어져 있지 않다. 차별의 감추어진 진실은 이런 장이 분리되는 순간 드러난다. 분리하려는 자는 여러 개로 분리하는 게 아니라 두 개로 쪼개려고 한다. 한쪽은 분리되어 차별받아 마땅한 자이고 다른 쪽은 그들로부터 안전한 자들이다. 문제는 어느 수준에서 분리를 시도하는가에 따라 분리의 전체 구조는 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가 된다는 점이다. 모두가 안전을 위해 분리를 시도하는 순간 차별의 감추어진 진실, 즉 '하나의 장' 안에서 작동하던 위계와 차별의 구조가 단박에 드러난다.

이때가 차별이 은폐하는 가장 중요한 차별의 특징인 '차별은 이분법적이지 않다'는 점이 드러나는 진실의 순간이다. 차별은 저들과 나라는 이분법적 분리를 요구하는 차별-배제가 층층이 쌓아 올려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순간이 꼭대기를 제외하고는 각각의 행위자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내가 차별받아 마땅한 자들(내 아래에 속한) 때문에 억울하게 나를 차별하는 사람(내 위에 속한)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로부터 분리를 요구받고 모욕당하고 차별받기 때문이다.

차별은 이분법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구조는 결코 이분법적이지 않다. 차별의 구조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차별의 문제가 얼마나 구조적인지를 간과하며 차별의 작동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만든다. 꼭대기를 제외한 모두가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게 되고 '피해자'로서 말하려고 한다. 그래야만 내가 분리되는 끔찍한 사태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인이 동양인을 차별한다고 했을 때, 왜 저 '더럽고 미개한' 중국인과 같은 '동양인' 취급을 받아야 하느냐고 항의하는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차별에 대한 저항이 차별하는 '위'와 구조를 향한다면, 차별이 만들어 내는 원한은 아래로 흐른다. 그리고 이 원한은 분리를 요구하고, 분리를 요구하면 할수록 그가 스스로 대면하는 것은 분리하는 자의 권력이 아니라 분리되는 자로서 겪게 되는 부당함과 억울함, 즉 원한이며 이 원한은 다시 아래로 행사된다. 슬프게도, 차별을 이분법적으로 인식할수록 차별이 멈추는 게 아니라 더 층층이 쌓아 올려진 차별의 구조가 더 공고하게 구축되는 이유다.

이게 어디 코로나바이러스로 촉발된 인종차별에만 한정된 이야기이겠는가?

엄기호 / 인권연구소 '창' 연구 활동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나무연필) 저자

*이 글은 <가톨릭뉴스지금여기>에도 실렸습니다.
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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