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시절 한인 교회에서 중고등부 사역을 할 때의 일이다. 고등부 학생 중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 여학생이 있었는데, 교회 활동과 학업에도 열심을 냈다. 조지 부시와 존 케리 간에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일 때여서 그 여학생과 자연스럽게 정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또렷하고 분명하게 그녀는 말했다.

"전 부시를 지지해요. 에드워즈(존 케리 러닝메이트, 당시 부통령 후보 - 편집자 주)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복제 기술과 임신 중단을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부시는 그의 두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고 2003년에 일으킨 이라크 전쟁에 대한 면죄부를 얻었다. 부시는 미국이 지닌 힘의 두 축인 금융과 군부에 자유를 주었고,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귀결된 경제적 혼란과 끊이지 않는 테러가 지배하는 세계가 열렸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두 번에 걸친 대통령 선거 승리는 종교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선거운동 덕분이었다. 보수 성향의 좁은 시야를 가진 유권자들은 부시가 외친 선명한 구호에 매료되었다.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자신의 한 표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결국 그들은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엄혹한 현실을 부정하고 말았다. 2003년 시작된 이라크 전쟁과 부시가 풀어 준 여러 금융 규제가 당시 세계를 말 그대로 '충격과 공포'로 몰아가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부시와 케리 간 대선 토론을 기억한다. 부시는 신의 섭리와 인간의 겸손을 주장하며 복제 세포 연구가 세계를 끝없는 혼란으로 몰아갈 것이라는 세기말적 설교자로 변했다. 케리는 이를 통해 병마의 고통에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유권자 대다수는 이웃의 고통을 돌아보기보다 신의 심판을 더욱 무서워했을 것이다.

2000년대, 당시 현실을 반영하듯 미국 정치를 현실적으로 그려 내 큰 인기를 끌었던 '웨스트 윙'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인상 깊은 장면이 있는데,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보수 기독교 정서가 팽배한 남부의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한 학생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인데 왜 미국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가르치지 않고 진화론만 가르치느냐, 대통령 후보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했다.

정치인에게 이는 매우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 필요한 것은 정확한 현실 인식과 판단력이며, 이를 위해 교양과 과학적 지식을 습득하여 객관적이고 산술적 판단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교육은 그러한 선택을 하기 위해 좀 더 합리적이고 사실에 입각한 여러 자료를 이해하고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여러 과학과 자료에서 창조론의 근거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자신의 신앙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교육과정을 바꿔야 한다면 자칫 교육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말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함께 살기 위해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 공동체를 운영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정치라고 한다면 정치는 인간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근대 이전의 공동체들은, 그것이 국가라는 공동체이든, 씨족사회라는 공동체이든 종교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당시 종교적 가치는 공동체를 마련하는 데 필수적 요소였다.

가톨릭교회가 힘을 잃고, 길고 긴 종교전쟁이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었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학 논고>에서 철학을 신학과 계시, 즉 종교라는 테두리에서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종교는 복종의 세계지만, 철학은 인식의 세계다. 인간 인식은 어딘가에 복종되지 않아야 한다. 기적이나 마법의 시대가 아닌 근대에는 신이 이미 세상에 만들어 놓은 자연법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터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 스피노자 생각이었다. 어찌 보면 니체가 말했던, 신이라는 구세대의 거대 담론이 사라진 근대에 새로운 신의 철학을 세우기 위한 스피노자의 각고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화와 타협, 이성과 합리가 복종보다 더 중요시되는 것이 정치 현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 상황을 보자. 원내 진출을 목적으로 한 정당 중에 기독교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당들이 2000년대를 전후하여 나타났다. 기독교의 보수적 가치가 미국 정치판에서 힘을 얻는 모습에 고무되었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보수적 정서를 등에 업고 현실 정치에 판을 벌여 보겠다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종교적 신념을 앞세운 현실 정치는 언제나 복종 또는 순종을 행동 강령으로 삼는다. 소위 당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에 대한 존경심과 몇몇 사람이 풀어 주는, 따라야 하거나 믿어야 할 신앙고백이다. 여기에 현실 정당정치의 기본인 적과 아군이라는 프레임이 더해지면 기독 정당은 십자군적 소명을 지닌 영적 군사 집단으로 변모한다.

현실 정치에서 정당들은 자신의 강령을 새 시대를 열어 갈 유일한 길이라 설득한다. 표를 호소하고 끊임없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시민들을 지지자로 만들고 당원으로 교육한다. 기독 정당은 아마 이와 반대의 절차를 거칠 것이다. 먼저 교인들을 자신의 당원으로 가입시키고 기독교적 가치를 주창하며 현실 정치에 뛰어들 것이다. 그 순간 자신과 다른 가치를 말하는 자들은 사탄 악마가 된다. 대화와 타협이 아니라 그들은 전도 또는 정죄의 대상이 된다.

나는 기독교가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근대 정치가 더 선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 정치는 현실 정치인들이 벌이는 판이다. 근대 정치는 개인과 소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쪽으로, 좀 더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대 정치의 흐름은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 가치를 가지고 그들이 벌인 판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기독교적 가치는 필연적으로 희생자를 생산해 내는 현대 정치와는 상극일 수밖에 없다. 한때 유행했던 <정의란 무엇인가>(와이즈베리)라는 책 서두에는 수십 명을 구하기 위해 희생자를 몇 명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가 등장한다. 좀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소수가 희생되는 현실, 그것을 실행하는 곳이 정치 현장이다.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한 재개발 계획은 입주민과 지역민의 욕구를 완전히 충족하지 못한다. 몇몇 시스템의 오류와 관료들 장난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고대국가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예언자들은 궁전을 떠나 국가를 비판하는 선지자들이 되었다. 현실 정치 안에 휩쓸리기보다는 그 외부에서 비판의 날을 세우는 예언자적 정치를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인간의 정치와 종교적 제도 사이에서 국가와 끝없는 긴장 관계를 만들었다. 언제나 현실 정치가 간과하고 있는 더욱 엄혹한 현실을 고발했다. 제도를 향해 쏘는 화살이 되어  현실 외부에서 인간의 삶터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 것이다.

예수가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를 말했을 때, 그는 가난한 자를 돕는 현실 정치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필연적으로 약자와 가난한 자를 먹잇감으로 삼는 당시 제국 정치의 모순을 고발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현실 정치는 변했을까?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양대 축으로 삼는 정치·경제적 현실은 예수의 눈에 정의롭게 보일까? 그럴 리 없다. 현실 정치의 장에서 정치집단들은 언제나 차선의 선택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현실 정치 시스템 자체에 대한 차가운 비판으로 인도한다. 로마의 정치에 희생당한 메시아 예수를 망각하지 않으려면 그가 사랑한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 성소수자들(당시의 성 담론에 비난받았던 자들), 사회의 가장 변두리에서 잊혀져 가는 사람들을 위한 정의를 교회는 찾아야 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백성이 되는 하나님나라를 기도했던 예수의 예언자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

해 아래 새것은 없다. 하늘로부터 새롭게 된 자들은 땅의 것을 사모할 수 없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세상, 둘 사이에 끼여 있다고 말한다(새번역, 빌 1:23). 그리고 자신이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이유는 그것이 성도들에게 더 필요하기 때문이라 고백한다(빌 1:24). 바울의 목표는 현실 정치 속 투쟁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와 세상 사이에서 현실 정치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당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현실 정치는 좀 더 나은 선택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되는 희생자들을 침묵시킨다. 합의의 방법을 통해, 현실 정치판에서 자신의 권리를 말할 수 없는 자들은 점점 우리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예수 공동체는 그들의 목소리와 삶을 들어 주고 증언하면서 현실 정치의 아둔함을 비판하며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꿈꾼다. 지금의 현실 정치에 편입하려는 여러 움직임이 결국 정치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워 하나님의 정의를 고민하는 운동으로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한수현 / 감리교신학대학교 객원교수. 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바울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평화교회연구소, 기독연구원느헤미야 등에서 복음서와 현대 바울신학을 강의하고 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