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오키나와의 이토만 공설 시장을 찾은 적이 있다. 쇠락해 가는 항구도시, 손님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고요한 시장에서 나는 한 정육점 사장님을 만났다. 사드(THAAD) 배치가 결정되었다는 보도가 나온 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고, 일본 참의원 선거를 하루 앞두고 있었다.

92세 사장님은 오키나와 전쟁을 온몸으로 겪었다고 하셨다. 만삭의 몸이었던 그녀는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피난을 떠나며 가위와 소독약, 명주실을 미리 챙겼다고 했다. 그리고 깊은 밤, 어느 골짜기에서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클까 걱정했는데, 너무 작아 다행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너무 슬펐다고 그녀는 그날을 회상하며 말했다. "전쟁만 없으면 된다. 그럼 뭐라도 해서 살 수 있다." 2019년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간, 나는 오키나와의 할머니를 생각한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혹자는 '정당한 전쟁(Just war)'을 이야기하며 전쟁의 불가피성을 역설한다. 혹자는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가치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하지만 이런 목소리들이 전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당신 또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 당신이 전쟁에서 죽여야 할 '적'이 사실은 당신과 같은 '한 사람'일 뿐이라는 이야기, 당신이 목숨을 걸고 뛰어들었던 그 전쟁으로 누군가는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2020년이면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다. <한국전쟁과 기독교>(한울아카데미)에서 저자 윤정란은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한국전쟁을 계기 삼아 한국 사회의 주류가 되어 온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한국전쟁은 누군가의 모든 것을 파괴했지만, 어떤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그 누군가들은 주로 기독교인들이었다. 대한민국의 경제와 기독교는 엄청난 속도로 동반 성장했다. 이 책은 이승만, 박정희 정권과 기독교의 긴밀한 공조를 담담하고도 선연하게 보여 준다.

미국 교회들이 한국전쟁의 참상 앞에서 휴전을 요구할 때, 한국의 주류 기독교는 이승만과 함께 휴전 반대, 북진 통일을 외쳤다. 민족 통일을 위해 전쟁을 멈출 수 없다는 주장은 통일의 주체인 민족을 죽여 통일을 이루겠다는 역설임에도 기독교는 이에 동조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산당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와 동일시되었다. 마귀들과 싸워야 한다는 주류 기독교의 목소리는 마귀의 자리를 채울 존재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그들이 '이웃'이라는 사실을 지워 버렸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이웃'은 언제라도 '그들'이 될 수 있었고, '그들'은 얼마든지 죽어 나가도 괜찮았던 것이다.

휴전이 되면서는 물리적인 분단이 이루어졌다. 물리적 분단은 그 분리를 확증하는 '경계'를 강조했다. '경계'는 '국가 안보'라고 하는 공동의 목표를 기반으로 '경계 너머의 적'을 상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경계 너머의 사람들을 '적'이자 '마귀'로 규정할수록 '분단'은 더 넘기 어려운 벽이 되었다. 이제 주류 기독교는 바깥의 적을 찾는 대신 '내부의 적'을 찾기 시작했다. '분단'이라는 벽 너머의 '이웃'과 교류하려는 모든 이를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분단'은 한국 사회에서 외부의 '적'과 내부의 '빨갱이'를 만들며 자기 검열과 상호 검열의 문화를 형성했다. 기독교는 '승공勝共'과 '반공反共'의 이름으로 분단 체제를 더욱 강고하게 지탱했다. 한경직 목사가 담임했던 영락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서북청년단은 좌익 척결에 앞장섰고, 수많은 사람이 그들의 총과 칼에 목숨을 잃었다. 한국 기독교의 부흥은 '빨갱이'로 지목되었던 이웃들의 핏값으로, 쓰러진 그 몸들 위에 쌓아 올린 성 아닌가.

'빨갱이'라는 말은 2020년을 한 달 앞둔 지금도 여전히 생생히 살아서 작동하고 있다. 4·16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던 유가족들 역시 '빨갱이' 라벨을 피해 가지 못했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빨갱이'라 부르는 것이 일상 풍경이 되어 버렸다. 2019년 '빨갱이'의 다른 이름은 '소수자', 주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그리하여 지금, 여기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는 성소수자이고 난민이며 여성이 아닌가?

한국전쟁 70년을 맞으며 '기독교인들이 한국전쟁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질문을 마주하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2019년 12월, 대한민국에서 기독교란 대체 무엇인가. 기독교인으로 호명되는 것은 대체 누구인가.

불쑥불쑥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올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던 일본 사람들 얼굴이 떠오른다. 굳이 내게 사과할 이유가 없는데도 꾸준히 나에게 사과했던 사람들. 그런 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생각했다. 일본인으로 살아가며 조선인을 마주할 때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왜 스스로 사과해야겠다고 느꼈던 것일까. 일본 제국주의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적 없는 개인, 그 시대를 비껴 살아온 다른 세대의 일본인이 과거를 원죄처럼 끌어안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한국전쟁은 분명히 휴전 상태였지만 한반도의 전쟁은 '적'의 이름과 싸움의 '형태'를 달리했을 뿐 단 한 번도 쉬어 간 적이 없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에 뒤를 돌아보게 되는 이들이라면, 2019년 한 해의 마지막을 앞두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끔찍한 원죄를 직시해야 한다. 그 원죄와 나의 관계를 성찰해야 한다. 혐오·배제·차별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지금 이곳에서의 모든 전쟁을 끝내야 한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2018년 전 세계 군사비 지출은 미화 1822억 달러로 추정된다.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2.1%를 차지하는데, 1인당 비용으로 환산하면 약 239달러를 군사비로 지출하는 셈이다. 원화로 따지면 한 사람이 1년에 약 28만 원을 군사비에 쓰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는 2020년 대한민국 국방 예산은 정부 수립 이래 최대 규모이자 전년 대비 7.4% 증가한 50조 1527억 원이다. 지난해 한국은 전 세계 무기 수입국 순위에서 9위를 차지했다. 대한민국이 구입한 무기는 어디에 쓰이며 누구를 향하고 그 많은 돈은 대체 어디서 와서 누구에게로 가는가.

1991년 이라크 전쟁을 선언하는 조지 부시 곁에 두 손으로 성경을 든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있었다. 길었던 전쟁의 끝, 세계는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이라크 전쟁으로 사망한 이라크인은 최소 10만 명, 미군은 수천 명으로 집계된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 집단적으로 일어나는 살인에 지나지 않는 전쟁을 대체 왜 이 세계는 멈추지 않는가? 그렇기에 한국전쟁 70년을 맞는 기독교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개개인의 '병역 거부 선언'이다. 물리적인 군대와 국방의 의무로 군대에 가는 것을 거부하는 방법만이 병역 거부가 아니다. 전쟁을 지탱해 온 모든 구조와 문화의 일부로 살아가는 것 역시 병역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을 정당화하는 어떤 행위에도 가담하지 않겠다는 병역 거부 선언, 그러므로 나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전쟁 거부 선언. '빨갱이 척결'이라는 깃발 아래 다시는 모이지 않겠다는 선언, 어떤 형태의 차별과 배제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선언, 내가 낸 세금이 무기 거래에 사용되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선언, 각자의 자리에서 거부할 수 있는 모든 폭력을 거부하겠다는 단호한 선언이 한국전쟁 70년을 맞아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평화운동이 아니겠는가.

<3월 1일의 밤>(돌베개) 저자 권보드래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3·1 운동이 도래하지 않은 '독립'이라는 미래를 당겨다 쓴 언어적 양식이라 말했다. 그리하여 나는 기대한다. 2020년을 맞으며 곳곳에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당겨쓰는 목소리들이 분연하게 들려오기를. 전쟁을 끝내겠습니다. 아니, 제 삶에서 전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저는 이런 전쟁에 다시는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문아영 / 평화교육 단체 피스모모(www.peacemomo.org) 대표. 성탄을 앞둔 2019년 12월, 지금도 여전히 전쟁 속에서 태어나고 있을 아기들을 생각한다. 헤롯을 피해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처럼.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