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국가인권위원회가 전국 광역·기초 단체들에 인권조례를 제정하라고 권고한 2012년, 당시는 부산 해운대구와 수영구(2010년)를 비롯해, 부산 남구, 울산 동구·북구, 경기 광명시(2011년) 등 전국에서 단 6곳만 인권조례를 제정한 상황이었다.

상위 기본법이 없는 상황이라, 국가인권위는 조례 제정을 돕기 위해 '인권조례 표준안'을 제작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권고가 있던 2012년 15곳이 조례를 제정했고, 2013년 28곳, 2014년 4곳, 2015년 13곳, 2016년 15곳, 2017년 7곳, 2018년 3곳이 뒤따랐다.

그러나 기초 단체 중 인권조례를 제정한 곳은 국가인권위 권고 이후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절반이 되지 않는다. 2019년 9월 말 인권조례를 공포한 서울 관악구와 대구 달성군을 포함해, 현재 조례를 시행하는 기초 자치단체는 전국 226개 중 96개, 42.5%다.

앞선 기사에서는 기초 단체 21곳이 인권조례 제정을 시도했다가 보수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반동성애 진영에서 집단 민원이 들어와 실패한 사례를 다뤘다. 이번 기사에서는 인권조례를 시행하는 지자체가 얼마나 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실효성 있게 조례를 운영하는지 살펴본다.

전국 기초 단체들은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조례 제정 권고 이후 하나둘 조례를 만들기 시작했다. 현재 226곳 가운데 96곳, 42.5%가 조례를 제정한 상태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57곳 '인권 기본 계획' 미수립
인권위원회 없는 기초 단체도 55곳
'연 1회 이상' 인권 교육도 제대로 안 돼

<뉴스앤조이>는 기초 단체의 인권조례 운영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인권조례를 제정해 운영하는 96곳 중 94개 지방자치단체(9월 말 조례를 공포한 서울 관악구와 대구 달성군 제외)에 10월 15일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6년 발간한 <지자체 인권 제도 현황과 개선 과제 연구> 연구 용역 보고서 내용을 참고해 △현재 인권 보장 및 증진 기본 계획서 및 연도별 시행 계획서 △인권위원회 위원 명단 및 회의록 △최근 5년간 인권 교육 실시 현황 △최근 5년간 인권 영향 평가, 공청회, 실태 조사 개최 현황 △인권침해 진정 접수 사례 △인권 지수(지표) 개발 현황 △인권 백서 등을 청구했다.

정보공개를 청구할 당시에는 많은 자료를 요구한 탓에 회신이 늦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예측은 빗나갔다. 경남 거제시·창원시, 강원 영월군·동해시, 인천 서구, 대구 달서구, 부산 수영구·사하구·남구, 서울 중구 등 10곳은 '부존재'를 통지해 왔다. 경북 문경시·구미시·고령군, 경남 사천시·함양군·고성군, 경기 구리시 등 7곳은 공개 결정이라면서 '청구한 내용을 생산하거나 보관하고 있지 않다'고 회신했다. 실질적으로 '정보 부존재' 상태였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시한 인권조례 표준안에 따르면, 각 지자체는 효율적인 인권 행정을 위해 4년 혹은 5년마다 인권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연도별 시행 계획을 작성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기본 계획을 수립해 시행 중인 곳은 96곳 중 39곳(40.6%)에 불과했다.

96곳 가운데 57곳(59.4%)은 인권조례를 제정하고도 인권 기본 계획이 없었다. 조례를 제정하고 1년이 지나지 않은 서울 중구·관악구, 대구 남구·달성군, 경기 남양주시, 강원 동해시·태백시, 인천 서구 등 8곳은 제외한다고 해도, 나머지 49곳이 조례 제정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본 계획조차 갖추지 않은 것이다.

기본 계획 수립만 명시하고 주기별 계획은 세워 놓지 않은 전북 군산시는, 표지 포함 2장짜리 '공직자 인권 감수성 증진 물품 제작 계획'이라는 문서를 보내왔다. 예산 500만 원을 들여 관내 공무원에게 물티슈 4000장과 볼펜 4000개를 지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물티슈와 볼펜이 왜 인권 감수성 증진 물품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인권조례를 제정하고도 기본 계획을 수립하지 않은 곳은 96곳 중 57곳이다. 전국 226곳 기초 단체를 기준으로 보면 인권 기본 계획이 존재하는 곳은 39곳(17.2%)에 불과하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인권조례의 핵심 중 하나는 인권 관련 심의·자문 기구인 '인권위원회'(인권보장및증진위원회 등 명칭 지역별 상이) 설치다. 그러나 96곳 중 55곳(57.3%)은 인권위원회를 구성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 수영구, 대구 달서구, 대전 대덕구, 경기 구리시 등 인권위 회의를 '비상설화'한 일부 지자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연 1회 이상 정기회를 열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위원회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인권위원회는 구성돼 있지만, <뉴스앤조이>가 정보공개를 청구했던 10월 중순까지 인권위원회 회의를 한 차례도 열지 않은 지자체도 12곳이나 있었다.

인권 교육도 미비했다. 대부분 지자체는 공무원(직원)을 포함해 지도·감독하는 법인의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연 1회 이상 인권 교육을 실시하도록 조례에 규정하고 있다. 정보공개 청구 결과 지자체 27곳은 올해 10월 중순까지 인권 교육을 한 번도 실시하지 않았다.

이 가운데 부산시 사하구·연제구·남구·북구·수영구 등 5곳은 인권 교육 의무 시행 규정이 없었고, 시행하지도 않았다. 나머지 22곳은 의무 규정이 있는데도 교육하지 않았다. 서울 서초구는 연 2회 이상 인권 교육을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정보공개 청구 회신일인 10월 28일까지도 교육을 실시하지 않아 '현황 없음'이라고 통보해 왔다.

실시하는 지자체도 대부분 연 1회 강당 집체 교육 방식이었다. 충남 태안군·서산시·논산시는 공무원 대상 교육 없이 이통장, 학생 등 주민 대상으로만 인권 교육을 실시했다.

인권 정책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수치로 나타내 주는 '인권 지수' 혹은 '인권 지표'를 개발할 수 있다고 조례에 명시한 지자체도 45곳이나 되지만, 운영하는 곳은 없다. 올해 9월 서대문구가 전국 최초로 인권 지표를 시행했다.

조례를 검토하고 제정하는 기초 의회들도 대부분 인권조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의 없이 만장일치로 인권조례를 제정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심드렁한 조례 제정 과정
대부분 토론 없이 만장일치 제정
"아주 애매모호한 내용" 핀잔도

<뉴스앤조이>는 조례 제정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각 지자체 의회 홈페이지에서 조례 제정 관련 소관위원회와 본회의 회의록을 살펴봤다. 인권조례 제정 필요성을 놓고 심도 있게 토론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의장이 "검토 보고 원안대로 가결하고자 하는데 이의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위원들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해 만장일치로 통과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문제를 제기한다 해도 대부분의 시군구 의원은 인권 기본 계획 연구 용역 수립에 따른 예산(평균 2000~3000만 원대)이 많다고 따지거나 인권위원회의 실효성을 의심하는 정도였다. 국가인권위원회나 광역시·도 인권위원회가 있는데, 기초 단체까지 또 만들어야 하느냐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충남 홍성군에서 한 군의원은 "인권위원회도 수당 줘야 하나. 나중에 사무실이라도 만들어 달라고 하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느냐"고 질의하기도 했다. 울산 울주군에서는 인권조례를 발의한 의원이 "인권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실현이 근본이고, 지역사회에서도 보육, 장애인 문제 등을 총망라해서 총체적인 맥락에 같이 연계한다고 해석하면 될 것 같다"고 제안 이유를 설명하자, 다른 의원이 "그래요. 아주 애매모호한 그런 내용이다, 그지요?"라고 되받아치는 기록도 있다.

"전시 행정성 조례 제정,
외부 공격 못 버텨"

반동성애 진영은 인권조례뿐 아니라 학생 인권, 성평등 조례 등 '성'과 관련 있다고 생각되면 집단행동에 나선다. 전문가들은 조례가 왜 필요한지 고민 없이 제정해 놓고 실질적으로 운영하지 않으면, 외부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힘들게 인권조례를 제정하고 나서도 왜 제대로 운영하지 않을까. 홍성수 교수(숙명여대)는 지자체 인권조례 숫자가 손에 꼽을 정도였던 2012년부터 '전시 행정', '성과주의'를 원인으로 꼽았다. 홍 교수의 논문 <지방자치단체의 인권조례에 대한 연구: 이념, 현실, 전망>은 7년이 지난 지금 더욱 유효한 논문이 됐다.

"무엇보다 지자체의 전시 행정 또는 성과주의를 의심해 볼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장이 대형 스포츠 대회를 유치하거나 대형 축제를 개최하여 성과를 내려고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인권조례의 제정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인권조례나 인권 헌장의 제정 등이 다른 대형 이벤트만큼 효과가 즉각적이고 크진 않지만, 지자체가 어떤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긍정적 이미지를 갖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중략)

대부분의 인권조례는 시민사회에서의 공감대 없이 관 주도로 추진되었고, 조례 제정 이후 그 이행 의지를 심각하게 의심하게 할 정도로 후속 조치가 미흡하다는 점은 이러한 혐의를 더욱 짙게 만든다."

의식 없는 부실한 행정은 지자체가 반동성애 진영 압박에 쉽게 굴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권재단사람 정민석 사무처장은 11월 28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대부분의 기초 단체들이 성과 욕심이나 인권위 권고 때문에 제정하다 보니 기반이 부실했다. 뿌리가 얕으면 외부 공격에 흔들리기 쉽다. 철학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데, 그렇지 못하니 공격을 받는 것이다. 이제 후발 주자들은 차라리 인권조례를 제정하지 않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홍성수 교수도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인권조례가 공격받는 이유는 부실 제정에 있다. 조례가 왜 필요한지 취지를 고민하지 않고 제정하다 보니, 공격이 들어왔을 때 방어 논리를 세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이진숙 충청남도인권위원장은 11월 28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얼마 전 충청남도 인권 기본 계획 수립을 위한 공청회가 있었는데, 보수 교계 반대로 난동이 벌어져서 회의가 무산됐다. 광역도 상황이 이런데 각 시·군은 더 심각하다. 아직 인권위원회를 구성하지 못한 기초 단체들도 위원회 구성 자체를 어려운 과제처럼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기초 단위에서 인권위원회 활동이 활발해지려면 지역 시민사회 역량이 커야 하는데, 농촌 중심 기초 단위에서는 이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반면, 전국 어디를 가나 '기독교연합회'는 있다. 이들이 반동성애 운동, 인권조례 제정 반대 운동의 컨트롤타워가 된다. 기반이 약한 지자체일수록 국가인권위원회와 광역 단체 인권위원회 도움이 필수적이다.

국가인권위원회 관계자는 12월 6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2017년부터 각 기초 단체의 인권 부서와 인권위원회를 실효성 있게 운영하라는 의견을 계속 표명해 왔다. 다만 기초 단체 역량으로 실행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국가인권위도 지난해부터 실질적으로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자문을 많이 하고 있다. 내년에는 인권 업무 담당자 워크숍이라든지 인권위원회 위원 교육 등도 시행할 계획이다"고 말했다.(계속)

※뉴스앤조이는 전국 인권조례 현황과 운영 실태를 태블로로 시각화했다. 아래 이미지를 클릭하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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