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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개화, 항일 독립운동 이끈 교회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 수원종로교회

이근복   기사승인 2019.11.29  12:5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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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대림절(대강절·강림절)이 다가왔습니다(올해는 12월 1일). '오다'라는 뜻의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한 대림절待臨節(Advent)은 성탄 전 4주간으로 예수의 탄생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 절기입니다.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 강림절, 창조절과 같은 교회력의 출발이니 교회로는 새해가 시작되는 셈입니다. 세상이 한 해를 마감할 때, 교회가 한 달 먼저 새해를 시작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를 세상에 펼쳐 희망을 만들라는 뜻이 아닐까요?

대림절에 온 교회가 주목하는 인물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한 것과 같이,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마가복음 1장 2-6절)."

당시 예수보다 인기가 많았던 요한이 오로지 예수의 길을 준비하려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조연을 자처하며 행동한 기록입니다. 그러니 대림절에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도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경기도 수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임면수 권사를 대림절에 기억해야 합니다. 민족 해방과 민중 교육을 위해 재산을 다 포기하며 전적으로 헌신한 까닭입니다.

1874년 수원 매향리에서 태어난 임면수 권사는 신문학의 중요성을 깨닫고 상경하여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이듬해 민족 독립운동 중심지인 상동교회 '엡윗(Epworth)청년회'에서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다가 전덕기 목사를 만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입니다. 독립협회 해산 이후 고향 수원으로 돌아와 수원종로교회에 엡윗청년회를 세웠습니다. 과수원과 토지를 희사해 수원에서 현대식 교육을 처음 도입한 삼일학당(현 삼일학교)을 건립, 교감과 교장으로 헌신했습니다.

그는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고, 항일운동 단체인 신민회의 경기도 책임자를 지내다, 경술국치 이듬해 전 재산을 삼일학당에 기부하고 항일 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합니다. 임시정부와 신흥무관학교의 재정 조달을 위해 일했고, 1911년 신흥무관학교 분교인 양성중학교 교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에 진력했습니다. 부인 전현석 여사와 함께 독립운동 기지로서 운영한 객주는 독립군의 중계 연락소와 무기 보관소이기도 했습니다. 부인 전 여사는 독립군 식사를 위해 하루 저녁 5~6끼 밥을 지었으며, 당시 독립군으로서 전 여사의 밥을 안 먹어 본 이가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임면수 권사의 장남도 만주에서 20살 정도에 독립 투쟁에 가담했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자신도 1921년 밀정의 고발로 체포되어, 수감 중 고문으로 전신이 마비되면서 병보석으로 1년 만에 출옥합니다. 다시 수원으로 돌아와 삼일학교를 운영했고, 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 나서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0년 고문 후유증으로 별세합니다. 2015년 수원 지역 인사들은 '독립운동가필동임면수선생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수원종로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당시 경기도 지역의 치열한 항일운동의 정신적 토대는 수원종로교회였습니다. 수원에 전파된 기독교는 봉건사회에서 양반과 왕권에 억눌렸던 농민과 상인, 천민과 여성에게 인권과 자유, 평등의 사상을 심었습니다. 민중의 개화와 교육, 의료를 통해 가난과 무지를 깨우쳤고, 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3·1 혁명 민족대표 33인의 최성모 목사, 민족대표 48인의 김세환 권사, 매일학교를 세웠고 평양을 중심으로 목회하고 진남포 3·1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룬 이하영 목사가 수원종로교회 출신입니다. 임면수 권사도 이런 애국적인 신앙의 흐름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자욱했던 안개가 걷혀 단풍이 아름답게 빛나던 가을날에 찾아간 수원종로교회는 화성행궁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개혁 군주였던 정조 대왕의 꿈이 담긴 수원 화성의 행궁은 평소에는 수원부 관아로 쓰이다가, 수원 신도시를 건설한 정조 대왕이 행차하면 머물던 곳이었습니다. 세계 문화 유산답게 건물들은 우아했고, 그룹으로 방문한 학생들과 은퇴한 분들로 보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행궁 뒤 산에 올라 미로한정에 앉아 보니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았고 수원종로교회도 잘 보였습니다. 좀 내려가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와 홍살문을 배경으로 교회 사진을 찍었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옛 숨결을 느껴 보고자 했지만, 출입문이 다 잠겨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교회 건물이 초라했고,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표지판도 없었습니다. 밖에 내놓은 주보는 4주 전 것이어서 참 아쉬웠습니다.

수원은 정조 대왕이 유교를 바탕으로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 도시인 까닭에, 어느 지역보다 복음 전파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지역의 선교 책임을 맡은 미감리회 스웨어러(W.C. Swearer) 선교사가 몇 차례 선교를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1899년 4월, 스크랜턴(W.B.Scranton) 선교사가 파송한 감리교인 서너명이 수원 읍내로 이사와 정착하면서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1901년 12월 인천 내리교회 전도인 이명숙 권사가 오면서 신앙 공동체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고, 초가집을 매입해 예배당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 2월 남자 3명, 여자 4명을 등록시키면서 수원종로교회가 본격적으로 출범했습니다. 2년 만에 크게 성장하자, 남녀 매일학교를 설치해 운영했습니다. 이 학교는 근대 수원 교육의 효시가 된 삼일여학교(현 매향여학교)와 삼일남학교로 발전했고, 이에 따라 청년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서울 이남 지역 선교에 산파 역할을 한 수원종로교회는 올해 창립 12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최근 24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강성률 목사는 '민족과 함께하는 수원종로교회'를 기치로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척박한 시대에 수원의 빛이었던 수원종로교회가 대림절의 뜻을 새겨 비우고 진리와 구원, 생명과 평화를 외쳤던 예수의 길을 닦아 간다면, 120년을 넘어 알찬 역사를 열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 전 목회자 기독교 고전 읽기 모임에서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발제한 강치원 목사는 웨슬리의 이 말로 결론을 삼았습니다. 대림절에 새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은총을 입었을 때 우리는 골방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마음속 깊은 곳으로 물러나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당신께서 주신 것을 당신께 돌려드리기 위해 제가 왔습니다. 저는 그것을 아낌없이 포기하고 나 자신의 무(nothingness)로 다시 돌아갑니다. 마치 공허하고 어두운 공기가 태양의 빛으로 충만해질 수 있듯이, 당신에 의하여 그리고 당신으로 충만해질 수 있는 공허함 외에 무엇이 천지간에 당신 앞에 가장 완전한 피조물이겠습니까?'" (130~131쪽)

"쌓아 놓음이 아니라 비움에서 완전을 보는 웨슬리, 무에서 완전의 충만을 보는 웨슬리,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가 느껴진다."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는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교회활력화지원네트워크 사무총장.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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