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다 웃시야왕
(기원전 783~기원전 732)

아마샤가 시해된 뒤 아들 아사랴가 남유다 왕국을 통치합니다. 아사랴가 본명이고 웃시야는 왕위명이었던 모양입니다.

동시대 인물인 북왕국 여로보암 2세보다 더 오래 통치했습니다(왕하 14:21-22; 15:1-7; 대하 26장). 역대기 기록(대하 26:1-23)에서는 유다의 군대를 재조직해 규모와 수행 능력을 크게 향상시킨 유능한 군사 지도자로 그리고 있습니다.

기원전 8세기 초 북이스라엘 요아스가 남유다 아마샤를 무찌른 이래로, 남유다가 속국은 아니더라도 손아래 동맹국으로 북이스라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아사랴(웃시야)의 유다 군대 양성과 다양한 군사 작전은 팔레스타인 주요 교역로 통제권을 회복하려는 여로보암의 종합 계획 일부분으로, 이스라엘이 고무하고 부추겼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웃시야가 블레셋 사람들과 두 아랍 집단, 곧 구르바알(Gurbaal; 다른 곳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다)과 마온 사람(Maunites)에 대항해 벌였다고 전해지는 전쟁들의 목적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대하 26:6-7).

웃시야의 업적

웃시야는 블레셋 5개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인 가드(Gath)를 정복합니다. 웃시야 이후 가드는 유다 영토가 되었습니다.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가드는 기원전 8세기 중반 이후(웃시야 정복 이후) 도시가 축소되었습니다.

가드 외에도 야브네·아스돗 성벽을 무너뜨리고, 전쟁이 끝난 뒤 블레셋 영토 안에 "성읍들"을 건축했습니다(대하 26:6). 이 성읍들은 더 남쪽에 깔린 도로들과 연결되며, 분쟁 지역을 통과하는 교역로를 지키기 위해 배치된 튼튼한 요새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역대하 26장 10절에 아사랴가 "거친 땅에 망대를" 세웠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남쪽 도로들 역시 방어 요새들을 통해 방위되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온 사람들도 무찌른 웃시야는 그들에게 높은 대로大路 경비 임무를 주고 조공을 부과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 블레셋 사람들과 구르바알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마온 사람들을 치게 하신지라. 암몬 사람들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대하 26:7-8)."

여기서 8절 "암몬 사람들"은 7절과 연계해 "마온 사람들"(Maunites)으로 고쳐 읽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이 두 낱말은 처음 두 자음 순서만 다릅니다. 북이스라엘이 암몬족과 충돌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지리상으로 아래쪽에 있는 남유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온 사람들은 북서부 아랍 부족으로, 당시 블레셋 항구 도시들에서 브엘세바 지구와 세렛 시내(Wadi Zered, 오늘날의 Wadi el-Ha sa)를 거쳐 왕의 대로 남단과 헤자즈(Hejaz) 길까지 접근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다 남서쪽까지 돌아다녔던 유목민들입니다. 역대하 26장 8절의 히브리어 역본과는 달리 칠십인역(LXX)은 '암몬'이 아닌 정확하게 '마온'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웃시야가 사해의 한참 남쪽 지역 아카바만에 자리한 엘랏(엘롯)항을 에돔에서 회복해 재건했던 사건도, 남부 교역로를 장악한 뒤인 이 시점에 벌어진 것 같습니다(대하 26:2, 왕하 14:22).

"아마샤 왕이 그의 열조들의 묘실에 누운 후에 웃시야가 엘롯을 건축하여 유다에 돌렸더라(대하 26:2)."

역대기서는 웃시야가 많은 소떼를 모았고, 농부들과 포도원 지기들을 고용해 유다의 비옥한 지역을 관리했다고 기록합니다(대하 26:10).

나중에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3세는 아사랴가 중앙 레반트 지역에 있던 아시리아 연합군 우두머리였다고 언급합니다.

"해가 지는 쪽의 바닷가에 있던 하맛의 열아홉 구역들과 그 주변의 성읍들을 나는 아시리아의 영토에 복구시켰다. 과거에 그들은 그 지역 일대를 부정하고도 불법적인 방법으로 아즈리야우를 취한 바가 있었다."

어떤 학자들은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아즈리야우'는 분명히 웃시야(아사랴)입니다.

이렇게 웃시야는 역대기서에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땅을 넓히고 국토를 개간하고 망대를 세워 국가 방위에 힘쓰고, 가축을 길러 풍요로운 나라를 만듭니다. 탁월한 군사 지도자 역할도 수행합니다.

"그의 휘하의 군대가 삼십만 칠천오백 명이라 건장하고 싸움에 능하여 왕을 도와 적을 치는 자이며 웃시야가 그의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준비하고 (중략)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대하 26:13-15)."

'한센병에 걸린 웃시야왕'. 렘브란트 그림.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번영과 형통은 여호와 신앙에 충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대하 26:5)."

하지만 웃시야는 그만 교만해져서 제사장 역할까지 탐을 내 성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합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대하 26:16)."

강력한 왕권 행사에 만족하지 못한 것일까요. 제사장 고유 권한까지 탐낸 웃시야는 그만 한센병이 생겨 비참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웃시야는 흔히 '한센병 환자'(leprosy)였던 것으로 기록됩니다(왕하 15:5). 하지만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 한센병은 없었습니다. 헬라 시대 이후에야 발생합니다. 히브리어 '차라아트'는 오늘날 한센병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피부가 벗겨지는 병'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레위기 13~14장에 나오듯이, 한센병은 제사장 진단이 필요했기에 그는 권좌에서 기원전 9세기 말에 물러납니다. 아들 요담과 공동 섭정으로 유다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피부병 때문에 왕실 묘지와는 분리된 특별한 매장지에 묻히게 됩니다(대하 26:23).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그의 이름이 새겨진 장식판은 웃시야의 무덤이 헤롯 시대에 다시 옮겨졌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2차 세계대전 여파로 이 장식판의 원래 위치와 발견된 정황은 논란이 있으나, 후기 헤롯 시대 아람어로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여기로 유다 왕 웃시야의 뼈가 모아졌다. 열지 말 것!"

*팟빵 '에르고니아 라디오' 채널 바로 가기: http://www.podbbang.com/ch/12827
*유튜브 채널 '에르고니아' 바로 가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Pw8sxRrpaJba1RXI97GwSA
박태순 / 새들녘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신학 아카데미 에르고니아(http://ergonia.org)에서 신학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참고 문헌

1) Hershel Shanks et. al., 『고대 이스라엘』, 김유기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5)
2) Anson F. Rainey and R. Steven Notley, 『성경 역사, 지리학, 고고학 아틀라스』, 강성열 역 (서울: 이레서원, 2010)
3) 임미영, "기원전 10~9세기 블레셋 중심지, 가드 : 최근 텔 에 사피(Tel es-Safit) 성벽 발굴을 중심으로," 『구약논단』, 23집 (2017): 208-229
4) 이종록, "갈등과 대립, 그리고 죽음: 웃시야 대 아사랴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고대 이스라엘의 권력 투쟁," 『한국종교학회종교연구종교연구』, 55집(2009): 123-158
5) W. F. Albright, "The Discovery of an Aramaic Inscription Relating to King Uzziah,"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no. 44, (1931):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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