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사회운동가와 환경운동가 사이에 널리 알려진 이 말은 프랑스 학자 자크 엘륄(Jacques Ellul, 1912~1994)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한국교회에는 주로 신학자로만 소개됐지만, 그는 1930년대부터 전 지구에 닥쳐올 기후변화를 예측하며 행동 강령을 주창했다. 강령만 만들지 않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겼다.

엘륄은 가장 친한 친구 베르나르 샤보노(Bernard Charbonneau)와 함께 자신이 살던 보르도 지역의 해안 보호를 위한 협회를 만들었다. 무려 70여 년 전 일이다. 협회는 지역 사람들과 함께 프랑스 서부 해안가의 무분별한 개발계획에 저항했다. 이들의 저항 덕분에 아르카숑(Archachon)은 유럽에서 최대 규모의 해안사구를 그대로 간직한 곳이 됐다.

온전히 20세기를 살고 간 엘륄은 법학자·사회학자·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신학을 연구했다. 세계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바탕으로 누구보다 먼저 기독교인의 생태 책임을 주장했다. 자연환경 파괴는 누구보다 기독교인과 관련한 문제라고 생각했고, 환경보호를 위해 기독교인이 나서야 한다고 했다.

환경문제에 선구자 역할을 했지만, 이런 활동상은 한국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엘륄이 남긴 책을 보면 특정 주제와 신학 혹은 신앙을 연결한 저술이 많다. <하나님의 정치와 인간의 정치>·<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정치적 착각>·<이슬람과 기독교>·<하나님이냐 돈이냐>(대장간) 등에서 그의 독특한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저작 30여 권이 한국에 소개돼 있고, 앞으로 더 많은 책이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스트라스부르대학교에서 종교철학을 가르치는 프레데릭 호뇽 교수(왼쪽)와 국제엘륄협회에서 활동하는 제롬 엘륄을 10월 29일 서울 필동 카페바인에서 만났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자크 엘륄 전문가로 통하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교 프레데릭 호뇽(Frédéric Rognon) 교수(종교철학)와 엘륄의 손자 제롬(Jérôme)이 한국기독교학문학회 등에 참석하고자 10월 26일부터 일주일간 한국을 찾았다. <뉴스앤조이>는 10월 29일 이들을 만나, 기후변화가 다시 이슈가 되고 있는 지금, 엘륄은 어떤 관점에서 기독교인의 환경보호를 이야기했는지 자세하게 들어 봤다.

호뇽 교수는 엘륄 사상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면서도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지금 기독교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애썼다. 제롬 역시 대화 중간중간 할아버지의 저작을 소개하며 엘륄이 남긴 유산을 소개했다. 두 사람과의 대화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 엘륄은 80권 정도의 저작을 남겼다. 다양한 주제를 다뤘는데, 그의 사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호뇽 / 엘륄은 이 시대 가장 중요한 현상을 '기술'(technique)이라고 생각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은 정치 혹은 경제가 시대를 이끌어 갈 것이라고 봤다. 공산주의·자본주의를 논했고, 지성인들은 둘 사이에 누가 옳은지 논쟁했다. 엘륄은 기술이 모든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꿀 것이라고 봤다. 지금 우리는 기술 발전으로 변화된 삶을 전 세계 곳곳에서 목격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엘륄은 '예언자'이기도 했다.

기술 발전이 인류의 삶을 바꾸리라고 본 엘륄은 당연히 이것이 환경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측했다. 기술이 발전하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자연은 뒤처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술이 자연을 대신하려고도 한다. 엘륄은 기술이 '나쁘다'고 한 적은 없지만 기술의 양면성을 지적했다. 부정적인 면 없이 긍정적인 면만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은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중독이나 사생활 침해 등 부정적인 결과도 낳았다. 엘륄은 어떤 사안을 한쪽만 보는 방법 대신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두가 기술을 숭배할 때 이미 기술의 부정적인 면을 얘기했다는 점에서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다.

80여 권의 책을 쓴 자크 엘륄은 법학·사회학·철학의 시각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해 자신만의 사상을 구축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 산업혁명 이후 기독교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세기 말씀에 충실해 경제 발전을 정당화하고, 자연 파괴는 이를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호뇽 / 린 화이트(Lynn White)처럼 기독교인들에게 생태 위기의 책임을 묻는 사람도 있다. 창세기 1장 28절 "땅을 정복하라"는 구절 때문이다. 엘륄은 이 구절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고 했다. 엘륄은 법학자이기 때문에 성경을 법조문처럼 자세히 읽고 해석하며, 인간에게는 땅을 정복할 자유도 있지만 동시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정복하는 대신 잘 돌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와 '책임'이라는 두 가지 기둥이 조화롭게 흘러가야 한다. 기독교 전통을 가진 미국·영국·프랑스 등에서 '책임'이라는 기둥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 측면에서 보면 생태 위기의 원인을 기독교에서 찾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들은 기독교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성경의 일부만 받아들였고 변증법에 충실하지 않았다. 양쪽을 함께 고려하지 않고 한쪽에만 치우쳐서 받아들인 셈이다. 기독교인은 이 생태 위기에 책임이 있고, 동시에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있다고 본다.

- 어떤 기독교인은 환경보호를 필수불가결한 요소로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자연을 다스릴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호뇽 / 엘륄은 변증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변증이 가능하려면 한쪽만 봐서는 안 된다. 한쪽만 보는 것을 엘륄은 '부서진 변증법'이라고 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 끝까지 가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든 복음을 전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사랑 안에서 말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만 얘기한다면, 사랑·정의·청렴·정직 등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또 다른 중요한 가치는 뒷전으로 밀린다.

자유만 부르짖은 기독교인들은 약탈과 침략의 역사를 썼다. 엘륄의 눈으로 보자면, 한 가지만 취하고 나머지는 다 뒷전으로 밀어 둔 것이다. 환경을 파괴하는 것도 이와 같다. 엘륄은 이를 '뒤틀린 기독교'라고 했다. 그가 쓴 <뒤틀려진 기독교>(대장간)는 기독교가 처음 모습에서 얼마나 어긋났는지 설명하는 책이다. 엘륄은 복음주의가 파고 들어간 미국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변형됐는지 목격했다.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메시지에서 멀어진 기독교 말이다.

엘륄은 자신이 사는 지역의 해안을 보호하기 위해 친구와 함께 협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그 결과 아르카숑은 유럽 최대 규모의 필라사구를 간직한 지역이 됐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 엘륄은 이미 수십 년 전 조직적으로 환경 운동에 앞장섰다. 지금은 환경보호를 제일 가치로 삼는 정당이 있을 만큼 정치적인 이슈가 됐다.

제롬 / 자크가 정치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한때 정치에 몸담았다. 보르도 시의회에서 활동했다. 몇 년 해 본 후 제도권 정치가 실제 사람들 삶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직접 지역 환경을 보호할 수 있는 협회를 만들어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호뇽 / 엘륄에게 정치는 단순히 투표하는 행위 이상이었다. 매일매일 우리 선택이 정치와 직결된다고 봤다. 우리가 하루 세 번 뭘 먹는지, 뭘 입고, 어떤 에너지를 사용하고, 이동할 때 어떤 교통수단을 사용하는지 모두 정치적 활동으로 봤다. 지금이야 생태주의자들 모두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엘륄 시대에는 그가 처음이었다. 다음 선거에서 어떤 정당을 뽑을지 고민한 게 아니라, 그때까지 매일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게 진짜 정치적인 삶이라고 생각했다.

제롬 / 자크에게 정치인은 정당에 몸담으면서 시민을 '대신해' 뭔가를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크는 스스로 무엇을 하고 살 것인지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다. 현대사회에서 직업 정치인은 때로 '전문가'라는 사람들에게 휘둘리기도 한다. 전문가·정치인 타이틀을 단 사람들 말에 속지 않고 스스로 배워 직접 활동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안을 볼 때, 전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한 것이다.

- 정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최근 한국 개신교는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어 세를 결집하고 있다. 어떤 개신교인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교회가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롬 / 교회를 말할 때 엘륄은 두 가지 기둥을 얘기했다. '권력에 대항하는 기관', '자유 수호의 매개체'다. 여기서 자유는 약하고 가난하고 불행하고 우울하고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의 자유를 말한다. 사회적 약자들이 자유할 수 있도록 돕는 게 교회 역할이라고 봤다. 내부적으로 부패한 가톨릭에서 시작한 개신교, 특히 프랑스 개혁교회의 역사성에서 온 것이기도 하다.

호뇽 교수가 쓴 <대화의 사상>(대장간)은 엘륄 입문서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호뇽 / 한국 사회를 잘 알지 못해 한마디 보태는 게 조심스럽긴 하다. 미국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가정하에 얘기해 보면, 엘륄이 중요하게 여긴 건 비능력(non puissance)이다. 기독교는 언제나 권력과 가까이 있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는 전능(tout puissant)했다. 하지만 능력을 실행하지는 않았다. 사탄이 기적을 행해 보라고 했지만 하지 않았고, 도망갈 수 있었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피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했다.

엘륄은 예수의 제자라고 한다면 비능력의 길을 가야 한다고 했다. 교회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권력과 결탁해 모든 것을 주무르려고 한다면 누구에게 득이 될까. 역사는 정치와 결탁한 교회가 어떻게 권력을 탐했는지 보여 준다.

- 최근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의 활동으로 기후변화가 다시 이슈가 됐다. 그러나 정작 각국 정치인들은 관심이 없고, 그 때문에 여전히 미래는 비관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이 환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뭘까.

호뇽 / 가만히 있으면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보편화한 카오스'다. 외쳐 봐야 변하지 않는다고 가만히 있는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엘륄은 희망(espoir), 절망(désespoir), 소망(espérance)을 말했다. 지금 우리는 희망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때 소망이 피어난다. 소망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세상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만 없기 때문에 절망 가운데 소망할 수 있는 기독교인들이 움직여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진정한 예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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