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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이면 생각나는 품위 있는 교회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 연동교회

이근복   기사승인 2019.10.10  1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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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데서 왔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104회 총회 9·26 사태(명성교회 세습 불법 허용)로 '제104회총회명성교회불법세습대책위원회' 실무준비위원장을 맡았던 저는 깊은 좌절에 빠졌습니다. 각본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을 막아 내지 못해 신학생들과 교인들에게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순천중앙교회(홍인식 목사)와 완도성광교회(정우겸 목사)에서 당회 결의로 명성교회 수습안을 거부하고 노회에 대책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 정신을 차릴 때, 새문안교회 이상학 담임목사의 9월 29일 주일 설교에서 힘을 받았습니다. 특히 연동교회 김주용 목사의 예언자적 설교는 강렬한 희망의 빛이 되었습니다.

"(전략) 교회헌법위에 그 대형 교회가 있고, 하나님 위에 그 교회 목사와 아들이 있는 것을 인정해 준 꼴이 되었습니다. (중략) 법이 있고 원칙이 있고 하나님의 공의가 있는데, 감정에 호소했을 때 많은 총대들이 시대정신을 외면한 채 (중략) 얻어맞고 터지고 피가 난 것은 우리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중략) 예수님이시라면 수백억을 결재하고 수십만이 복종을 하고 절대 권력과 절대 세력을 가지고 있는 그 자리를 아들에게 주셨을까요? (중략) 법 위에 있는 힘 있는 목사, 하나님 위에 있는 대형 교회 때문에 깨어 있는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중략) 여러분, 교회를 재산처럼 부자간에 주고받으려고 하는 것에 의분을 품으셔야 합니다. 저는 소수지만 끝까지 비판자의 자리에 앉아 있겠습니다. 착한 목자로 불렸던 우리 연동교회를 설립하신 제임스 게일 목사님, (중략) 하나님 앞에 바른 목회자가 되는 것이 착한 목자입니다. 저는 그런 착한 목자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그런 게일 목사님의 뜻을 그대로 연동교회 위임목사로서 더욱 하나님의 이를 지키는 목회를 하고자 합니다. (하략)"

김주용 목사가 닮고 싶다는 초대 담임목사 게일(Gale, J.S., 기일奇一)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1863년 캐나다에서 출생한 게일은 부흥사 무디(Moody)의 영향으로 선교를 결심해, 캐나다 파송 조선 첫 선교사로 1888년 12월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40년간 한국에서 일하면서 한글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성서 번역에 참여하고 <우리말 문법서>를 냈습니다. 한국 최초의 <한영사전>을 간행했습니다. <한국 스케치>, <선봉자>, <과도기의 한국>, <한국인의 역사>, <조선 풍속지>, <조선 결혼 풍속도> 등 영문 서적을 출판하고, <천로역정>을 번역했습니다. <춘향전>과 <구운몽>, <흥부전>, <심청전>을 영역해 한국의 언어·풍습 등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2014년 장신대 국제 학술 대회에서 임희국 교수는 게일 선교사가 유일하신 '하나님' 개념을 세워, 기독교가 한국에 정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는 일을, '님'은 주·주인·임금을 뜻한다고 해석, 하나님 한 분이 영원하신 창조주를 의미하게 되어, '하나님'에 관한 유일신론적 인식 전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발제했습니다.

연동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한글날이던 어제, 2011년 방영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기억났습니다. 세종이 백성에 한글을 만들어 주어 사대부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하고 백성에 이양하려 할 때, 사대주의에 함몰된 보수 양반들의 반발과 비밀결사 조직의 반기에 부딪칩니다. 단순한 언어의 발명이 아니라, 권력 민주화의 일환으로 시도된 것이 한글 창제였지만, 양반들의 억압에 한글은 400년 넘게 잠들어 있었다가 공교롭게도 외국인 선교사, 특히 게일 목사에 의해 깨어난 것입니다.

게일은 1900년 연못골교회(현 연동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27년간 시무했습니다. 길게 사역한 전통이 이어져 129년 연륜의 연동교회에 현재까지 담임목사가 7명 부임했습니다. 김형태 목사님은 생전에 이런 전통을 "연동교회 교인들이 품위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라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게일 목사는 1903년 한성기독교청년회(YMCA) 초대 회장으로, 교회의 사회참여 토대를 놓았고, 정신여고 설립과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특히 게일 목사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목회 철학으로 갖바치(가죽신을 만드는 장인을 천시하던 명칭) 출신 고찬익과 이명혁을 장로로 세우고, 이어 광대 출신 임공진을 장로로 추진하자, 양반 교인들이 반발하더니 1910년 묘동교회를 설립하는 분열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는 1928년 40년간의 선교 사역을 마치고 영국에서 시간을 보내다 1937년 74세로 생을 마쳤습니다.

김형태 목사님은 미국 피츠버그대학에서 기독교교육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연세대학교 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67년 연동교회 5대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독립운동가 김영옥 목사 손자답게 역사의식이 뚜렷해, 1975년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전국성직자단 대표로 활동했습니다. 6월 항쟁 당시인 1987년 6월 22일, 총회 인권위원회가 주관한 새문안교회의 예장 목회자 민주화 기도회에서 설교하고 격려하셨습니다. 기도회 후 저와 허춘중 목사가 거리 행진을 이끌 때, 최류탄이 옆에서 터져도 목회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아스팔트 위에 엎드려 기도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목사님은 에큐메니컬 운동에 앞장서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총무, 세계교회협의회(WCC) 중앙위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부회장을 지내셨습니다. 총회장이던 1988년 2월에는 교회협 통일위원장으로서 역사적인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을 울먹이며 발표하셨는데, 이 일로 교단에서 비난받기도 했습니다. 1989년에는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제22차 한국 총회 준비위원장으로 수고하셨으며, 그해 65세로 조기 은퇴하신 후에는 한국에 계실 때는 제가 시무하던 새민족교회 교인으로 출석하셨습니다.

1990년 부임한 제6대 이성희 담임목사님 부친 이상근 목사는 대구제일교회에서 시무하시면서 주석가로 유명했고 총회장을 지내셨으니, 부자가 총회장을 한 셈입니다. 이 목사님은 일찍이 미래 공부를 열심히 해 교회 미래에 대한 강연을 많이 했습니다. 보수와 진보를 다 아우르려고 힘썼으며, 교회 성장 중심주의를 비판했습니다. 작년 말 원로목사가 되었는데, 지금 교회협 회장으로 수고하고 계십니다.

연동교회는 제게도 추억이 많은 곳입니다. 새문안교회 고등부 시절, 새문안·연동·묘동·안동교회 4교회 고등부 연합 문학의 밤을 연동교회에서 했는데, 저는 새문안 고등부 대표로 시를 낭독했습니다. 저의 대학생회 시절 내내 노동자 야학을 열어, 연동교회 야학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고, 교회협 교육훈련원장 시절에는 아침 출근길 연동교회 예배당에서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교육훈련원장 7년간 여러 신학교 학생들을 위한 에큐메니컬 신학생 공동 수업(1학점)을 연동교회 교육관에서 실시했고, 연동교회에서 친구 목사들과 함께 여러 번 예장 목회자 집회를 주관했습니다. 특히 1995년 친구들과 주관한 '예장 목회자 통일 희년 대회'와 2007년 9월에 선배 목사님들 뜻을 모아 개최한 '예장 목회자 참회 기도회'는 뜻깊은 집회였습니다.

1907년 연동교회는 이준 선생을 만국평화회의에 보냈고, 1919년 3·1 만세 운동 때 최남선·이갑성·이상재·함태영·신마리아·신의경·김필례 등 민족 지도자들 독립운동의 온상지였고, 이런 역사의식은 김형태 목사님에게서 드러났습니다. 주일 설교에서 명성교회 세습을 허용한 총회 수습안을 비판한 김주용 담임목사에게서 아름다운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는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교회활력화지원네트워크 사무총장.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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