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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 농성 117일, 철탑 위 김용희 씨는 온몸으로 시를 쓰고 있다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쫓겨난 자들의 권리 투쟁에 연대해야

강군   기사승인 2019.10.04  1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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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물결이 독일 전역을 휩쓸 무렵 말 장수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은 탐욕스러운 지주 벤첼의 땅으로 들어갈 때 바뀌게 된다. 그는 지주에게 부당한 통행료를 징수당했고 기르는 말을 빼앗겼다. 그는 법이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것은 지주의 방해로 그의 소송이 법원에서 곧바로 기각됐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소설은 법 앞에서 수모를 겪는 민중을 그릴 때 이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그저 민중의 수난을 강조하고 억울함을 드러내 독자에게 고통에 대한 공감을 끌어내려 한다. 그러나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 <미하엘 콜하스>는 고난받는 민중의 고통이 강조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는 "어처구니없이 엉망진창인 세상을 바라보는 고통의 한복판에서 이제 정리된 그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며 내적인 만족감을 느끼"는 미하엘 콜하스를 발견할 뿐이다. 민중을 역사의 피해자로 보는 관점이 아니라 부당한 법질서에 도전하는 주체로 그리고 있는 게 이 소설의 특이점이다.

미하엘 콜하스는 동지를 규합해 봉기를 일으키고 영주의 군대와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전투를 벌일수록 그의 세력은 점점 강해지고 영주의 힘은 점점 약해진다. 콜하스의 위력은 주변국까지 번져 공포의 인물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마르틴 루터는 미하엘 콜하스를 비난하는 격문을 써 붙인다. 그는 루터를 찾아가 자신이 공동체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봉기를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루터가 묻는다.

"쫓겨났다고? 너는 대체 무슨 망상에 빠져 있는 것이냐? 누가 너를 네가 사는 국가 공동체에서 쫓아냈느냐? 아니, 국가들이 존재하는 한에서, 어떤 사람이든 간에 자기 국가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

"제가 말씀드리는 쫓겨난 사람이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저에게 법의 보호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저를 외딴 황무지로 쫓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제 손에 몽둥이를 들려 주어 저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태풍이 부는 악천후에도 강남역에서 고공 농성 중인 김용희가 황무지로 내쫓긴 사람이다. 그는 삼성에서 노동조합을 만들려다 해고당했다. 죄가 없는데 고난당한 미하엘 콜하스처럼 김용희도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지키다 이 같은 일을 당하고 있다. 그 역시 자신이 겪은 부당함을 법에 호소해 보았다. 현재 대통령이 된 유명한 인권 변호사가 사건을 맡았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언론에 호소해 보았다. 그러나 보도되지 않았다. 그가 곡기를 끊고 아찔한 현기증이 도는 25m 철탑 위에 올라가서야 언론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흐름 속에서 내가 재학 중인 기독교학과의 학생들은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 현장 기도 모임을 만들었다. 기도회에서 낭독할 원고를 다듬으면서 나는 수차례 자문했다. "나라면 이렇게 오래 싸울 수 있었을까?", "삼성은 노동자와 그의 가족 모두를 짓밟는다. 내 가족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나는 투쟁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김용희도 아버지가 삼성의 탄압으로 실종되었을 때 투쟁을 포기하려 했다고 한다. 이 질문을 부여잡고 하늘 뜻 펴기 원고를 썼다.

답은 김용희의 입에서 들을 수 있었다. 기도회 차례 중 '현장의 증언' 시간에 우리는 김용희와 전화 연결해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본인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삼성에서 노조를 만든다는 것은 해고 통지서를 스스로 내미는 일과 같다는 걸. 그러나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공장에서 동료의 손가락이 기계에 잘려 나가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은 계속 기계를 가동하고 치료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았다. 이 사건이 오랜 싸움의 시작이었다. 황무지로 추방당한 인간이 인간처럼 살고 싶어서 터져 나온 안간힘이었다.

김용희의 투쟁이 보도되는 인터넷 기사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삼성이 무노조 경영 원칙을 고수하는 거 알고 입사했으면서 왜 투쟁하느냐는 반응과 그 시간에 다른 일 했으면 더 잘살았을 거란 반응이다. 이런 반응은 새로울 게 없다. 미하엘 콜하스의 아내도 그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투쟁을 결심하고 가산을 정리하는 콜하스에게 아내가 묻는다.

"우리가 어떤 이유로든 벌써 쫓겨난 신세가 아니라면, 말해 보세요. 이 끔찍한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죠?"

"내 권리를 보호해 주지 않는 나라에 머물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내가 발길질에 채이며 살아야 한다면, 인간이기를 그만두고 차라리 개가 되겠소!"

김용희와 미하엘 콜하스는 똑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개로 사는 게 낫다는 것이다. 김용희의 투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제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 없다.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투쟁이 시작됐고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를 외치다 이제는 자신의 인격을 지키기 위해 투쟁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희의 투쟁은 더 이상 노조 결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투쟁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보장받아야 할 권리에 대한 투쟁이다.

강남역 8번 출구 앞에서 8월 4일 열렸던 '삼성 해고 노동자 김용희 님을 위한 향린공동체 연합 예배' 당시 사진. 이날 예배가 끝나고 김경호 목사(강남향린교회)와 의사 홍승권 집사(향린교회)가 김용희 씨와 만나기 위해 철탑으로 향했다. 이 시점부터 2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김용희 씨는 고공 농성을 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법은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을 때만 유효하다. 한국의 여러 헌법 조항은 삼성 앞에서 사문화된 문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김용희는 한국 자본주의 체제가 허용할 수 없는 영역을 상상했고 국가 권력과 삼성은 그를 철저히 짓밟았다. 그러나 인간다운 삶은 김용희가 가리키는 손끝에 있다. 삼성에 노조가 없으면 노동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삼성 해고 노동자 김용희와 이재용, 삼성반도체의 황유미, 삼성서비스센터의 염호석과 최종범이 그들이다. 삼성에 민주 노조가 있었다면 이들의 삶은 크게 달랐을 것이다.

루돌프 폰 예링은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법은 "순수한 물적 영역에서는 산문이 되지만 인격 영역, 즉 인격의 주장을 목적으로 하는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는 시가 된다. ─ 권리를 위한 투쟁은 개성의 시"라고 적었다. 그렇다면 헌법이 건조기에 돌린 빨래 같은 문장으로 남겨질지 말지는 투쟁하는 김용희와 연대하는 우리의 몫이다. 김용희는 온몸으로 철탑 위에서 시를 쓰고 있다. 허공에서 자신의 몸을 붓 삼아 쓰는 시. 김용희가 쓰는 시의 제목은 뭘까?

강군 / 대학생,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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