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잔혹극을 보았다

한국교회 미래를 전망해 달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 미래학자가 아니라 과거를 공부하는 사람이어서 모르겠다고 한발 뺀다. 현재에 대해 공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한층 더 조심스럽다. 날카롭게 시대의 흐름을 읽어 내고 분석할 전문가들이 적지 않게 있기 때문이다.

2019년 각 교단 총회에 대한 총평을 부탁받았다. 내 의견 한마디 보태는 것이야 못할 바는 아니지만, 사실 난감했다.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뉴스로 전해지는 소식들이 과연 세밀한 분석과 평가가 필요한 일이기나 한지에 대한 회의 때문이다(그러잖아도 정신 건강을 해치는 뉴스들이 차고 넘치는데 말이다).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코미디'다. 그것도 희극이 아닌 지극한 비극(tragic comedy)이다. 진지하지만 어리숙하기 그지없는 광대들이 정교한 연출에 따라 펼친 잔혹 코미디 말이다. 매해 이런 식이었는지, 아니면 최근 몇 년 사이 '코미디'적인 요소가 더 곁들여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설프게, 절차 없이, 뚝딱뚝딱, 뜬금없이, 뭔가가 '제조'되는 조악하고 불량한 구조가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이 코미디의 키워드는 '명성교회''반동성애' 두 단어로 요약된다. 기억나는 등장인물은 김삼환, 김하나, 그리고 이 둘과 같이 언급하게 되어 미안한 김근주김대옥김요한이다(그러고 보니 다 김 씨다).

지난 1년 11개월 동안 이른바 '제도적' 절차 안에서 엎치락뒤치락 논의되던 명성교회 세습 문제가 김삼환이 한 번 나서서 고개 숙이니, 옥죄던 교단(율)법을 넘어서 은혜롭고 깔끔하게 뒤집어졌다. 다시 총회장을 해 먹고 부총회장 지명권까지 가져간 어느 교단의 '교황' 탄생에 버금가는 결정이다.

한 사람 인생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 이리도 쉽게, 선동적으로 이뤄질 수 있단 말인가? 한 사람 인생에 대해 단 몇 권의 책을 읽고 몇 편의 설교를 듣고, '이단', '엄중 경고', '특강 금지' 등의 결정이 내려진다.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이렇게 가벼운 것이던가! 이런 게 한국교회가 그토록 싫어한다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벌어졌던 인민재판이다. 해마다 이교냐 이단이냐 논쟁하는 대상인 가톨릭교회 중세 말 종교재판이 장로교회 버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사실 더 놀라운 것은 이 상식 이하의 결정에 반성하고 성찰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이다. 아니, 그에 대한 변명조차도 없다. 그들이 음산하게 연출된 잔혹극의 어릿광대에 불과했다는 증거이다. 연극에 대한 비평은 이쯤하고 좀 더 얘기를 진행해 보자.

예장통합 104회 총회 현장. 이번 장로교단들의 총회는 '명성교회', '반동성애'라는 두 단어로 요약된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2. 잔혹극은 낯설지 않다

올해 한 기독교 잡지에 중세 가톨릭교회의 공의회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다. 공의회는 굳이 비교하자면 개신교회 총회라 할 수 있다. 당대 교회가 마주했던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 공의회라는 점에서 공의회를 읽어 나가면 당대 교회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공의회의 결정은 때로 교회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전에 없는 기회가 되었다. 이를 '위로부터의 개혁'이라고 부른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분열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더 이상 위로부터의 개혁이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종교개혁은 아래로부터의 개혁인 셈이다.

공의회를 통한 개혁이 실패해 아래로부터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들여다보자. 공의회는 교황, 추기경뿐 아니라, 파리대학 교수들로 대표되는 신학자들과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등이 참여했다. 이 공의회가 더 이상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행하지 못하고 종교개혁을 야기할 수밖에 없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루터의 종교개혁 발발 100년 전 콘스탄츠공의회에서 발생했다. 백 년의 거리가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반문하겠지만, 공의회는 교회 역사 통틀어 23차례 열렸다. 산술적으로 백 년에 한 번꼴이니 그 결정이 향후 백 년의 정서를 지배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콘스탄츠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 중에서 역사가 주목하는 것은, 보헤미아의 개혁가이자 프라하대학 교수 얀 후스의 화형이었다. 교회사에서도 이 사건은 중요하지만, 대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사건을 중세 대학의 학문의자유가 꺾인 결정적이고 상징적인 사건으로 본다. 중세에 여러 이단이 있었지만 이른바 대중 이단들과 학자 이단들에 대한 대우는 달랐다. 스콜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여러 신학자 주장을 서로 비교하며 토론하며 발전해 간 것이었다. 그래서 스콜라학의 등장은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대학 안에서는 범신론에 버금가는 다양한 주장들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대학사에서 후스는 이단 판결을 받고 처형된 첫 번째 학자로 기억된다. 이것이 남긴 결과는 자명하다. 대학의 학자들은 현실 교회에 개혁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중세 기사들의 토너먼트에 비교되던 학문의 검과 창이 녹슬고 무뎌짐은 당연한 결과였다. 얀 후스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던 존 위클리프가 교수를 지낸 옥스퍼드는 이단의 온상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시, 그에 대한 반대 담론을 가장 활발하게 제조한 곳이 파리대학과 옥스퍼드대학이었다는 점은 교권에 종속된 신학의 끝을 보여 준다. 제도권 신학인 스콜라학 대신 신생 인문학 아카데미들이 활발하게 종교개혁 담론을 발전시켰다.

중세와 종교개혁을 공부한 이들도 잘 주목하지 않는 것 중 하나는, 제5차 라테란공의회가 1512년 소집되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1517년에 마무리되었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는 위기가 닥쳤고 교황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 공의회 시기 교황인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는 세력 확대를 위해 스스로 갑옷을 입고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고, 면벌부를 팔아 성베드로대성당을 지었다. 에라스뮈스는 전사 교황이라고 불리는 율리우스 2세를 보며 가톨릭교회의 종말을 예언했다. 레오 10세는 신이 자신에게 교황직을 주었으니 그 자리를 즐기겠노라고 말했다. 그가 자신의 재위 기간 종교개혁이 발생하여 역사에 치욕스럽게 회자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후스의 화형으로부터 종교개혁까지 백 년 동안은 견제받지 않은 교권이 다다르는 끝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3. 잔혹극을 멈출 수 있을까

이쯤하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눈치채지 않을까 싶다. 뉴스로서 당장의 파급력이야 명성교회 건이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그게 아니다. 모든 보수 교단 총회에서 확실하게 걸고넘어진 성소수자 문제를 읽어 보자. 성소수자라는 이슈를 전제로 교회 내의 다름을 제도적으로 억압하는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다른 게 아니라 이런 것이 전체주의의 길이다. 그 안에서 구성원 개개인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검열당한다.

총회의 진행과 결정 방식이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건전한 토론과 논의라는 기초적인 양식을 한참 벗어나 있다. 이제 이런 상황에서 제도권에 속한 신학자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담론뿐 아니라 다른 첨예한 내용을 입 밖에 낼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이 앞으로 낳을 결과와 비교해 볼 때 명성교회 건은 차라리 희극에 가깝다.

그러기에 핵심은 성소수자에 대한 인정과 불인정, 동성애에 대한 찬반에 관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이번 결정처럼 견제받지 않은 교권이 무소불위한 권력을 휘두를 때, 제도권 안에서 제어하고 비판할 사람이 근본적으로 부재하게 된 현실이다. 명성교회에 대한 총회 결정의 비판은 그 실효성과 별개로 최소한의 공감대를 받을 수 있으나,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서 제도권 내에서 누군가 한마디 다른 소리를 내는 순간 곧바로 마녀사냥 대상이 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것이 단순히 성소수자에 대한 이슈만 그럴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올해 총회에서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총대들이 한국교회에서 개혁적인 목소리를 낸다고 평가받는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신학적 입장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제어하는 흐름이 두드러졌다. 이 현상이 다양함과 다름이 건전하게 논의될 수 없는 구조로 들어간 것,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갔다는 상징으로 읽힌다면 과도한 것인가. 차라리 그 정도는 아니라고 누군가가 설득해 주면 좋겠지만, 난 그리 읽힌다. 지금 보수 교단 총회가 걷고 있는 길이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전체주의가 아니라고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 아주 좋게 보아도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청정한 교회라는 이데아의 현실은 무균실이다. 저항력이 생성되지 못해 생명이 살지 못하는 불모의 공간 말이다.

예장통합 교단에 반동성애 광풍을 불러온 동성애대책위원장 고만호 목사가 총회 마지막 날 발언하고 있다. 그는 "동성애자를 약자로 보는 건 동성애 옹호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역사적으로 종교가 인간에 대한 포용성을 상실했을 때, 그 종교는 진리를 내세우며 차별과 압제를 정당화해 왔다. 인간에 대한 포용성이란 교회가 터 내리고 있는 사회와의 소통이라 할 수 있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가 주의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조를 따질 때 무분별한 자본주의, 사회의 양극화 혹은 환경문제가 우선인지, 아니면 성소수자 문제가 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게 맞는지 생각해 보자. 그렇기에 지금 교회가 목숨 걸고 수호한다는 이슈는 다분히 의도가 담긴 선택적인 문제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된다. 그 선택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신과 부합하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가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루터가 가톨릭교회에 대해 도달한 논리와 우리의 거리가 멀지 않을 수 있다. 이 견제받지 못하는 교권의 어처구니없는 선택에 속수무책 맡겨서는 곤란하다. 멈춰 세우지 못한다면 해마다 '교회' 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들이 십자가에 달리는 잔혹극을 보게 될 것이다. 행동하지 않을 때, 제어하지 않을 때 이 비극은 해마다 되풀이될 것이다.

역시 비극이긴 하지만, 검찰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대중들이 움직이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보다 결코 더 낫다고 할 수 없는 교권의 힘은 누가 견제할 수 있을 것인가? 단, 이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촛불보다는 교회를 떠나는 또 다른 선택지가 있다.

최종원 /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의 교수로 역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교회사 재구성 작업을 하고 있다.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홍성사),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비아토르),<혐오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공저, IVP)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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