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에서는 '정통과 이단'이라는 고정된 개념이 없으며 다양한 종교 문화와 신앙 현상이 존재할 뿐이다. '정통과 이단'은 상호 의존적인 개념으로 다원적인 사회에서는 거의 화석화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기독교 역사 자체가 '정통'과 '이단'의 분열사이자 교체사였던 역사적 사실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구촌 사유가 합류하고 다원화된 종교 시대에도 어느 종교에서나 '정통과 이단'을 판별하고 차별화하는 시대착오적인 근본주의적 종교현상이 있다. 역설적이지만 근본주의는 초기 종교의 정체성을 형성한 종교적 기제였기에, 그 관성적 종교적 영향력으로 진리 수호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내적 신념이 내재화되어 있다.

원래 학술적으로 이 글 제목은 "한국의 그리스도교 '이단'과 그리스도교 '이단', 그리고 말씀"이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독자에게 편하게 전달하기 위해 통용화된 사회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어찌 보면 사회적으로 소통되는 용어 자체가 이 글에서는 특정 종교가 다른 종교와 교파를 보는 사회적 잣대를 제공하기에 편리한 이해를 도울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마 보수 성향 기독교인일 경우, 한국의 이단 기독교 하면 쉽게 떠오르는 종교 단체가 있을 것이다. 이단 기독교는 특정 기독교 단체가 배타적인 성경 해석권을 기준으로 종교 시장에서 이해관계에 있는 기독교를 판별하면서 생겨난다. 반면에 '기독교 이단'은 독자들에게 생소한 개념일 수도 있다. 이 개념은 기독교 내부에서 기독교적이지 않은 현상을 패러디해 필자가 특별히 붙인 종교적 용어이다.

전자가 소위 주류 기독교에서 서구 신학과 다른 새로운 성경 해석과 기성 기독교의 종교 권위에 도전하는 기독교를 표방하는 단체에 적용하는 배타적 방어기제라면, 후자는 한국의 역사적 종교 전통의 맥락을 존중하지 않고, 한국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과도기적 기독교 현상, 즉 '격의 그리스도교 문화 현상'을 말한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예를 들면 성경의 기본 정신과 기독교의 본질이 신앙생활과 괴리되어 나타나는 신행信行 불일치 현상,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교회 세습, 교회 매매 등과 같은 반기독교적 현상을 말한다.

종교적 권위의 독단과
성경 해석권 남용으로 양산되는
이단 기독교

한국의 종교 문화는 풍류와 무교적 심성이 바탕이 되어 수용된 유교적 전통, 불교적 전통, 도교적 전통이 축적된 다원적인 종교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한국에 근대가 들어설 즈음 서구의 기독교가 전래되었으며, 거의 동시에 동학이 효시가 되어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 등 다양한 신종교가 창교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다원적이고 다층적인 종교 지도를 형성하게 된다.

한국 종교 역사의 '막내'격인 기독교는 초창기 열정적인 전도, 교육, 의료 기관 설립, 한글 성경 번역 등 한국 사회에 긍정적 바람을 불어넣었다. 반면에 일제강점기의 신사참배, 해방 후 반공을 내세운 정권과의 정치적 결탁, 사회 차원보다는 개인 구원을 내세운 자본신앙과 결탁한 '성장신학'과 '번영신학'으로 세계 교회가 놀랄 만한 양적 성장을 이루어 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일제강점기의 민족적 시련, 한국전쟁의 참화, 독재정권에 항거한 민주화 투쟁, 열강 사이 힘의 역학에서 분단된 남북한이라는 시련의 역사에 걸맞은 한국 신학과 한국 기독교 문화를 창출하였는가? 한국 사회가 본받을 기독교인상이 정립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고난과 역경 속에 문화를 꽃피운 저력의 기독교가 왜 우리나라에서는 양적 성장에 걸맞게 질적인 내실을 갖추지 못했는지를 진지하게 반성적으로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살펴보려는 이단 기독교 현상과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다.

해방 전후 역사에서 우치무라 간조(1861~1930)에게 신학적 세례를 받았던 함석헌(1901~1989)은 무교회주의자라며 이단 혐의를 받은 적이 있다. 1956년 <사상계>에서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기독교 비판과 대안 제시를 했고, 천주교 윤창중 신부와 몇 차례 지상 논쟁을 했지만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면서 건전한 기독교 담론으로 수용되지 못한다. 사실 '무교회'를 보고 어감상 교회를 부정한다는 편견을 가질 수 있지만, 우치무라의 교회론은 제도 교회가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성경 정신과 부합하는 의미를 이야기한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민중신학(MinJung Theology)의 거두인 서남동(1918~1984)이 1970년 통일교의 <원리 강론>을 '종교적 상상력과 독창성에 있어서 최고'라는 신학적 평가를 한 것이 개신교계 반발을 사, 재임하던 대학교를 떠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학자가 성경에 토대를 둔 종교 조직, 예를 들면 초기 통일교 경전,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 경전 등을 연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학문적 권리이자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이었던 변선환(1927~1995)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 입장에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불교와의 대화를 추진한 일이 빌미가 되어, 1992년 감리회에서 목사 자격과 신자 지위를 박탈당하고 제명된 불행한 역사가 있다.

이러한 불행한 사태는 기억에서 사라질 만하면 재현된다. 2006년 이찬수 교수 해임 사건, 2017년 손원영 교수 파면 사건에서도 나타난다. 사회적으로 당연히 권장해야 하는 불교 등 다른 종교와 우호적 관계를 표현한 신앙적 양심이 강단을 떠나게 만드는 빌미로 작동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다원화된 종교적 전통에 놓인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공존 및 공생은 적극 권장해야 할 종교 행위이다. 이런 몇 가지 종교적 선례는 대부분의 신학 교수와 신학자가 교단 소속의 범위를 벗어나는 신학적 범주와 자유에 기초해 학문하는 일을 꺼리게 만드는 내적인 원인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종교적 적폐 행위는 건전한 이단 연구마저 왜곡해 특정 교단의 일방적인 종교 정보만 전달하는 통로로 악용되기도 한다. 건전한 종교 문화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는 종교의 사회학적 순기능을 스스로 유폐하는 악순환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기독교 내부로 들어가 보자.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개신교로 범주화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만 보더라도 장로교, 감리회, 성결교, 예수교 등 다양한 교파가 존재하고 있다. 최대 교단인 장로교는 신사참배와 친일 청산 문제, 역사 비평 도입,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에 대한 견해 차이로 다양한 교파로 나누어진다. 지금은 수백 개 교파로 분열되어 있다.

종교적 상식이지만 종교 내 분열은 늘 진리와 교권 수호를 외형적 명목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교권과 교세의 확산과 확장을 위한 세속적 자리다툼이 주요한 동기로 작동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일정한 교세와 교단을 형성하면 이해 당사자 간 이단 투쟁은 상호 간의 '침묵의 카르텔'로 잠복한다.

거칠게 표현한다면, 교단 소속 신학자는 끊임없이 '신학적 자기 검열' 속에 교단이 허용하는 신학적 사유 테두리 안에서 교단 목소리를 추종하거나 강화하는 대변자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자답해 보아야 한다. 이런 틈을 악용해 이단 기독교를 판별하고 정죄하는 일부 직업 종교인은 기독교/비기독교, 교회/비교회라는 이분법적 도식에서 형성돼 온 서구 기독교 담론에서 구축된 교리 체계를 신봉하면서 '이단 사냥'에 열중한다. 이 과정에서 양식 있는 다수 기독교인의 목소리는 덮이고 만다.

만일 '이단' 투쟁 정당성 측면에서 본다면, 천주교와 개신교, 기장과 예장, 예장 내의 합동과 통합, 감리회와 장로교 등 다양한 분파 현상을 보이는 기독교 내부에서 교단과 교파 사이에 '이단 판정의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근본적 물음을 던져 보자. 누구나 쉽게 말하기를 주저하지만 결국은 이해관계자의 종교 권력 투쟁의 산물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특히 이단 기독교 연구가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는가? 마치 예수를 정죄하려던 유대교의 바리새적인 독단적 태도로 상대방을 '이단 사냥'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어볼 뿐이다.

일부 이단 직업 종교인에 대한 기독교계 내부의 시선도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다. 하물며 이단 직업종교인이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이단으로 대하는 태도는 더욱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다. 독단적인 이단 판정은 사실을 왜곡하는 뒤틀린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는 어느 교단은 이단을 해제하고, 다른 교단은 이단을 유지하는 이율배반적 이단 판정을 기독교계 내외에서 어떻게 평가할지 외부인 시선에서는 우려스럽기 짝이 없다.

일반 기독교계가 우려하는 이단 기독교가 한국 종교사에 부단하게 출현하는 것은 기성 기독교의 결핍을 채우려는 '한국적인 기독교' 문화 현상이라는 종교학자 윤승용의 비평에 귀를 기우려 봄직도 하다.) 종교학자 입장에서 다원적 종교 전통을 가진 한국에서 서구 신학 전통과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성경 해석권'을 기준으로 한국적 기독교를 이단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제국형 식민신학의 배타적 독단에 불과하다. 이단 기독교 논쟁은 이해관계자가 종교 시장을 유지하고 확산하려는 종교현상에 불과하다.

종교학자 관점에서는 정통 종교도 없고, 이단 종교도 없다. 오직 하나의 종교 문화만 있을 뿐이다. 함석헌은 적절하게 지적한다.

"이단은 없다. 누구를 이단이라는 맘만이 이단이라면 유일한 이단일 것이다"

자본신앙과 건물 성전에 함몰된
기독교 이단

기독교 이단은 기독교를 표방하면서도 창교자와 성경 가르침과는 본질적으로 괴리된 종교현상을 나타내는 기독교를 말한다. 예를 들면 기독교 종교 권력이 예수와 초기 제자와 같이 세속적 권력을 탐하지 않고 겸손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지향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자본신앙과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탐욕적 모습을 보이거나, 세속적 명성을 추구하는 기독교(인)는 기독교 정신과 먼 기독교 이단의 모습이다.

특히 기독교 이단은 한국의 역사적 종교 문화를 존중하지 않고, 기독교 이외에 다른 종교와 관계 설정을 할 때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사회적 모습으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기독교 이단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현상으로 크게 구별할 수 있다.

첫째, 기독교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예수의 몸 된 성전'이라고 종교 선전을 하면서 이를 세습하거나 매매하는 종교적 행위이다. 성전은 모세의 장막 성전, 솔로몬의 예루살렘성전 등 유형 건물 성전 시대를 지나, 예수를 기점으로 건물 성전이 아닌 인격 성전과 인격 공동체가 '참성전'인 시대가 왔음을 성경은 말한다. 기독교인 스스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전하는 '교회'를 사유화해서 '세습'하고 '매매'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이런 교회 세습과 교회 매매 사태를 보고도 성전에 대한 근본정신인 인격 교회, 인격 공동체를 형성하자는 기독교 담론은 거의 형성되지 않고 있다.

인간이 만든 건물 성전(교회)에는 하나님이 부재(행 7:47-49, 행 17:24-25)한다. 바울은 기독교인을 '살아 있는 하나님의 성전'(고후 6:16)이라는 인격 성전(요 2:19, 고전 3:16-17, 고전 6:19)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사도행전 2장의 공동체적 성령 체험과 새로운 생활 모형은 인격 공동체에 대한 성경의 진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최근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대형 교회 매매와 목회자 세습은 일부 직업 종교인의 일탈으로만 보기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오히려 외부인 시선으로는 기독교의 신앙 공동체가 자정 능력을 상실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지금도 건물 교회를 '참교회'로 선전하면서도, 직업 종교인의 탐욕으로 교회를 매매하고 세습하는 일을 용인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신앙 공동체의 본질을 호도하는 기독교 이단 현상에 불과하다.

둘째, 기독교 이단은 '자본신앙과 세속 권력'만을 추구하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존경과 사표의 대상이 아닌 미움과 배척의 대상으로 형성되는 기독교 현상을 말한다. 기독교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근본정신을 도외시하고 성장신학과 번영신학에 함몰되어 양적 교세만을 추구한다. 반면에, 십자가의 고난신학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자비신학이 주류 신앙이 되지 못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참기독교인상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기독교 신앙 생태계를 말한다.

아울러 창조주에게서 위임(?)받은 지상의 대리인으로 자처하는 직업 종교인이 과학의 도전, 생태계 위협이라는 시대적 도전과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역사적 소명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기독교 모습을 보인다면, 이것이 바로 기독교 이단 현상이다. 또한 기복신앙과 자본신앙에 충실해서 값싼 은총과 믿음 신앙에 함몰되어 '건물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신자를 양산하는 것이 기독교 이단의 모습이다. 심지어 사회 법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M교회의 성직 세습, 또 다른 M교회의 성직자 윤리 문제, S교회의 도로 불법 전용, 또 다른 S교회의 자금 횡령 문제 등은 '빙산의 일각'이다.

이런 기독교 이단의 모습을 가진 직업 종교인과 종교 조직의 행태는 진정한 참기독교인들의 빛나는 종교적 행위마저 평가절하하는 역기능을 한다.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점은 한국 기독교 생태계가 '빛과 사랑'으로 넘친다면 이런 어두운 그림자마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국 기독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신앙인만 있는 조직인지, 아니면 직업 종교인의 인건비와 건물 교회 유지비와 교세 확장을 위한 신자의 양적 확보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셋째, 기독교 이단은 주체적인 한국 신학의 부재와 다른 종교 간 대화와 공존을 부정하는 제국형 종교와 신학이 창궐하는 종교현상이다. 현재 한국 신학이 서구 신학 전래사이며,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은 마치 신라 시대에는 중국에서 전래된 종파 불교가 신라에 고스란히 재연되고,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 이외에 무교, 양명학 등은 음사와 사문난적으로 치부하던 역사적 상황을 방불하게 한다. 이런 역사적 유비 현상이 지금 한국 기독교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아스럽다.

한국인의 삶의 정황을 도외시하고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종교적 신앙의 태도를 가진 기독교 교단과 교파, 신자가 있다면, 이는 다원화된 한국 종교 지형과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내리지 못한 기독교 이단의 모습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문화가 한국인의 주체적 심성으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서구에서 전래된 '격의 그리스도교 문화'를 대리로 신앙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서구 신학 전통과 서구 신학자의 사유 체계를 빌리지 않고는 주체적인 한국의 신학을 전개하지 못한 뼈아픈 한국 기독교의 슬픔이다.

지구촌의 모든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적 정황에서 세계적인 신학을 만들어 내놓지 못하고 '칼 라너', '본회퍼', '칼 바르트', '몰트만', '판넨베르크' 등 서구 신학자의 성과를 맹목적으로 이식해서 한국 기독교계를 서구 신학의 대리전을 치르게 하는 제국주의적 식민신학 현상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이단을 발생하게 하는 온상이자 근본 원인이다. 이런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는 식민신학과 제국 기독교의 행태가 한국 기독교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필자를 포함해서 양식 있는 대중을 절망하게 한다.

하나님 말-씀의 재현:
영성靈聖 생활인生活人의 탄생

이단 기독교와 기독교 이단이 발생하는 근본 원인은 성경 텍스트가 서술하는 '말-씀' 오해에 있다. '말-씀'을 오해하기에 생기는 현상이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기독교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통계청의 2015년 종교 인구 통계에 따르면, 기독교 인구는 1000만 명을 훌쩍 넘는다. 이렇게 많은 기독교 인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예수와 같이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사는 기독교 인구가 얼마나 되는가? 세계 최고의 교세 성장을 자랑하면서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삶을 실천하는 기독교 인구는 얼마나 되는가!

재작년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고,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 종교 행사도 또 한 페이지의 과거 역사로 넘어갔다. 잘 알다시피 '기념과 선언'만으로 새로운 기독교 역사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믿음을 통한 실체 없는 개인 구원과 '남녀차별'의 기독교 전통, 그리고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신학적 용어로 기독교의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로마 시대가 아니다. 낡은 문명과 새 문명의 전환기에 처한 문명사적 시간 속에, 냉전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대척점에 있는 지구촌의 하나뿐인 분단 한국에 사는 기독교인은 새로운 혁명적 결단을 해야 한다.

참다운 기독교인은 참다운 한국인이다. 참다운 한국인이야말로 참다운 지구촌 시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절대 획일화되지 않는 다양성과 포용성을 가지고 각 민족 단위로 복음의 씨가 내려져야 한다. 예수가 만일 "너는 한국인으로서 나의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했는가?"라고 물을 때 기독교인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를 자문자답해 보라. 서구 신학을 통해 배운 신앙으로 '앵무새'와 같은 서구 신학을 통해 배운 영혼 없는 답변을 예수가 기대하겠는가! 절대 아니다.

한국의 기독교인은 한국인이라는 주체적이고 토착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말-씀'을 회복해야 한다. '말-씀'을 체화해서 새로운 기독교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말-씀의 회복은 말(logos)을 쓰는(씀, praxis) 영성靈聖 생활인生活人의 탄생이다.

조직신학회장을 역임한 김흡영은 로고스와 프락시스가 이원론적으로 전개되는 서구 신학의 뿌리 깊은 한계를 지적하며, 로고스(말)와 프락시스(씀)가 일치되는 '도의 신학'을 주장한다. 잘 알다시피 도의 어원적 해석 자체가 머리를 찾아가는 활동이다. 전통 신학에서 태초에 감추어진 비밀이 '성육신 사건'을 통해 나타나고, 예수는 영성시대의 첫 열매가 된다.

이처럼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준 말, 예를 들면 평화·사랑·고난·믿음·은혜·봉사·섬김·구원 등의 근본어로 이루어진 다양한 말 가운데 자기의 말을 찾아야 한다. 그 하나님이 자기에게만 준 말을 '마음의 지성소'에 고이 간직하고, 로고스의 창조적 행위의 참여자(요한복음 1장, 요한1서 1장 참조)로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과 관계성을 맺고 일상생활에서 재현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과 자신의 씀(삶)이 생활 세계에서 개성적인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인 영적인 차원에 뿌리를 박고, 일상생활에서 성스러운 행동을 하는 영성靈聖 생활인生活人으로 거듭나야 한다. 제도 크리스천이 아닌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참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의 향기'를 싱그럽게 뿜어내는 화신체로서 말이다. 말-씀의 회복, 성서 텍스트에 면면히 흐르는 바탕의 말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해서 '사랑'의 화신체, '평화'의 전도사, '청빈'의 섬김이 등으로 거듭나 '기독교인다운 기독교인'을 육성하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영성 생활인이 한반도 삶의 정황에서 평화통일의 주역이 되어 새 문명의 생활 세계를 구현해 실천하는 본보기를 지구촌 사회에 보여 주어야 한다. 또한 이것이 바탕이 되어 인격 성전과 인격 성전이 중첩적이고 다층적으로 연대한 영성 생활 공동체가 지구촌 차원에서 낡은 문명을 혁신하고 새 문명의 생활 세계를 선도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새 시대 한국 기독교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만일 이단 기독교와 기독교 이단를 판별하는 유일한 '이단' 판정의 기준을 만든다면, 기독교 신앙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성경의 황금률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참기독교인을 육성해 내는 종교 조직인가 여부로 규정되어야 한다. 즉 영성 생활인만이 참기독교인이라는 '선포'를 통해 한국 기독교는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이호재 /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중국 종교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자하원 원장이다. 관심 영역은 동서양 종교 사상 연구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의 사유 체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새 축 시대의 영성 생활인'이라는 생활 프로젝트를 세계화하는 데 있다. 주요 저서로는 <포스트 종교운동>(2018), <한밝 변찬린: 한국 종교 사상가>(2017), <인생 지도>(2017)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한국 재래 종교의 '구원'관>, <함석헌의 '새 종교'론의 의미와 남겨진 과제>, <변찬린의 새 교회론 연구> 등 수십 편의 국내외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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