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소녀상. 뉴스앤조이 이은혜

'평화의 소녀상, 독일에서 길을 잃다'(<오마이뉴스> 7월 11일 자) 기사를 접한 국내외 한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디트리히본회퍼교회에서 열기로 한 '평화의 소녀상 임시 전시회'가 한인들 반대로 무산됐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사연을 알고자 유럽에 거주하는 한인 및 현지인 94명이 연명해 해당 교회를 사용하는 한인 교회(S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S교회 이 아무개 목사는 서면 대신 전화 통화를 요청했다. 이 목사가 인터뷰에서 답변한 내용 바탕으로 드러난 사실과 이 일을 추진하며 느꼈던 소회를 첨해 이 글을 쓴다.

독일 역사 정신과 반대된 한인들

소식을 접했을 때, '믿을 수 없다. 부끄럽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나'라는 참담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특히 교회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에 아찔했다. 이 목사는 '이 사안을 모든 교인에게 알리지 않고 추진한 점', '교인들 마음이 일치하지 않은 점'을 언급하며, 사건 책임을 모두 자신에게 돌렸다. "소녀상 전시회가 거부된 이 사례가 앞으로 독일 내에서 소녀상 건립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겠나"라는 질문에, 이 목사는 "전혀 아니다"고 답했다.

그러나 현실을 보건대, 해외에서 소녀상을 전시하거나 건립할 때마다 일본 정부의 집요한 방해 술책으로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2017년 베를린 북부 옛 나치 강제수용소기념관에 선물한 작은 소녀상까지도 기어이 철거하게 만든 일본 아닌가. 이런 일본에 대항할 수 있을까. 진실을 밝히고 기억하려는 사람들과 역사의 과오를 감추려는 일본 정부 사이에서 전쟁 아닌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독일 메르켈 총리와 정부 인사들은 나치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수차례 사과했다. 피해자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계속 사과하겠다고 했다. 8월 1일 독일 외무장관에 이어, 2차 대전이 일어난 지 80주년이 되는 9월 1일에 메르켈 총리는 다시 한번 사과할 예정이라고 한다. 메르켈 총리는 일본과의 정상회담(2015년 3월 9일)에서, 일본도 잘못된 역사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책임지려는 행동은 없고 오로지 자기 탓이라는 이 목사의 반복된 대답은 평신도인 필자가 듣기에 참담했다. "내 탓이오." 얼마나 근사한 말인가. 모든 것을 본인 탓으로 돌리는 숭고한 희생정신에 사람들은 존경과 감탄의 마음을 표할까, 아니면 비겁하게 가장 편한 침묵을 선택했다고 생각할까.

필자는 모든 책임을 목사 한 사람에게만 돌리고 싶지 않다. 이 목사는 교회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고, 몇몇 사람이 반대 의사를 표했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가짜 뉴스를 믿고 '위안부' 문제를 오해해서 좌파·우파를 들먹이며 공격하는 사람들이 교민, 유학생 커뮤니티에 존재한다.

잘못된 과거를 사과하고 기억하는 독일에 살면서도 독일의 정신과 정반대 행동을 하는 한인들, 한인 교인들. 일반적으로 한국인이라면 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소녀상 전시회에 반대하는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대부분의 악행은 선해지거나 악해지기로 결심한 적이 결코 없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이것은 슬픈 현실이다."

이 목사는 "교회 안에서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왜 우리는 역사 앞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는지 먼저 묻고 싶다. 혹여 우리가 하나님 뜻에 앞서 이런저런 다양한 생각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합리화와 핑계로 이번 일을 피해 갈 수 없다. '교회 안에서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되며, 분쟁은 절대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만연하다. 분쟁과 갈등을 두려워하고, 가짜 평안을 강요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교회 내부 사안이 아니다. 공적인 일, 기독교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가 되어 버렸다. 거룩한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이 도리어 세상의 놀림감으로 손가락질을 받게 되는, 역사에서 언급될 우스운 사건이라는 사실을 당사자들이 깨닫기 바란다.

이번 일을 겪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신학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거룩한 평신도가 되기 위해서는 구별된 삶을 드러내도록 삶이 거룩해져야 한다. 우리가 예배하며 배우는 성경은 우리 삶에서 얼마나 드러나고 있을까.

역사의식 부재한 교회들

교회 내 역사의식 부재가 이번 일로 또 드러났다. 한국교회는 세상 온갖 죄악의 선두에 있으면서도, 늘 울부짖으며 자성하고 회개하자고 한다. 그럼에도 왜 바뀌지 않을까. 왜 기독교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나. 예수님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 10:34)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그 시대 사회문제에 맞서 싸우셨고 부조리에 대항하셨다. 역사·사회에 관심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참된 그리스도인일까.

3·1 운동 당시 기독교인 선배들을 기억하라. 진심이 담긴 반성과 성찰이 있었다면, '교회'라는 이름으로 소수·약자를 외면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실천하는 교회에서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자. 솔직해지자. 조금은 용기 있게 잘못을 향해 당당하게 얘기하는 그리스도인이 더 많아져야 한다. 불의에 끝까지 저항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가 걸어온 삶이다.

예수를 닮은 삶, 제자의 삶을 부르짖으며 언제까지 공수표만 날릴 셈인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달라졌는가. 불편과 희생을 감수하고 정의를 지켜 내는지 묻고 싶다. 소녀상은 옳다. 100만 번 생각해도 당연히 옳다. 가짜 뉴스가 아무리 세상을 혼탁하게 할지라도, 단호한 분별력으로 진실을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졌으면 한다. 다시는 한인들이 소녀상 설치를 반대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자국 역사에 대한 슬픔의 상징을 스스로 무시하고 짓밟는 사례는 없다. 그것도 교회에서 반대했다는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서 믿음의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은 더더욱 없어야 한다.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믿음의 선조들을 기억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회복하는 길이 되길 소망하며….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됐던 1226번째 수요 시위 현장.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아래 편지는 S교회 목사와 교인들에게 94명이 연명해서 쓴 편지다. 이 목사는 편지를 교인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편지 수취인은 S교회뿐 아니라, 역사의식 부재 때문에 앞으로 '소녀상 전시회'를 반대할 수도 있는 일부 한인이 될 수 있기에 공개하는 바이다.

S교회에 보내는 메일

존경하는 이 목사님, 그리고 S교회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독일과 프랑스에서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개개인이 모여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평화의 소녀상, 독일에서 길을 잃다'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오마이뉴스(7월 11일 자) 기사를 통해 소녀상 임시 전시회가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 무엇보다, 독일 내 한인들에게 충격과 실망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번 일은 앞으로도 독일 내에서 소녀상 전시 혹은 설치에 있어 안 좋은 선례를 남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희들은 S교회가 임시 전시회를 반대한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자 편지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입장이나 해명 듣기를 정중하게 청합니다.

'평화의 소녀상'의 소녀는 비단 한국인 위안부 할머니들만을 상징하고 있지 않습니다. 위안부의 존재는 역사적인 사실이었고,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알려진 내용만 13개국의 피해국이 있습니다. 단지 한국과 일본이 얽혀 있는 문제가 아닌, '세계'가 기억해야 할 역사인데, 안타깝게도 여타 다른 전쟁 범죄(홀로코스트)와는 달리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도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아모스 5장 24절)는 구절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역사를 진실되게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과 본인들의 거짓말과 만행이 세상에 드러날까 감추기에 급급한 자들.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할까요.

저희가 확인한바, S교회는 '디트리히본회퍼교회'를 예배처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죄의 인식과 고백이 필요하다"(Wir benötigen ein Bewusstsein und Geständnis der Schuld), "정의를 추구하는 자의 기도와 행동"(Beten und Tun des Gerechten)이라는 말씀을 남기신 본회퍼 목사님의 이름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요.

아이러니하게도, 본회퍼와 소녀상은 동시대 사건을 겨냥합니다. 전쟁과 학살, 착취와 폭력으로 점철된 시대를 거쳤던 동서양 당대인들의 비극이 고스란히 서린 상징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S교회의 소녀상 임시 전시회 반대는 독일과 한국의 역사적 접점 하나를 잃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 매우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독일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톨퍼스타인'(Stolpersteine)을 봅니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욕과 굴욕의 역사라고 해도 이를 잊지 않고,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 아닐까요? "우리는 강요에 의해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은 여전히 우리 가슴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로마서 12장 15절)는 성경 말씀처럼, 우리는 그분들의 손을 잡아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또한 약한 자, 병든 자와 함께하신 예수님의 참 뜻을 따르는 길이 아닐는지요.

저희는 S교회 내부의 세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섣부른 평가나 판단은 유보하려 합니다. 저희는 S교회와 성도들을 상처 입히기 위해 이 편지를 드리는 것이 아니며, 정죄하고 비난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편지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함께 마음을 모아 쓴 것이며, 건강한 토론의 장이 마련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되었습니다.

혹여 저희들의 부족한 글재주로 마음이 상하는 일이 없으시길 바라며, 현명하신 목사님과 성도들의 답변을 바라겠습니다.

2019년 7월 23일
이연실(Gerlingen), 전선경(freiburg) 외 92명

우리는 소녀상 문제를 성전 내부의 '우상숭배' 문제로 이해하는 일부 성도님들 시각에 적잖은 실망감을 표합니다. 소녀상은 종교적 숭배용으로 제작된 것도 아니고, 어떤 신비적 영감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역사적 고통과 상처에 대한 우리의 아픈 기억이며,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교회도,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민족과 국가의 역사를 앞세우는 이들보다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요.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전쟁터에 끌려가 학대와 착취를 당하고, 평생을 고통과 상처를 사슬처럼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교회는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예언자 이사야는 참된 금식을 이렇게 외쳤죠. "흉악의 결박을 풀고, 멍에의 줄을 끊고, 피압제자를 자유케 하고, 멍에란 멍에를 다 꺾는 것,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유리걸식 빈민을 집에 들이고, 자신의 골육을 모른 체하지 않는 것"(사 58:6-7)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금식입니다. 한마디로 첫째도 정의롭고, 마지막도 정의로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상숭배라는 특정 가치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고통과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정의로운 동행이라는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사도 바울도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라고 권면했고, "서로 짐을 짊어져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라고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서만 이뤄져야 할 소극적 윤리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는 집단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고, 그분의 말씀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을 당당하게 전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 길은 역사에 대한 침묵으로 달성할 수 없습니다. 역사의 현실과 현장을 외면하면서 어떻게 세상과 교통할 수 있습니까.

믿음은 관념도, 추상도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1:1)이라고 배웠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골백번 말해 봐야 그것은 개인의 고백일 뿐, 공적·객관적으로 입증할 길은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은 무한을 지향합니다. 내 쪽의 계산을 일차적으로 내세우는 사랑이 아니고, 타자의 절규에 귀 기울이는 사랑입니다.

구약, 특히 율법서는 고아·과부·나그네를 환대하라고 명령했지요. 그들의 소리를 외면하지 말고, 그들에게 불의를 행하지 말 것을 강조합니다(출 22:21-23). 한 공동체에서 주변부로 내몰린 사람들을 향한 우리 시선은 차갑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녀상이 대변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바로 고아·과부·나그네와 같은 처지 아닐까요. 우리가 그분들의 역사적 체험과 지나온 인생사, 사회의 무관심 등을 숙고한다면, 과연 '우상숭배'라는 추상명사로 거부할 일인지 심히 개탄스럽습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목사

전선경 / 방사능시대우리가그린내일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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