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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역사 품지 못한 홍정길 목사의 설교

속죄 일변도 복음 이해의 한계, 왜곡된 역사 인식 불러와

남기업   기사승인 2019.08.24  17:4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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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에 신앙을 갖게 된 내가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 설교를 처음 들은 곳은 1993년 여름 충남 태안의 몽산포해수욕장으로 기억한다. 당시 홍 목사를 소개했던 분은 2009년 소천하신 김준곤 목사였다. 그분은 홍정길 목사를 우직하게 걸어가는 '소'에 비유하면서, 한국교회 미래가 홍 목사 어깨에 달렸다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높이 평가했다.

당시 나는 홍정길 목사의 설교에 전율했다. 눈물을 흘리며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 홍정길 목사 설교를 들은 기억이 없다. 그러던 중 며칠 전 8월 11일 남서울은혜교회에서 홍 목사가 설교한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를 보게 됐다. 기사로 접한 그의 설교에 전혀 동의가 되지 않았다. 대체 어떤 설교인가 궁금해, 설교 전문을 찬찬히 읽어 보았다. 마음은 더 무거워졌고, 고민하다가 펜을 들었다.

진정성 있는 설교였지만…

그대로 녹취한 설교문을 읽어 보니, 홍정길 목사가 설교 원고를 작성해 교인들에게 배포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광복절을 앞둔 홍 목사 마음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일 것이다. 한번 듣고 잊어버리지 말고 여러 번 읽어 보라는 뜻이리라. '나라가 이렇게 가면 큰일 나겠구나', '한국교회를 이렇게 두면 안 되겠구나' 위기의식을 안고 강단에 오른 것 같다.

설교 본문도 신명기였다. 신명기는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모세가 출애굽 2세대를 향해 당부한 세 편의 설교로 구성돼 있다. 가나안에 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호소하는, 그러면서 경고하기도 하는 내용으로 채워진 율법서다. 홍정길 목사 마음도 모세와 같았으리라. 적어도 진정성과 간절함은 모세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홍정길 목사. 뉴스앤조이 이용필

그러나 간절함과 진정성이 설교 내용,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홍 목사의 설교 전문을 읽어 보면, 외람되지만 심란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 홍 목사의 설교에서 느껴지는 '복음'은 '민족'과 '역사'를 품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는 게 나의 솔직한 평가다.

홍정길 목사는 문재인 정부의 두 가지를 걱정하는 듯했다. 하나는 일본과의 관계, 다른 하나는 현 정부의 역사 인식이다. 이 둘은 연결되어 있다.

홍 목사는 문재인 정부가 현재 일본과 벌이는 경제 전쟁을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 적어도 전쟁을 하려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처럼 이기는 전쟁을 해야 하고, 백성(국민)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실패한'(?) 동학혁명처럼(적어도 설교에서는 동학혁명을 실패한 운동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무모하고 나라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고 걱정하는 것 같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정책 추진이 그릇된 역사 인식에서 비롯됐다고 단정한다. 현 정권 담당자들이 대한민국 20세기 역사를 실패의 역사, 반칙과 특권의 역사로 본다는 지적이다.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과거를 적폐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치워 버려야 할 적폐"라고.

홍 목사에게 20세기 대한민국은 어떤 역사일까. 기적의 역사다. 한국전쟁에 16개국이 참전한 것도 기적이고, 전쟁의 폐허 더미에서 경제 발전을 이룬 것도 기적이며, 정치적 민주화(자유화)를 달성한 것 역시 기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이 모든 기적과 발전에 정신적 기초를 놓은 곳이 바로 한국교회라고 강조한다. "100만 성도가 1000만 성도로, 5만 9000의 마을마다 교회가 우뚝 서며 나라를 위해 기도"한 결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홍정길 목사의 해법 역시 기도일 수밖에 없다. 역대하 7장 14절을 읽으면서 "비상한 시대"에는 "비상하게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복을 주실 것이며, 우리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인 북핵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기적의 역사'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나도 대한민국 역사를 기적의 역사라고 본다. 홍 목사가 비판하고 걱정하는 것처럼 "빈한한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기적의 역사를 만든 동력이 어디서 왔느냐는 것이다. 나는 아래로부터 일어난 자유를 향한, 정의를 향한 끊임없는 '저항'이 기본 동력이었다고 본다. 그 시초가 홍 목사가 폄훼한 동학혁명이라고 주장한다.

표면상으로 동학혁명은 실패했다. 그러나 역사는 이어 가는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자주성을 확보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신분제를 완전히 철폐하고 골고루 평등하게 잘사는 세상을 형성하고자 분연히 일어선 동학혁명이 있었기에 25년 후 3·1 혁명이 가능했다.

위대한 3·1 혁명의 정신은 4·19 혁명으로, 이는 다시 1970년 11월 13일의 전태일 열사에게로, 전태일 정신은 1980년 오일팔민주화운동으로, 광주의 대동 정신과 항쟁 정신은 1987년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2016년 촛불 혁명도 이를 이어받은 결과다.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자유와 정의를 향한 항쟁의 역사, 프랑스 파리코뮌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윤리성을 품은 빛나는 저항의 역사가 바로 홍 목사가 말한 "찬란한 역사"라고 생각한다.

"그럼 경제 발전은 어떻게?"라고 물을지 모르겠다. 경제 발전도 궁극적으로 정의가 확립된 만큼 가능하다. 성경은 도덕법칙을 말하는 정의와 경제법칙을 말하는 효율은 하나라고 말한다. 정의로울수록 효율적이고 경제가 성장한다는 말이다.

단적인 예로 1950년 3~5월에 단행한 농지개혁을 생각해 보라. 농지개혁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정의로운 개혁 조치임은 분명하다. 정의로운 농지개혁을 통해 소작농이 자영농이 되었고, 교육열에 타올라 유능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었으며, 작은 밑천으로도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과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이 대한민국의 빛나는 산업화는 농지개혁이 성공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정의로움은 무엇인가. 기여한 만큼 가져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자기 생각과 정치적 의사 표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신상필벌의 원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개인의 역량이 최대한 발휘되고 새로운 생각이 바로 시도될 수 있다. 그러면서 경제 발전이라는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다.

경제 발전의 핵심 변수인 기술 발전, 유능한 노동력, 자본축적 등은 정의가 확립될수록, 인권이 존중될수록 가능성이 높아지고 성과가 고르게 분배된다. 이것이 다시 생산적 노력의 자양분이 되는 선순환 구조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현실화는 끊임없는 아래로부터의 요구로, 즉 정의와 자유 실현에 헌신한 사람들과 불의에 희생당한 이들의 고통에 능동적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결론적으로 자유·정의의 요구와 실현이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독재 때문에 경제가 성장한 것이 아니다. 독재인데도 경제가 성장한 것이다. 경제 발전은 박정희처럼 입법·사법·행정을 다 틀어쥐고 말 안 듣는 사람을 방망이로 두들겨 패야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의와 발전은 하나다!

우리 사회에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 것인가. 원인의 원인을 파고들면 결국 친일·독재와 만나게 된다. 해방 후 친일파들은 청산되지 않았고 반공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독재 주체 혹은 적극적 부역자로 변신했다. 한국 사회에서 반칙과 특권의 대명사인 재벌과 거대 언론, 부패한 공권력의 기원을 찾아보면 어김없이 일제에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조직화하고 말과 글로 사람을 설득하고 깨우려 애쓴 사람들, 추수에 대한 소망 없이도 자유와 정의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이 흘린 눈물과 깊은 한숨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고 본다. 이 과정에 소수 기독교인과 다수 비기독교인이 참여했다.

역사를 이렇게 보면 우리가 감사할 대상은 무한정 늘어난다. 하나님께만 감사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다. 중국인들의 감사 대상과 한국인들의 감사 대상은 달라야 하고, 다를 수밖에 없다. 역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동학혁명에서부터 촛불 혁명까지 120년 넘게 이어진 저항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이 감사 대상이다. 그들의 헌신이 내 존재 기반이었다고 고백해야 한다. 그런데 홍 목사의 신앙 체계에는 이런 고백이 들어설 장소가 없어 보인다.

홍정길 목사가 자유화·민주화의 성과를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이것은 자연스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 홍 목사가 아무 두려움 없이 정부를 비판하는 설교를 하는 것도, 사실 비기독교인들이 독재 권력에 목숨을 버려 가며 저항했기에 가능하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비기독교인의 헌신이 '설교의 자유'를 보장해 준 것이다.

축소된 복음 이해가 초래한
역사 왜곡

홍 목사가 말하는 복음은 민족과 역사를 품기에 한계가 너무 크다. 냉정하게 말해서 품지 못할 뿐 아니라 역사를 왜곡하기까지 한다. 하나님나라를 세우려 애쓰는 사람들을 꾸짖는 결과를 초래한다. 왜일까?

나는 그 원인을 구약과 무관한 속죄 일변도 복음 이해에 있다고 본다. 시내산 율법과 선지자 사역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도, '율법의 완성'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하지 않기에 초래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복음이 이렇게 축소되면 율법이 말하는 거룩한 나라(새로운 사회)를 향한 전망을 상실한다. 우리 사회와 역사를 평가하고 대안을 제시해 행동할 입각점을 잃어버리게 된다. 구약 시내산 율법은 거룩한 사회를 지속할 법적 체계다. 율법의 정신과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면 오늘날 우리 사회와 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시 말해, 파편적·분절적으로 인식됐던 우리 역사와 사회적 현실이 하나의 문맥으로 정리되는 일이 벌어진다.

아쉽게도 홍 목사 설교에는 이런 복음의 광대함과 위대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율법의 완성으로 복음을 이해하면 복음의 한가운데에 '정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의는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을 넘어, 강도 만난 사람 도와주는 것을 넘어, 고아와 과부의 수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강도가 안 나오도록 하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그게 바로 정의다. 나아가 율법을 깊이 묵상하면, 정의를 세우는 것이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 관점에서 대한민국 역사를 보면 자유를 향한 쉼 없는 행진, 그 행진에 동참한 무수한 사람의 헌신이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이를 복음으로 넉넉히 품어 안을 수 있으며, 감사하게 된다.

돌고 돌아 결국 복음으로 돌아왔다. 홍 목사가 동학혁명을 폄훼한 것도, 한국전쟁을 극복하고 경제 발전과 정치발전을 동시에 이룬 근인을 신자들의 기도였다고 보는 편협한 시각도, 구약 시내산 율법과 선지자들의 외침을 배제한 복음 이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홍 목사가 (시내산) 율법의 완성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깊이 묵상했다면 기적의 역사, 찬란한 역사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감사 내용도 달랐을 것이다. 당연히 기도와 참회의 내용도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남기업 / 희년함께 공동대표, 토지+자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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