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구나 진실을 알고 있다

2017년 11월 12일 김하나 목사가 명성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면서 명성교회 세습 논란이 본격화되었다. 그로부터 1년 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이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하도 여러 차례 재판이 열리고 판결도 왔다 갔다 한지라, 사건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는 관련 뉴스를 접할수록 피로감이 더해짐을 부정하기 어렵다.

흥미롭게도 이 세습 논란을 놓고 찬반을 다투는 양편 모두 이 사건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교단, 더 나아가 한국교회의 향방을 가르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명성교회를 옹호하는 측은 명성교회가 무너지면 예장통합이 무너지고 예장통합 교단이 무너지면 한국교회가 무너진다고 하고, 반대편에서는 교단에서 이 문제를 확실하게 불법으로 매듭짓는 길만이 명성교회 때문에 실추된 교단 권위를 회복할 마지막 기회라고 주장한다.

이미 이 사건은 개교회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 앞날을 가늠할 중요한 지표로 진화한 것이다. 이 구도에서 김하나 목사는 사건의 청구인이나 피청구인이 아닌, 자신의 운명을 처분 결과에 맡겨야 되는 사건 당사자일 뿐이다. 어쩌면 이러한 상황 때문에 한국교회와 사회 앞에 자신의 입장을 내지 못하고, 조심스레 교회 내부 동요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발언만 하고 있는 듯하다. 이미 오래전 세습 논란이라는 홍역을 겪고 세습에 성공해 무난하게(?) 교회를 끌어가는 유사한 다른 대형 교회와 비교해 본다면 본인 스스로 가혹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2017년 11월 12일 김삼환 원로목사 추대 및 김하나 목사 위임 예식에서 김삼환 목사가 김하나 목사에게 안수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우선은 번거롭지만, 논란의 일지를 정리해 보자. 김하나 목사 위임이 이루어진 후, 서울동남노회비상대책위원회에서 총회 재판국에 위임목사 청빙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이듬해인 2018년 8월 7일 총회 재판국은 청빙이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수치도 절묘한 8:7의 찬성이었다. 교계와 사회에서 이 판결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어나자 서울동남노회비대위는 재심을 청구하고, 예장통합 103회 총회에서는 교단 재판국원 15명을 전원 교체하고, 재심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 재심의 결과가 보도된 대로 8월 5일 청빙 결의 무효 판결이었다.

예장통합 교단 헌법에는 '은퇴하는 목회자의 자녀는 해당 교회의 담임목사가 될 수 없다'는 조항이 있다. 이 조항대로라면 아버지가 담임한 교회를 이어받은 김하나 목사 건은 논란거리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은퇴하는 목회자의 자녀'라고 되어 있기에, '은퇴한' 2년 후에 청빙을 받았으니 세습금지법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장난 같은 논리로 최초 적법 판결이 나왔다.

누구나 진실을 알고 있다. 누가 봐도 명성교회 측 주장이 법적·논리적 타당성을 가지지 못한다. 스스로 논리가 구차하니, 친명성 인사들을 노회에 심고, 힘의 논리, 돈의 논리를 활용하여 우호적 판단을 받고자 한다. 이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이 수십억을 풀어 미자립 교회를 돕겠다는 약속이다. 교회와 사회에 대한 공헌을 들어, 예외와 정상참작을 요구한다. 대기업 비리를 수사하니 "경제도 어려운데"로 시작하는 레퍼토리를 내세워 법의 잣대를 굽게 하는 모습과 매한가지이다.

2. 논란이 진화되면서 드러난 것

그런데 말이다. 2년 가까이 진행되는 이 논란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세습을 하느냐, 막느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좀 더 고약하게 따져 들자면 명성교회로 대표되는 이 땅의 대형 교회들 모습에서 교회의 희망을 거둘 때가 된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사랑의교회를 둘러싼 여러 논란에서도 드러났지만, 명성교회 역시 한국 대형 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들이 고쳐 쓸 만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우려가 점점 현실로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욱 이 명성교회 문제만큼은 곧은 판결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 분열이 생기고 흩어진다면, 교회 수준이 그만큼이기 때문인 것이다. 명성교회가 김삼환 목사나 김하나 목사의 사유물이 아니었다면, 누가 담임목회자가 되더라도 건강한 모습을 회복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려되는 지점은 김 목사 부자나 교회 모두 그 가능성을 조금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 목사 부자나 명성교회가 한국교회나 사회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과 사명 의식이 있다면, 진정으로 한국교회와 사회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겸허하게 생각해 볼 것이다. 명성교회가 이 사회에서 섬으로 존재하는 개교회가 아니라 공교회의 한 구성원이라는 마음이 있다면, 자신들이 내세운 대의명분과 별개로, 다른 대다수 교회와 사회가 반대하고 우려의 눈길을 보내는 것에 대해 한번쯤 스스로 되돌아볼 것이다.

그러나 며칠 전 판결 전후를 비롯해 교회가 지금껏 보여 주고 있는 모습은 처참함 그 자체이다. 어떤 결정이 내려지건 겸허하게 수용하겠다던 명성교회는 청빙 결의가 무효라는 판결이 나자, 바로 180도 입장을 바꾸었다. 김하나 목사는 판결 이튿날 새벽 기도회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 인도하실 줄 믿는다"고 했다. 당연히 상심한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싶지만, 그의 본심은 하나님이 자신들 편이라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는 듯 보인다.

거기에 명성교회 장로회가 내세운 주장은 한술 더 뜬다. "목사의 위임식은 법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번복이 불가한 일"이라며 판결에 불복한 것이다. 급기야는 명성교회와 관련한 목회자 모임에서도 이 사건의 본질이 '입법 미비'에서 비롯된 것으로, '한국 사회와 교회를 더 잘 섬기고 소외된 이들을 더 잘 섬기기 위해 교회가 안정을 찾아야' 한다고 명성교회를 지지하고 나섰다.

3. 염치를 잃어버린 교회

이 사건은 신앙의 이름으로 개교회의 사고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 준 것이다. 그들에게 법이란 것은 중요하지 않다. 판결도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면 애초에 따를 의사가 없었다. 여전히 자신들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내세운 몰상식과 반이성의 향연이다. 그러나 그들은 겉으로 '하나님의 뜻', '섬김', '사회적 약자' 등 고상한 종교적 가치를 내세운다. 자연히 그들 내부의 논리에서는 명성교회 세습에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에 반대하는 것이고, 명성교회가 그간 해 왔던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 그리고 한국교회와 사회의 소외된 계층'을 위한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 된다.

모든 종류의 유려한 종교적 수사와 자기 교회를 동일시하여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는 모습 속에서, 이 땅의 종교가 마땅히 져야 할 사회적 책임에 대한 기초적인 인식조차 없는 실상을 본다. 이게 오늘 10만의 성도를 자랑한다는 한국 대형 교회의 현주소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교회, 염치없는 기독교가 여기저기 판치고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가짜 뉴스를 생성하고 자신들의 굽은 정치적 입장을 토대로 '기독교 지도자 시국 선언'입네, '애국'입네 하는 부끄러움조차 모르고 해 대는 그 모습이 오늘 한국교회의 실상이다.

지금껏 행보로 보건대 명성교회는 앞으로도 자신들을 성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최소한의 염치를 안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란다고 기도할 수 없다. 정말 염치가 있다면 일련의 사건을 통해 돌아봐야 할 점이 무엇인가 성찰하고, 기도해 보자고 했어야 한다. 개교회 욕망을 채우기 위해 빚어진 이 사건으로 한국교회와 사회 전체에 끼친 피해를 재를 뒤집어쓰고 사죄해야 함에도, 여전히 자신들과 하나님의 뜻을 동일시하는 염치없음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아니라, 돈과 힘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힘을 의지하여 집요하게 반전을 꾀하는 것이다.

이에, 나는 남아 있을지 모를 한 치의 염치가 존재하는지 묻고 싶다. 명성교회가 무너지면 한국교회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명성교회로 인해 한국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명성교회가 가진 맘몬의 힘이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한국교회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 현실을 자신들만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명성교회 예배당.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 일어났지만, 그 실질적인 예후는 이미 150년 전에 나타났다. 1379년부터 1417년까지 40년간 서유럽 가톨릭교회에는 2인 또는 3인의 대립 교황들이 생겨나 교회 대분열이 발생했다. 각각의 세속적 욕망이 천년을 유지해 온 하나의 교회를 분열시켰다. 대립 교황들과 각각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콘스탄츠공의회(1414~1418)에서 이 대립 교황들이 모두 폐위되고 이탈리아 사람인 새로운 교황 마르티네스 5세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미 교황이 유럽에서 지녔던 상징적·실질적 권위와 권한은 돌이킬 수 없게 훼손되었다.

그 후 신임 교황을 필두로 이후 교황들은 스스로를 유럽 전역에 종교적 책임을 지는 자로 인식하기보다는, 로마와 이탈리아반도 내에서 세속 군주처럼 자기만의 소왕국을 확장해 나가는 데 골몰하게 된다. 그 결과로 종교개혁이 발생했다. 교황은 살길을 찾아 골몰했지만, 그 길은 교회가 죽는 길이었다.

4. 역사 앞에서의 성찰

역사는 무심히도 반복된다. 중세 말 종교적 상황이 처참했던 것은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고 세속화되어 자신들의 왕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콘스탄츠공의회에서 개혁가 얀 후스와 존 위클리프에게 이단의 누명을 씌우고 화형하고 부관참시하였다. 중세 말 가톨릭교회는 개혁가들을 이단으로 몰려 죽이는 것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교회가 사회 속에서 감당할 책임에 대한 고민을 방기하고, 교회 개혁 요구를 이단으로 몰아가고, 교회와 사회를 서로 적대적 관계로 대립시키는 것은 책임 있는 종교가 할 일이 아니다. 이것이 경악스러운 것은 이런 극단의 대립 구도를 설정하여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주로 이단 사이비들이 해 왔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집단성으로 똘똘 뭉쳐 자신들만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인식이 있지 않고서야 이런 발상이 나올 수 없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미 수많은 교회가 세습한 상황에서 명성교회나 김하나 목사 입장에서는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들이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은 자신들이 이 시대 공교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이라는 사실이다. 공교회로서의 책임은 거금을 풀어 미자립 교회를 돕거나, 사회적 약자를 돕는 행위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역사 앞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교회 모습이 무엇인지 겸허하게 듣고 성찰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종교마저 욕망으로 치환될 수 있는 시대이기에, 최소한의 안전장치로서 부자간 교회 세습을 금지했다면 그 취지를 수용해야 마땅하다. 그것조차 수용하지 못하고 무슨 사회적 기여를 말할 수 있겠는가!

역사의식을 상실한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자신들의 밥그릇이자 기득권임을 세상은 안다. 김하나 목사가 아니고서는 명성교회가 도저히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다면, 교회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음을 회개해야 마땅할 일이다. 그 외의 다른 목적 때문이라면, 이권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게 정직할 것이다.

가정하여, 김하나 목사가 교단의 법적 판단을 거쳐 담임목사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된다면 명성교회는 공언한 대로 한국교회와 사회에 기여하는 조직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믿고 싶겠지만 쉽게 동의되지 않는다. 이 일련의 사건에서 명성교회 김 목사 부자와 당회원들과 구성원들은 조금도 한국교회와 사회의 진심 어린 우려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를 뒤흔드는 악한 세력과의 싸움이라는 구도를 설정하고 똘똘 뭉쳤을 뿐이다. 이러한 극도의 개교회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순수한 사회 공헌을 기대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지금껏 분명해진 것은 명성교회 사건은 교회 세습 문제를 넘어, 명성교회라는 조직이 한국 사회에서 어떠한 사회적 기여나 책임도 지지 않으며, 그럴 의지가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돈 수십억, 아니 수백억을 미자립 교회나 사회 소외 계층을 위해 쓴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와 사회를 위한 공헌이라고 받아 줄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이는 사회적 약자를 볼모로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겠다는 염치없는 발상일 뿐이다. 집합체로서 명성교회는 사회 속의 건전한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포기했다. 힘이 있으면 법도 무력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여전히 그들을 추동하고 있다.

5. 나가며 – 김하나 목사에게

아마, 이 논란 속에서 제일 곤혹스러운 이는 김하나 목사일 것이다. 그가 명성교회를 승계하지 않았다면 훨씬 주도적으로 행복하게, 즐겁게 목회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를 아버지가 개척한 교회로 올 수밖에 없게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소모적으로 흘러가는 이 상황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그의 결단이 아닐까 싶다. 아버지 뒤에, 교회 뒤에, 장로들 뒤에, 교단 재판 뒤에 숨지 말고 자신이 입장을 밝혀야 한다.

<No 데이팅>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조슈아 해리스가 대형 교회 담임목사직을 여러 해 전에 사임하고 가정사의 아픔을 겪고, 이제는 기독교 신앙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져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삶에 대해 여러 평가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 잘못을 진솔하게 사과하는 모습과 현재의 삶과 신앙적 고민 앞에 진실한 자기 고백을 한 것을 놓고 응원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8월 5일 자정께 명성교회의 김하나 목사 청빙 결의 무효 판결이 나오자, 김하나 목사는 6일 새벽 기도회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고 주님 뜻대로 인도할 줄 믿는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김하나 목사가 이 상황에서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이 논란의 결과에 대한 궁극적 책임은 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나는 그가 누구보다 이 상황을 고민하며 지켜보고 있다고 믿는다. 그의 진심이 그가 공헌하고자 하는 한국교회와 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그 목회는 행복하기 힘들 것이다. 아니면, 그 목회는 한국교회를 품는 것이라기보다 명성교회 내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자연히, 그 안의 구성원들도 개교회를 넘어선 한국교회와 사회 전체를 고민하며 섬기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소위 세습에 성공한 대형 교회들이 우리 사회 속에서 뚝 떨어져 나와 섬처럼 자리하는 모습을 많이 보고 있다. 김하나 목사가 원하는 모습이 그런 것일까?

김하나 목사가 목회와 신학 여정에서 수없이 들었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사의식을 곱씹어 보길 감히 권해 본다. '큰 교회가 큰 십자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게 십자가의 길이다. 그 길은 자기를 내려놓는 길이다. 역사가 기억하는 이들은 실은 주변부에서, 변방에서, 스스로 낮아져서 묵묵히 그리스도의 비움과 희생을 실천했던 이들이다. 김하나 목사가 스스로 내려놓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이는 명성교회의 무너짐이 아니라, 한국교회 회생의 청신호가 될 것이다.

그 역사의 권고를 외면한다면, 명성교회와 김하나 목사는 더 이상 한국교회와 사회라는 단어와는 조화되지 못할 것이다. 그 내부는 선택받은 교회와 악한 세상이라는 이분법이 지배하는 이 사회 속의 외딴 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 살아가는 이들은 이 사회 속에 조화되는 건전한 의식을 지닌 시민은 될 수 없다. 이것이 심판이 아니라면 무엇이 심판이겠는가.

최종원 /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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