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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기독교의 자립과 일치를 구현한 20세기 전반 아시아 기독교의 얼굴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⑭] V. S. 아자리아 - YMCA·1910 에든버러 선교 대회·성공회 주교·'인도' 기독교

이재근   기사승인 2019.08.14  14: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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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종교는 세상에서 가장 역동적인 요소 중 하나다. 이 종교는 언제나 강하고 견고한 경계들을 무너뜨린다. 이 종교는 특정 인종, 계급, 혹은 카스트에만 국한되기를 거부한다. 이 모두를 껴안으려 한다."1)

인도인 최초의 성공회 주교이자, 1864년에 나이지리아의 주교가 되었던 새뮤얼 아자이 크라우더(Samuel Ajayi Crowther, 1809~1891)에 이어, 영국인이 아닌 인물로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성공회 주교가 된 베다나야감 새뮤얼 아자리아(Vedanayagam Samuel Azariah, 1874~1945)가 1932년에 남긴 말이다. V. S. 아자리아는 한국 기독교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2) 기독교 주류 역사가 팔레스타인과 로마제국을 거쳐 주로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데다, 신자 수와 영향력 면에서 지난 수백 년간 기독교 세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던 이들이 서양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유럽과 북미 기독교인이 아닌 인도인이 한국 기독교인에게 알려지기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선교 운동 및 범세계 기독교 조직을 통해 광범위한 세계와 오래도록 교류해 온 서양 기독교인에 비해, 한국 기독교인은 주류 서양 세계를 제외하고는, 한국 바깥의 기독교 상황과 접할 기회도, 의지도 사실상 없었다. 이 점에서 한국 기독교인이 아자리아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21세기가 약 20년이나 훌쩍 넘은 이 시점에도 여전히 세계 기독교를 서양 중심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문제다. 근래에 널리 알려졌듯,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 기독교의 중심은 더 이상 서양이 아니다. 기독교인 수에서 비서양 지역 기독교인은 유럽과 북미, 오세아니아의 전통적인 백인 기독교인 수를 압도적으로 뛰어넘었다. 전도와 선교, 사회봉사 등, 기독교인의 활력과 에너지를 보여 주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헌신자들 수에서도 이제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기독교인이 서양 기독교인보다 많다. 서양 세계 주류 언론이 포착하는 현장에서 소외되어서 노출 빈도가 낮을 뿐이지,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하는 이들이 세계 곳곳에 포진해 있다. 에큐메니컬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 심지어 로마 가톨릭 세계를 막론하고, 오늘날 수시로 전 세계 규모로 열리는 주요 기독교 대회 참여자 비율을 보면, 이제 기독교의 세계성은 확실한 실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대회 강사 및 임원진이 서양인 일변도로 구성되던 과거는 지나간 유산이다. 백인이 아닌 다른 세계 기독교인이 기독교 역사 중심부로 진입하는 현상이 20세기 후반 이후 점점 뚜렷해졌다. 21세기 기독교는 역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세계'(global, world) 종교가 되었다.

V. S. 아자리아는 기독교가 서양인, 백인, 특정 계급, 특정 카스트만의 종교가 아니라, 전 세계, 전 인종, 전 민족, 전 계층에 보편적으로 주어진 선물임을 실존으로 구현한 인물이었다. 이런 실재가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저 성경에 나오는 문자 속에서만 나오는 가상현실과 다름없던 20세기 초반, 즉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이전 시기에, 기독교의 초월성과 보편성, 세계성, 다원성, 토착성을 존재와 믿음과 실천과 삶으로 구체화한 인물 중 하나였다. 20세기 전반기 세계 기독교의 대표자 중 하나인 인도 사람 아자리아를 대변하는 네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YMCA △1910 에든버러 선교 대회 △성공회 주교 △'인도' 기독교.

베다나야감 새뮤얼 아자리아 주교.

1. YMCA
- 모트 네트워크(the Mott Network)와 셔우드 에디

아자리아는 1874년 8월 17일에 인도 최남부 틴네벨리(Tinnevelly, 오늘날의 티루넬벨리) 지역 벨라란빌라이(Vellalanvilai) 마을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인도 남부 타밀어 사용 지역의 하위 카스트 중 하나인 나다르(Nadars) 계급에 속했다. 카스트제도 바깥에 위치할 정도로 비천한 취급을 받는 불가촉천민[the untouchables, 혹은 달리트(Dalits)]보다는 우월한 계층이었으나, 나다르 계급 역시 카스트제도 최하층민으로, 사회에서 가장 고된 일을 하면서 멸시받는 것은 달리트와 마찬가지였다. 타밀어 지역인 메그나나푸람에 성공회 복음주의 선교회인 교회선교회(CMS, 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 웨일스인 선교사 존 토머스(John Thomas, 1808~1870)가 1838년 도착했다. 그는 소속 선교회의 선구적 신학자이자 행정가 헨리 벤(Henry Venn, 1796~1873)이 제창한 삼자三自 원리에 따라 지역 선교를 펼쳤다. 한국 장로회 선교사들이 1890년 이후 활용하게 되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 삼자 원리는 성공회 교회선교회 헨리 벤과 미국해외선교회(ABCFM)의 루푸스 앤더슨(1796~1880)이 외부 선교사의 통제를 벗어나 자전, 자치, 자립하는 현지 '토착' 교회(indigenous church) 건설을 선교의 목표라 주장하며 유명해졌다. 이 원리를 실제로 성공적으로 적용한 선교 현장은 20세기 중반까지도 그리 많지 않았다.3)

토머스는 벤의 원리를 인도 현장에 맞게 잘 적용했다. 윌리엄 캐리 시대 이후 초기 인도 선교 전략은 주로 상류 카스트층을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전략이 별로 성공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 후부터, 선교사들은 인도의 소외된 계층민들에게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토머스는 이런 계층에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양육하며 현지인 목회자로 안수하는 일에도 전력했다. 즉, 그가 인도에 온 1838년 이후 8년이 지난 1846년에도 틴네벨리 지방에는 18명 교역자 중 인도인은 1명뿐이었다. 서양에서와 마찬가지로, 체계적인 신학 훈련과 영어, 히브리어, 그리스어를 강도 높게 이수해야 목회자 자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머스는 인구 다수가 글조차 읽을 줄 모르는 하위 카스트 인도인을 목양하는 사역자에게 과도한 학업 성취 기준은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신앙이 확실하고 지적 재능이 있는 현지인을 선발하여 현지어로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교육을 시키고 안수를 주었다. 이로써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870년에는 수백 개 교회가 세워지고, 그들 다수가 자전, 자치, 자립하는 교회가 되었다. 아자리아 아버지도 토머스가 1869년에 안수를 준 인도 사역자 31명 중 하나였다.4)

아자리아가 물려받은 아버지의 이름 베다나야감(Bedanayagam)은 각각 '성경'과 '주인'을 의미하는 두 힌두어 단어를 조합해 만든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성공회 사제로 안수받은 지 5년 후에 태어난 V. S. 아자리아는 부모에게서 어린 시절부터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교육을 충실히 받아, 그 유산을 일평생 유지했다. 아자리아는 잉글랜드국교회(성공회)가 틴네베리에 세운 교회선교회칼리지(Church Missionary College)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한 후, 19살에는 스코틀랜드국교회(장로회)가 세운 마드라스크리스천칼리지(Madras Christian College)에서 대학 과정을 밟았다. 그는 중고등학생 시절에 이미 기독교형제애협회(Christian Brotherhood Association) 설립에 참여해, 인도 사회를 얽어매고 있던 카스트제도의 악습에 저항하는 정신을 과시했다. 그런 아자리아가 대도시 마드라스에 위치한 대학에서 경험한 그의 인생 최대의 전환점은 YMCA와의 만남이었다.5)

1844년에 영국에서 산업화와 도시화에 맞닥뜨린 젊은이들을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사회적으로, 신앙적으로 돕기 위해 탄생한 YMCA는 19세기 전인적(holistic) 세계 선교 운동의 일부로 세계 각지에 전파되었다. 인도에는 YMCA가 1890년에 소개되었는데, 아자리아가 1893년에 마드라스크리스천칼리지에 입학할 당시는 YMCA가 젊은 인도 기독교인 사이에서 막 영향력을 얻기 시작한 때였다. 대학에서 YMCA를 만난 아자리아는 기도, 성경 공부, 노방전도 등, (오늘날의 YMCA는 외면하는 요소이지만) 초기 YMCA가 중시했던 활동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즉, 육체, 지성, 사회성, 영성을 고루 강조한 YMCA의 활동 중 영적인 면이 아자리아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가 얼마나 이 활동에 몰두했던지, 이 때문에 심각하게 아프게 된 나머지 대학 마지막 수학 시험에 참석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결과 아자리아는 대학 학위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YMCA 활동은 그에게 인도 기독 지성 사회뿐 아니라,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불러일으키고, 세계의 문을 열어 주는 통로가 되었다.6)

아자리아가 일평생 집중하게 되는 목회자로서의 방향성은 그가 1895년부터 1909년까지 14년간 YMCA에서 전임 활동가로 활약하면서 구체화되었다. 우선, 그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1차 소명에 충실했다. 대학을 떠난 지 1년 후인 1897년에만 인도 전역 3465마일(5576km)을 다니며 무려 126차례나 연설하며 기독교와 YMCA 활동을 소개했다. 주로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니면서 벌인 이런 활동에는 연설과 설교, 성경 공부, 기도회, 독서회, 토론, 강연, 콘서트, 스포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YMCA 활동의 두 번째 방향성은 그가 인도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인식한 카스트제도와의 싸움이었다. 아자리아는 중상류층이 아니라는 이유로 힌두교 사원에도 들어갈 수 없었던 나다르 카스트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 복음이 인종과 민족, 카스트 등의 모든 사회 조건을 초월하여 모든 이를 구원과 해방으로 부르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좋은 소식이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또한 그는 기독교가 모두가 죄인인 인간을 차별 없이 구원으로 초청한다는 점 외에도, 당대 기독교 선교회들의 활약으로 하층민도 신분 상승, 교육, 의료, 고용, 부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기에, 이 역시 카스트의 경계를 허무는 방편이 되었다는 점도 강조했다.7)

그러나 YMCA가 아자리아에게 준 가장 특별한 기회는 활동 무대를 전 세계로 둔 저명한 세계적 기독교인과의 교제권에 그를 편입시킨 것이었다. YMCA와 학생자원운동(SVM, Student Volunteer Movement), 세계학생기독연맹(WSCF, World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을 통해 전 세계 개신교인을 하나로 묶는 네트워크의 실무 책임자로서, 당대에 가장 저명한 기독교인 중 하나였던 존 모트(John R. Mott, 1865~1955)8)가 그 교제권의 중심인물이었다. 아자리아는 대학 3학년 시절이던 1896년에 이미 모트를 캘커타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모트는 YMCA 대학 총무이자 SVM 책임자로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이후 모트는 1910년 에든버러 세계 선교 대회에 아자리아를 초청해서 연설하는 기회를 주고, 인도를 방문할 때마다 그가 강연자와 주빈으로 참여하는 대회에 아자리아를 동반했다. 모트 네트워크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당시로는 세계 개신교계 중심부 인물이 된다는 뜻이었다. 아자리아는 의도적으로 세계 무대 중심부에 서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지만, 그의 성실성과 재능, 상징성에 깊은 인상을 받은 모트는 첫 만남 이후부터 아자리아가 새로 부상한 '세계' 기독교 시대에 큰 역할을 감당할 만한 재목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9)

모트가 아자리아의 대부 역할을 했다면, 모트를 중심으로 편성된 YMCA 네트워크의 일원으로서 아자리아에게 진정한 친구 역할을 한 인물은 셔우드 에디(Sherwood Eddy, 1871~1963)였다. 예일대학을 나온 엘리트 지식인이었지만 D. L. 무디의 노스필드 대회에 참여한 후 선교에 헌신하게 된 에디는 미국에서 SVM과 YMCA 사역자로 활동하다가,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1896년부터 YMCA와 SVM 활동 책임자로 인도에서 사역했다. 아자리아와 에디의 관계는 당시에 거의 보기 힘들었던 백인과 비백인 간 평등하고 신뢰 가득한 우정의 모범이었다. 특히 인도 안에서도 카스트제도 때문에 상류계급에게서 차별받는 일이 일상이었던 아자리아에게 에디는 제국주의 시대에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백인종으로서 인종적, 문화적 우월의식 없이 순수하게 유색인종과 평등한 우정을 쌓을 수 있음을 보여 준 특별한 친구였다. 에디에게 아자리아는 기독교인으로서 삶의 모범과 제자도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서양 세계 바깥의 인물이자, 그 어떤 미국인도 따를 수 없는 헌신된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거리 전도, 시골 마을 전도, 독서 토론회에 함께 참여했고, 미국 부흥사 찰스 피니 전기를 타밀어로 같이 쓰기도 했으며, 피니의 책을 함께 타밀어로 번역하기도 했다.10)

1910 에든버러 세계 선교 대회 현장.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2. 1910 에든버러 선교 대회

YMCA 활동을 통해 국제 네트워크 일원이 된 아자리아가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1910년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 선교 대회에서의 활약이었다. 1910년 대회 한 해 전인 1909년에 아자리아는 YMCA를 사임하고, 자신이 직접 세운 두 인도인 선교회 중 하나인 틴네벨리인도인선교회(Indian Missionary Society of Tinnevelly)의 활동 지역인 도르나칼(Dornakal) 지역 책임선교사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인도 사람을 제외한 거의 누구도 몰랐던 이름이지만, 이때 이후 아자리아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명이 되는 도르나칼은 기독교인도 거의 없고, 교육받은 이도 거의 없는 가난한 농민들이 사는 시골 지역이었다. 특히 이 지역은 인도 남부의 주요 언어인 타밀어가 아니라, 텔루구어(Telugu)를 사용하는 지역으로, 사방에서 호랑이 등 야생동물들이 출몰하는 데다, 정해진 길도 없는 정글이었다. 이 지역으로 선교사로 자원해 들어간 얼마 후 12월에 아자리아는 마드라스의 성공회 주교 헨리 화이트헤드(Henry Whitehead, 1853~1947)를 보좌하는 사제로 안수를 받았다. 헨리 화이트헤드는 유명한 영국 철학자 알프레드 화이트헤드(1861~1947)의 형으로, 성공회 및 제국 정치 무대에서 영향력이 큰 성공회 고교회파 성직자였다. 그러나 배경과는 달리 복음주의 선교사들과도 잘 지냈고, 인도인 사역자 발굴과 인도 교회 자립에도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11)

아자리아의 에든버러 대회 참여는 그가 도르나칼의 정글에서 천막을 치고 살면서, 걷거나 수레를 타고 마을을 심방하며 사역하던 초기에 얼마간 출장을 다녀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에든버러 방문에서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주목할 만하다. 하나는 에든버러로 가는 여정 중에 그와 동행했던 이사벨 화이트헤드 여사, 즉 헨리 화이트헤드 주교의 부인과 관련된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 그의 에든버러 명연설에 관한 것이다.

화이트헤드 부인은 남편만큼이나 기질이 강했던 여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아자리아를 대한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먼저, 화이트헤드 부인은 아자리아가 이른 시일 안에 인도인 주교로 선임될 만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남편보다도 더 먼저, 더 분명하게 가졌던 것 같다. 이 점에서 이사벨은 인도인은 아직은 주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다른 많은 고답적인 서양인들보다는 유연하고 열린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 식민주의 시대 서양인의 전형적인 인종적 우월감과 타문화에 대한 둔감함을 이사벨 또한 분명히 드러냈다. 예컨대, 화이트헤드 부인은 인도 남부에서 스코틀랜드로 가는 여정 내내 아자리아에게 터번을 쓰고 인도 전통 복장을 하라고 압박했다. 이를 이사벨이 아자리아에게 인도인 정체성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히 드러내라고 요구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아자리아는 그 요구를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다. 그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인이 된 이후 늘 일상적인 서양식 복장을 했다. 이는 서양 문명에 대한 사대주의가 아니었다. 인도 카스트제도하에서는 신분에 따라 입는 복장이 달랐기 때문에, 그는 그의 열등한 계급을 대변하는 차별과 구별의 상징인 인도 전통 복장을 입기를 거부한 것이다. 불가촉천민과 하위 카스트 출신 인도인에게는 평범한 서양식 복장이 오랜 시간 억압받고 차별받은 사회구조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하기도 했기 때문이다.12)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세계 개신교 선교를 종합적으로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미래로 나아갈 이정표를 제시할 대회로 기획된 1910 에든버러 세계 선교 대회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교 대회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 대회 이후 교파별로, 국가별로, 선교회별로 분열되어 전적으로 각개전투식 경쟁 선교에 매진하던 개신교 선교 운동에 일종의 통일성이 부여되고, 연합 운동으로서 에큐메니컬 운동이 태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이 대회는 거의 처음으로 세계 기독교에서 서양인이 아닌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대회다. 출간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참석한 전체 1215명 중에서 비서양 신생 교회(younger churches)에서 온 대표는 총 19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빈약한 숫자에도, 대회장 미국인 모트와 영국인 J. H. 올덤(Joseph Houldsworth Oldham, 1874~1969)의 배려로, 이들은 상당히 정중한 대접을 받고 대회에서도 연설과 토론 진행 등 의미 있는 공헌을 했다. 이 중 아자리아의 연설은 이후 기독교계의 진보에 기여한 연설로 두고두고 회자된다. 인도에 있던 선교사들과 YMCA 지도부 인사들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아자리아는 대회에서 두 차례 연설했다. 첫 연설은 6월 15일에 열린 제1분과위원회에서였다. 여기서 그는 인도는 다른 나라보다는 서양 교회의 관심을 많이 받은 지역이기는 하지만, 인구수에 비하면 여전히 선교사나 기독교인이 전혀 없는 지역이 너무나도 많다며, 상상과는 달리 실제로는 경시된 대륙 인도에 선교 노력을 더 기울여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 짧은 연설은 이후 거의 기억되거나 인용되지 않는다. 두 번째 했던 연설의 강렬함 때문이다.13)

두 번째 연설은 대회 공식 회의가 아니라, 6월 20일에 있었던 저녁 모임에서 40분이라는 긴 시간을 할당받은 상황에서 덜 형식적이고 경건한 강연 같은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아자리아는 외국인 사역자와 현지인 사역자 사이, 즉 서로 다른 인종 간 협력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상호 이해의 괴리와 닫힌 태도, 진정한 우정과 교제의 결핍 등을 지적했다. 특히 선교사와 현지인 간 돈 문제, 즉 선교사는 돈을 주고 현지인은 돈을 받기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상하 관계를 언급했다. 결국 인종 차이, 경제력 차이, 주도권 차이가 만든 계급의식이 선교사와 현지인을 그리스도 안의 한 형제요 친구라고 여기게 하기보다는, 고용인과 피고용인, 부모와 자식, 선임과 후임 관계로 만들어서, 참된 기독교 정신을 파괴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에베소서 3장 18-19절과 고린도전서 13장을 활용한 연설의 정점은 이 주제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 직접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넘치는 부요함은 잉글랜드인, 미국인, (유럽 - 역자 주) 대륙인에 의해서만, 그리고 일본인, 중국인, 인도인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일하고, 모두가 함께 예배하고, 모두가 함께 우리 주 그리스도의 완전한 형상을 배움으로써 온전히 실현될 수 있습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가 충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든 성도와 함께' 할 때입니다. 이것은 두 인종 간의 영적 우정으로만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배우고, 서로 돕고자 해야만 합니다.

앞으로 올 모든 세대 내내 인도 교회는 선교 단체의 영웅적인 노력과 자기 부인의 수고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일어설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질로 가난한 자들을 먹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또한 사랑도 요청합니다. 우리에게 친구를 주십시오!"14)

후에 나온 기록들에 의하면, 이 연설은 청중에게 "폭탄 같은 충격"과 "전기 같은 침묵"을 주었다. 어떤 이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분노했다.15) 실제로 이후의 서양 선교사들이 선교 및 현지인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데 이 연설이 특별한 기여를 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서양 기독교인들이 우쭐거리면서 놀던 놀이터에 아시아인 한 사람이 폭탄을 던져, 그들의 양심에 어느 정도 상처를 입힌 것만은 분명하다.

터번을 쓰고 있는 아자리아(왼쪽). 아자리아는 1912년 12월 29일 주교가 됐다(오른쪽).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3. 성공회 주교

전 세계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인 역사상 최고의 중심부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아지리아는 다시 오지 중의 오지 도르나칼로 돌아갔다. 화이트헤드 주교 부부는 1909년에 아자리아를 부제로 안수할 때부터 머지않은 때에 그를 첫 인도인 주교로 안수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준비되었다는 것을 확신한 화이트헤드 주교는 인도 주재 성공회 주교들과 협의하여 그를 첫 인도인 주교로 안수하기로 결의했다. 서임식은 1912년 12월 29일에 캘커타에서 열렸고, 그는 인도인 사역자 6명, 교인 8000명이 거주하는 신생 도르나칼주교구의 주교로 부임했다.16)

그의 주교 서임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당연히 있었다. 잉글랜드에서는 국회의원을 포함한 일부 사람들이 백인이 포함된 교구에 인도인 주교를 세우면 안 된다는 인종주의적 비판을 제기했다. 대체로 영국인을 포함한 백인들은 아직 인도 교회가 독립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며 아자리아의 주교 서임을 반대했다. 반대는 인도 국내에서도 있었다. 도르나칼이 텔루구어 사용 지역이었기 때문에, 타밀어 지역 출신인 아자리아가 주교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카스트 상위 계급 출신 인도 기독교인은 신분이 낮은 나다르 배경의 아자리아가 성공회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인도인이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기도 했다. 성공회가 아닌 다른 교파 신자와 선교사들은 아자리아의 주교 서임으로 성공회가 인도 개신교계에서 더 강한 주도권을 갖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했다.17) 그러나 이런 우려 대부분은 기우로 증명되었다. 그가 도르나칼 주교가 된 지 18년이 지난 1930년에 도르나칼 지역 성공회 교인은 10만 명 이상으로, 서임 당시 8000명의 10배를 훌쩍 뛰어넘었다. 인도인 사역자를 세우고 지원하는 일뿐만 아니라, 주교구 내 영국인 및 미국인 사역자들을 감독하고 이들과 관계하며, 새로 설립된 주교구 조직을 체계화하고 개혁한 점에서도 그는 모범적이었다.18)

4. '인도' 기독교

이미 언급한 대로, 근대 인도에서 진정한 의미의 '인도' 기독교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아자리아의 공헌은 지대한데, 그의 이상은 이미 YMCA 시절(1895~1909)에 얼개를 갖추었다. 사제로 안수 받기 이전에 벌써 그는 인도인이 주도하는 두 선교회를 설립했다. '인도 기독교는 인도인의 손으로!'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첫 시도이자, 그의 이후 사역을 특징지은 원칙이 시도된 출발점이었다. YMCA 사역자로 활동하던 1903년에 틴네벨리인도인선교회(Indian Missionary Society of Tinnevelly)를 설립했고, 2년 후에는 전국선교회(National Missionary Society)를 세웠다. 두 번째 선교회 모토가 이들 선교회의 설립 정신을 잘 반영한다. '인도인의 돈, 인도 사람, 인도인의 운영.' 그가 설립한 이 선교회들이 영국이나 미국 등 서양 선교사들 활동에 반대하고, 그들이 떠나야 한다는 '선교 모라토리엄'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다만 미래의 인도 교회는 서양인이 아닌 인도인이 스스로 전하고 다스리고 운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하자면, 이미 선배 서양 선교사들이 주창하고 일부 실천했던 지극히 성경적인 삼자 원리에 충실하려 했던 것뿐이다.19)

1910년 에든버러 대회에서 그가 연설한 내용도 인도 교회와 교인을 대하는 선교사들의 왜곡된 우월감에 대한 비판이었고, 그 해결책이 진정한 친구 됨의 우정 회복이었다. 이는 작위적 결정이나 판단, 세속 사상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참된 기독교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권위와 지도권을 인도 현지인에게 이양하는 문제도 이 진정한 친구 됨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서양 선교사가 인도 토착 기독교인을 자신들과 동등한 형제와 친구로 인정하고 신뢰하며 사랑한다면, 기득권을 내려놓는 일이 훨씬 쉬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도르나칼 주교가 되고 난 후 주교구에서 아자리아가 한 목회는 일견 전형적인 성공회 주교의 목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전형적인 사역에도, 인도인인 그가 인도 문화 속에서 인도인, 특히 카스트 하층의 가난하고 무지한 인도인을 대상으로 목회한다는 점에서 '인도성'(being an Indian)이 곳곳에 묻어났다. 예컨대, 성례의 의미가 인도에서는 다른 나라에서와는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글을 읽을 줄 몰라 세례나 견진을 받기 위한 교리문답을 제대로 숙지할 수 없는 다수 신자들에게, 마치 종교개혁 시대의 마르틴 루터가 그랬듯, 그는 이 교리들을 노래로 가르쳤다. 사도신경과 십계명, 주기도문을 외우기 쉽고 단순한 가사로 바꾸고, 그 위에 음률을 입힌 것이다. 초기 선교지 한국에서 이름 없던 여성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를 받으며 인생 처음으로 이름을 갖게 되었듯, 카스트 하층민으로 태어나서 자신을 비하하는 이름을 가졌던 이들이 세례 후 원이름 대신 성경 이름으로 새 이름을 받았다. 흐르는 냇물 속에서 세례를 받은 이들은 옛 카스트의 신분과 악습과 공포와 자기 비하가 세례의 물을 통해 완전히 씻겨 내려가고, 새롭게 된 자아로 거듭났다는 환희에 자주 휩싸였다. 성찬도 마찬가지 의미가 있었다. 서로 다른 카스트에 속한 이들과는 함께 식사하지 않는 인도 문화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같은 상 위에서 나누고, 이어서 함께 식사하는 성찬 의식은 카스트제도를 넘어서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하나님나라의 잔치였다.20)

아자리아는 교회 연합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주교가 된 지 7년째인 1919년에 그는 트란케바르에서 열린 인도인 교역자 대회에 참석했다. 그와 남인도연합교회(South India United Church)의 베담 산티아고(Vedam Santiago) 목사가 남인도 내 모든 개신교 교파에 문건을 보내, "우리는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약하다. 전 인류의 1/5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사업에 착수하기 위해 단합하자"고 요청한 결과 열린 대회였다. 남인도연합교회는 이미 1908년에 장로교회와 회중교회가 연합하여 이룬 개혁파 연합교회였다. 이 교회의 인도인 지도자들과 성공회의 아자리아는 서양 선교사들이 인도에 전파해서 세워진 수많은 교파는 성경의 명령과는 관계없는 그들의 분열 유산을 인도에 이식한 것이라 판단했다. 따라서 이미 편견으로 가득한 선교사들 없이 인도인만 따로 모여 교회 연합을 논의해 보자는 데 합의했다. 이 노력이 당장의 결실을 보지는 못했지만, 결국 1947년 9월, 즉 아자리아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에 남인도연합교회와 성공회, 감리회가 연합한 남인도교회(Church of South India)의 탄생으로 이어졌다.21)

아자리아가 남인도 개신교회들 간 연합을 간절히 바란 것은 이것이 단지 성경적이라 믿어서만은 아니었다. 남인도의 특수 현실이 교회 연합의 필요를 더 갈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남인도는 인구 대부분이 공통의 드라비다 혈통인데도, 크게는 네 개의 서로 다른 언어 지역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물론 종족과 언어를 더 세분화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났다. 둘째, 남인도에는 사도 도마로부터 기원한 무려 2000년에 이르는 풍성한 기독교 전통이 있었다. 따라서 아자리아는 민족과 종족과 언어와 카스트별로 분열을 정당화하고 지속하는 인도 문화 배경 속에서, 한 분이신 그리스도와 사도의 교회에서 기원한 인도 교회는 그 창시자가 하나가 되라고 하신 유언, 죽음과 삶의 문제와도 같은 이 명령을 지켜야 한다고 확신했다.22)

1936년 봉헌된 도르나칼 성공회 대성당. 인도적인 특징을 띠는 교회당이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아자리아의 일생에서 가장 기념할 만한 또 하나의 중요한 날은 1936년 1월 6일이었다. 이날 그가 도르나칼 주교가 된 지 24년 만에 도르나칼 성공회 대성당이 봉헌되었다. 공식 명칭이 도르나칼 현현대성당교회(Dornakal Cathedral Church of the Epiphany)인 이 교회는 기독교 교회당 건물에 인도 문화의 다양한 요소를 부가한 지극히 '인도'적인 교회당이었다. 우선 천장을 지지하는 12개 기둥은 12사도를 의미했다. 내부는 거대한 십자가가 압도하지만, 십자가 밑에는 12사도의 상징만이 아니라, 인도를 상징하는 연꽃 문양도 있었다. 건물 외양은 분명한 기독교 예배당이지만, 무슬림 모스크를 연상하는 돔도 있고, 힌두교 신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기둥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 연합을 추진하는 에큐메니스트지만, 신앙의 내용에서는 철저한 복음주의자였던 아자리아가 교회 건축을 통해 종교다원주의를 설파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이 요소들이 가장 '인도적'인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20세기 전반기 선교 운동 전성기에 널리 퍼진 성취신학(fulfillment theology), 즉 "선하지만 미완성인 인도 신앙들과 아름답지만 불완전한 인도 문화가 기독교 안에서 완성되고 성취된다는 기독교의 잠재력에 대한 주교의 극적인 표명"이 대성당에 반영되었다.23)

아자리아는 마을 심방 후 걸린 말라리아로 인한 고열로 1945년 1월 1일에 사망했다. 만 70세와 은퇴를 앞둔 직전이었다.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하기 1년 전이기도 했다. 1910년 당시 도르나칼 지역 성공회에 대략 최소 8000명에서 최대 3만 명까지 신자가 있었다는 보고가 있다. 그러나 그가 32년 동안 주교로 활약하다 사망할 당시에는 신자 수가 25만 명이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 예배는 남인도 전역에서 뿐 아니라, 런던의 국회의사당에서도 열렸다.24)

1) Robert Eric Frykenberg, Christianity in India: From Beginnings to the Presen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v.
2) 한국에서 일찍이 1962년에 아자리아의 소책자(『그리스도인과 헌금』(Christian Giving), 곽안전, 심재원 역, 대한기독교서회, 1962)가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영어판 편집책임자이자 선교 역사 분야의 저명한 학자인 스티븐 닐(Stephen Neill, 1900~1984) 성공회 주교가 아자리아의 생애를 소개하는 내용(pp.9-33)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 문헌 이후 아자리아가 학계와 교계에 따로 소개되거나 진지하게 다뤄진 사례는 없는 것 같다.
3) Mark A. Noll and Carolyn Nystrom, Clouds of Witnesses: Christian Voices from Africa and Asia (Downers Grove, IL: IVP, 2011), 142; V. S. 아자리아, 『그리스도인과 헌금』, 10f. 놀과 나이스트롬의 책에 기술된 아자리아 전기 대부분은 현재 아자리아에 대한 가장 탁월하고 권위적인 연구서인 Susan Billington Harper, In the Shadow of the Mahatma: Bishop V. S. Azariah and the Travails of Christianity in British India (Grand Rapids, MI: Eerdmans, 2000)을 요약한 것이다.
4) 아자리아, 『그리스도인과 헌금』, 10f.
5) Noll and Nystrom, Clouds of Witnesses, 142.
6) Noll and Nystrom, Clouds of Witnesses, 143.
7) Noll and Nystrom, Clouds of Witnesses, 143f.
8) 20세기 전반기 세계 선교 운동과 연합 운동의 설계자로서의 존 모트에 대해서는 본 연재 시리즈에서 이미 상세히 다루었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8543.
9) 모트와 아자리아가 맺은 관계의 깊이와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트 전기에 아자리아의 이름이 열 차례 이상 등장하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C. Howard Hopkins, John R. Mott, 1865-1955: A Biography (Grand Rapids, MI: Eerdmans, 1979), 782.
10) Noll and Nystrom, Clouds of Witnesses, 144-146; 아자리아, 『그리스도인과 헌금』, 13-15.
11) Noll and Nystrom, Clouds of Witnesses, 147f; 아자리아, 『그리스도인과 헌금』, 15-18.
12) Noll and Nystrom, Clouds of Witnesses, 147f; 브라이언 스탠리, 『1910 에딘버러 세계 선교사 대회 어떻게 볼 것인가』, 이용원 책임번역 (서울: 미션아카데미, 2010), 192.
13) 스탠리, 『1910 에딘버러 세계 선교사 대회 어떻게 볼 것인가』, 151-172, 193.
14) 스탠리, 『1910 에딘버러 세계 선교사 대회 어떻게 볼 것인가』, 193-196. 인용문은 스탠리의 원서에서 필자가 직접 번역한 것이다. Brian Stanley, The World Missionary Conference, Edinburgh 1910 (Grand Rapids, MI: Eerdmans, 2009), 125.
15) 스탠리, 『1910 에딘버러 세계 선교사 대회 어떻게 볼 것인가』, 196-201.
16) 아자리아, 『그리스도인과 헌금』, 19.
17) Noll and Nystrom, Clouds of Witnesses, 151; 아자리아, 『그리스도인과 헌금』, 18.
18) 아자리아, 『그리스도인과 헌금』, 20-22.
19) 아자리아, 『그리스도인과 헌금』, 15f, 18.
20) 아자리아, 『그리스도인과 헌금』, 151-153.
21) 1947년에 탄생한 신생 남인도교회의 초대 주교 중 하나가 레슬리 뉴비긴이었다. 뉴비긴에 대해서는 본 시리즈 연재물로 기고된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24545을 보라.
22) Carol Graham, "V. S. Azariah 1874-1945: Exponent of Indigenous Mission and Church Unity," in Mission Legacies: Biographical Studies of Leaders of the Modern Missionary Movement, edited by Gerald H. Anderson and others (Maryknoll, NY: Orbis, 1994), 327f.
23) Noll and Nystrom, Clouds of Witnesses, 154.
24) Noll and Nystrom, Clouds of Witnesses,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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