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강원도 철원군 DMZ평화문화광장에는 가림막으로 가려진 비석이 하나 있다. 10만 평 가까이 되는 넓은 평화문화광장 한복판에 자리 잡은 비석은 철원군 허가를 받고 세운 게 아니다. 그럼에도 관리를 맡은 철원군 시설관리사업소는 강제로 비석을 들어낼 의지가 없어 보인다.

가림막 안의 비석은 신천지 교주 이만희 씨가 대표로 있는 하늘문화세계평화광복(HWPL)이 세운 '세계 평화 선언문'이다. 이 세계 평화 선언문은 2013년 이만희가 작성한 것이다. '평화'문화광장 안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평범한 비석 같지만, 이 비석은 적법한 절차 없이 세워진 불법점유물이다.

비석은 2017년 8월경 세워졌다. 누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세웠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광장을 관리하는 철원군과 이 지역 출입을 관리하는 군부대의 말이 다르다. 제막식은 같은 해 8월 15일 광복절에 성대하게 열렸다. 제막식에는 이만희 씨를 비롯한 신천지 측 600여 명이 참석한 것으로 확인됐다. 스님, 지역 인사들, 재향군인회 군인 등을 초청해 구색을 맞췄다.

DMZ평화문화광장에 들어선 신천지 비석. 강원도 철원군 시설관리사업소는 이 비석이 불법점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비석이 세워진 지역은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일반인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철원군에서 운영하는 안보 관광을 신청해 신분증 확인을 마친 사람이나, 이 구역 안에서 농업을 허가받은 농민만 군 허가를 받아 출입할 수 있다. 수상한 점은, 신천지 측이 제막식을 연 2017년 8월 15일은 화요일은 안보 관광이 없던 날이라는 사실이다.

전국신천지피해자연대(전피연·홍연호 대표)가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건 2018년 11월. 전피연은 철원군에 공문을 보내 불법점유물 철거를 요청했다. 당시만 해도 시설관리소는 비석이 불법점유물임을 인정하고 철거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철거는 차일피일 미뤄졌다.

전피연은 수차례 더 공문을 보낸 끝에 올해 6월 철원군 시설관리사업소(사업소)로부터 회신을 받았다. 비석을 세운 단체에 여러 차례 자진 철거를 요청했지만 응하지 않아 대집행을 통한 철거 방침을 세웠다고 했다. 대집행을 할 경우 HWPL이 행정소송까지 불사한다고 답했기 때문에 시일이 걸리더라도 적법한 절차를 밟아 나갈 것이라고 했다.

이 사안을 담당하는 사업소 관계자는 8월 8일 <뉴스앤조이>와 통화에서 "우선은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가림막을 설치해 뒀다. 천천히 행정 집행을 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천천히'가 어느 정도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민원이 계속 들어와서 가림막이라도 설치해 둔 것이다. 그 정도면 되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불법점유물임을 인정했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강제집행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그는 "돌이 무겁고 보관할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서울시가 광화문광장의 대한애국당 천막을 강제로 철거한 것과 비교하자 나온 대답이었다.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도 강제집행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 "전피연에서밖에 민원이 안 들어온다. 계속 문제를 제기하기에 가림막을 설치한 건데 우선은 그것으로 되지 않느냐"고 했다. 그는 경기도 파주, 강원도 고성 등지에도 불법 비석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왜 철원에만 문제를 제기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신천지가 세운 비석은 현재 나무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다. 시설물 옆에는 함부로 가림막을 훼손하면 안 된다는 안내문이 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철원군기독교연합회 류호정 회장은 사업소 관계자의 소극적 태도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8월 9일 기자와 만나 "평화문화광장은 공공장소다.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온다. 게다가 혹시라도 통일이 된다면 북한 사람과 활발하게 교류하는 장이 될 곳이다. '평화'가 신천지 고유 단어처럼 보일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류호정 회장은 신천지가 비석을 세울 때까지 지역 종교계가 전혀 이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류 회장은 "기독교 조형물을 세우자는 이야기도 아니고 이단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게 아니다. 그들이 떳떳하다면 비석을 세우기 전 지역 종교계와 함께 공청회도 열고 논의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신천지가 아무도 모르게,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전피연 관계자는 이처럼 신분을 속이고 접근해 그럴싸한 말로 자신들을 포장하는 게 신천지의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했다. 전도할 때만 신분을 속이는 게 아니라 공공 기관에 행사 등록을 할 때도, 새로 만든 각종 단체들을 내세워 일단 공공성이 있는 행사를 개최하는 것처럼 위장한다는 점이다.

그는 신천지가 신분을 속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평화'를 말하는 것도 가증스럽다고 했다. "멀쩡히 잘 지내는 가정의 평화를 깬 주범들이 세계 평화를 이야기한다. 공공 기관은 이들의 수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속는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이들의 불법 행위가 드러나 더 이상 공공 기관이 신천지에 농락당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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