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패배가 아니다

"오직 우리 자신과 세계의 연약함(fragility)을 포용함으로써만 우리는 평등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이고 물질적으로 가능한 새로운 아상블라주(assemblage)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조직화할 수 있다." - 캐서린 켈러1)

독재의 서슬 퍼런 철권 아래 놓인 절망의 동토에서도 힘차게 희망의 싹을 틔우던 우리가 이제 바뀐 세상에서 아무런 희망의 징조도 없이 스스로 사라지고 있다. 세상이 바뀌리라는 희망, 우리는 승리하리라는 희망은 어이없게도 우리가 원하던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시기에 말라죽어 가고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더 이상 어떻게 세상의 변혁을 꿈꿀 수 있을까 하는 자조가 퍼져 가고 있다.

이제 곧 약한 자를 선택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없는 자를 선택하여 있는 자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리라는 기대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거대한 교회 권력의 힘과 벌이는 끝이 안 보이는 투쟁이 도처에서 계속되며, 그사이 권력은 학교들에도 손을 뻗쳐 신학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일이 더욱더 빈번히 자행된다. 대학교에는 더 이상 '큰 학문'이 없다던 자퇴생의 대자보가 큰 울림을 일으킨 지 7년, 이제 신학교에는 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읊조림이 낮지만 지속적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우리는 도처에서 실패했다. 예를 들어, 정권 교체의 유무와 상관없이 지난 수십 년간 생태계 위기와 기후변화 문제가 무척 심각하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물질과 에너지 소비를 대폭 줄이고 좀 더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써 얻는 자기 충족감보다는 적은 것에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생활 태도를 실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생태신학적 반성과 성찰이 생각에 그치고 구호에 머물고 있"2)는 현실은 우리의 실패가 얼마나 근원적인지를 방증한다. 그래서 "이기적인 인간이 자연을 배려하여 인간의 불이익과 불편함을 감수하는 대안적 삶을 살아가면서 소비사회를 지속 가능한 사회[로] 바꿔 간다는 것은 때론 불가능해 보인다."3)

김은혜에 따르면, 이렇게 "반복되는 삶 속에서 실천되는 가치로 생태적 문화가 형성되지 않는 것은 몸의 실천 없는 사유의 무기력을 반복하고 있다는 증거이다."4) 이러한 생태 위기의 근원에는 공유(the commons)에 대한 개념과 생각의 붕괴가 자리 잡고 있다. 자본주의 문화 속에서 우리는 '공유'에 대한 생각이 약하다. 근대의 '개인'이 등장한 이후, 모든 것은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있다고 간주되고 있으며, 공유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나 생각이 흐려져 왔다. 따라서 사유재산이 될 수 없는 물, 공기 혹은 흙과 같은 공유재산 및 공유지에 대해서는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현실이 벌어진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공유된 것들을 통해 이익을 취하지만, 그 이익은 각자의 사유재산으로 환원되며, 이것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공유된 것들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과 배려를 두지 않는다. 각자의 이익과 사유재산 증식에만 몰두에 있는 대다수 공중에게 공유되는 것들을 생각하자고 말해 봤자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다. 그중 우리가 가장 가시적으로 실패를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 바로 기후변화 위기이다.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공유재산에 대한 개념이 희박한 것이 바로 오늘날 문명의 전면적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여기서 '기후변화'나 '지구온난화' 현상이 단지 기후학이나 생태학의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모든 것과 연결된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는 근대 이래로 발전되어 온 자본주의 체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이를 정치적으로 뒷받침해 온 선거 민주주의 체제와 무관하지 않다. 인류의 공유재산은 실상 "가난한 이들과 지구로부터" 얻는다. 이렇게 얻어진 것들은 공유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부익부 빈익빈 구조로 매우 불균형하게 배분된다. 이러한 구조에 저항하는 '공중公衆'(the public)을 "언더커먼"(the undercommon)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정치에서 희망을 잃었지만, 저항과 자기-조직을 고집하는" 이들을 가리킨다.5)

그렇다! '언더커먼.' 이 '언더커먼' 운동들은 산업혁명기 영국의 울타리 치기 운동(혹은 인클로저 운동)이나 러다이트운동처럼 줄곧 있어 왔지만, 자본주의와 정치와 개인들의 이기적 탐욕들 간의 공모를 저지하는 데는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이들은 우리 중 소수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더 이상 세상을 변혁할 힘도, 동기도, 조직도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하다. 이들의 투쟁은 거리에서 함성으로 끝날 뿐,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자조와 좌절만 돌아온다.

또한 다인종·다민족·다종교 사회로 진입하면서, 소위 '우리'와 다른 사람들, 특별히 이주민 노동자들을 "'비인간'(inhuman) 혹은 '의사인간'(psudohuman)으로 간주"6)하고 "배제"하는 인종차별 행위들이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은폐된 인종차별주의가 이중적으로 발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백인이나 미국계 혹은 유럽계 외국인에 대해서는 열등감을, 유색인종이나 제삼세계 출신 외국인들에게는 우월감을 표출하는 이중의 인종차별주의를 역설적으로 유색인종에 속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체현하고 있다는 사실은 곧 인문학과 신학의 철저한 실패를 의미한다.

예전 산업자본주의 시절에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별이 가시적이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명확하게 구별될 수 있어서, 우리 투쟁은 그 가시적인 투쟁 대상들을 향해 이루어졌다. 지구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금융자본주의 시절을 넘어, 이제 전 세계를 거미줄로 연결하는 가상 네트워크에 기반한 기호자본주의 시대에는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의 이분법적 구별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며, 불공정한 체제와 경쟁과 혹사로부터 유발되는 분노와 좌절의 출구가 투쟁으로 표출될 자리를 찾지 못한다. 기호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한편으로 모두가 체제의 희생자들이면서 동시에 모두가 체제의 가해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공장에 출근하여 노동하다 퇴근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일상이 아니라, 어디서든 컴퓨터를 켜고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뇌 신경을 가상 네트워크에 개방하며 일하는 기호자본주의의 인지 노동자들은 더 이상 일과 여가의 이분법적 구별이 통용되지 않는다. 결국 우리 신경계는 과부하가 걸리고, 거기서 유발되는 정서적 불안은 해소되지 않은 채, 분노와 울분을 자신보다 약한 이들과 존재들에게 우발적으로 토해 내는 비상식적인 일이 반복된다. 그러다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부류들이 발견되면, 거리와 인터넷상에서 그들을 향한 마녀사냥이 벌어진다. 그들이 어떤 이들인지는 상관없다. 울분과 분노의 표현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한 기호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을 창출하는 클릭질이 되어 체제에 일조할 뿐이다. 마녀사냥에 가장 취약한 이들이 인권, 즉 시민권을 불완전하게 갖고 있거나 보장받지 못한 계층이다.

교회라고 이러한 실패들의 행진에서 열외가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한국교회는 세상 안에서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실현하기 보다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신념에 물들어 자본주의의 종교화 혹은 종교의 자본주의화가 개교회 현장에서 복잡하게 서로 얽혀서 교회의 본질을 퇴색"7)해 왔다. 세습과 헌금 유용, 밀실 인사, 교단 정치, 각 교단장 선출을 둘러싼 금권 선거 의혹 등 도저히 교회에서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신문지상에 매순간 터져 나온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모임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반복적으로 죄책감 없이 자행되는지 의아해하는 많은 사람의 의구심에도 아랑곳없이 그저 그렇게 흘러간다.

서슬 퍼런 독재 권력이 대학가를 장악하던 시절에도 하나님나라가 이 땅 위에 실현되리라 믿으며 권력에 굴복하지 않던 신학은, 금융 네트워크 자본주의 체제를 거쳐 기호자본주의로 진화한 요즘, 자발적으로 자본 권력에 종속되었다. 대학과 신학교들은 예언자의 포효와 비판 목소리를 내기보다 학령인구 감소 위기를 앞두고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승자가 되기 위해, 대학문과 신학의 기초를 다지고 연구 역량을 키우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 지원자 확보를 위한 대중성을 높이는 데 열을 높이며 대학 혹은 신학교이기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직업 훈련원이 되어 가고 있다.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한 그리고 성공한 목회자가 되기 위한 현장의 전문적 기술들을 전수하고 공유하는 마당으로 신학교가 전락하고, 시대를 향한 예언자적 사명을 외면하고, 이 세계 경제체제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소수자들을 향한 관심을 방기하고, 다가오는 시대를 위해 신학이 어떤 사유를 전개해 나아가야 될지에 대한 고민을 포기한다면, 신학교는 존재의 이유가 없을 것이다. 현장 교회 목회자 멘토링이나 기도원 찬양 예배 프로그램들이 그런 일은 더 잘할테니 말이다. 신학은 더 이상 세상을 일깨우지도, 세상을 비판하지도, 미래를 위한 비판을 제시할 역량도 없어 보인다.

그렇게 도처에서 실패하고 있지만, 로마제국의 질서를 전복한 것은 결국 한 사람의 행동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로마제국의 변방 중 변방인 갈릴리에서 목수 출신 청년이 어부들과 어울리며 선포한 하나님나라의 비전이 천막공 바울의 열심을 통해 로마로 전해졌고, 그 거대한 제국의 수도 지하 어딘가에서 소수로 모여 예배하기 시작했던 공동체가 결국 세상을 변혁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가시적인 결과를 얻지는 못했고, 헌신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체감하기에는 변화가 너무 느렸지만, 오늘날 우리는 도처에서 하나님나라의 이상이 세상을 어떻게 변혁해 왔는지를 체감한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한 것이지 패배한 것이 아니다.

때로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이 땅의 작은 자를, 없는 자를, 약한 자를 일으켜 세워, 세상의 큰 자들과 있는 자들과 강한 자들을 부끄럽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만드시는 하나님나라 소망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현실화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은 하나님이 이 땅의 권력들에 굴복하고 패배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나라'는 이 땅 위에 실현된 적이 없다. 세례 요한과 예수는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고 했지, 그 나라가 실현되었다고 한 적은 없다. 하나님나라는 "오는 중"(coming)이다. 바로 이 '오는 중'이라는 시제를 주목해야 한다. 정의는 실현된 적 없기에 우리는 정의를 꿈꾼다.8)

정의는 우리가 이 현실을 올바로 볼 수 있게 하는 척도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나라는 이 세계의 부정의와 불공정을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척도이다. 이 척도는 '비전'(vision)이지, 실체나 실물이 아니다. 우리에게 더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해 주는 비전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나라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아직 실현되지 못한 '하나님의 공의'를 꿈꾸며, 아직 실천되지 못한 '정의'를 꿈꾸며, 존재하지 않는 이상에 근거하여 현실을 비판하고 개혁해 나아가려는 인간 상상력의 힘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근원적 힘이다.

기독교의 탈을 쓴
정치적 마니교에 대한 신학적 투쟁

이러한 우리의 거듭된 실패 역사 이면에는 언제나 "정치적 마니교"의 암운이 도사리고 있다. 말하자면 '적과 아군의 정치적 이분법'이 작동해 왔다는 말이다. 적을 악마화해, 적을 향한 두려움과 증오를 부추기고, 이를 통해 내부의 '선한 우리'를 결집하게 하는 정치가 우리 사회를 퇴행시켜 왔다는 말이다. 사실 보수를 자처하는 극우나 진보를 자처하는 진영 모두 끊임없이 '정치적 마니교'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혐오와 차별의 극우 정치에 맞서 정의로운 분노와 증오의 정치를 내세우는 것이 일시적으로는 시원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결코 사회변혁의 과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불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 시절의 진보 진영의 '분노의 정치'와 문재인 정부 시절인 요즈음 극우의 분노 정치가 무척 닮아 간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분노의 원인과 증오의 대상은 정반대이지만 말이다. 최근 특별히 우려되는 것은 이 분노와 증오의 정치가 종교적 우익, 더 구체적으로 개신교 내 극우들과 연합하면서, 우파 정치가 완전히 '정치적 마니교'로 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노와 증오의 정치가 종교적 영성과 결합할 때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는 역사가 증거한다.

독일 극우 민족주의와 개신교의 연합은 나치 정권을 창출했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일본 민족주의가 자생 종교 신도의 영성과 결합하여, 민족을 위해 희생을 부추기며 아무 희망도 없는 전쟁의 희생양으로 젊은이들을 내몰았다. 마치 야스쿠니신사에 유골이 보관되면 영생을 얻는 것처럼 포장해서 말이다. 자본주의적 불평등으로 야기된 불만과 불안이 에너지를 분출할 출구를 찾을 때, 적과 아군의 이분법에 근거하여, 우리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불안케 하고 무너뜨리는 대상을 지목한 뒤, 혐오와 차별의 감정을 분노와 증오로 쏟아 버리게 하는 방법은 아군을 결집하게 하는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전략이다.

초대교회는 이 마니교와 마찬가지로 이분법적 세계관에 근거한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하나님나라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아들이 되어 인간 형상으로 이 땅에 오셨고, 악한 자들을 무찌르기보다는 그저 무기력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시다 죽으셨다. 그분이 그리스도임을 믿었던 기독교인들은 그분이 죽은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다고 믿으며 모여서 예배하기 시작했고, 예배를 통해 인류 문명은 더 정의롭고 풍요롭고 평등한 세상을 아주 서서히라도 이 땅 위에 이루어 왔다.

정치적 마니교를 이겨 낼 방법은 의협심이 아니라 신학이다. 이분법적 정치 전략의 위험성은 문제의 근원을 보지 못하도록 엉뚱하게 만만한 대상으로 우리 주의를 돌린다는 사실이다. 흑사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교회는 부패하고, 성직자들은 정치 권력 추구에만 빠져 무기력할 때, 이 모든 죄악의 근원이 '사악한 마녀'라며 대중을 충동하는 전략이 가장 극에 달한 시기는 '중세'라는 시대 일반이 아니라,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교회의 신앙이 위기를 맞았을 때였다.

과학기술이 점차 발전하고, 교회 내 부패와 신학적 우매함이 위기를 자초하고 있을 때, 가톨릭교회는 '마녀사냥'이라는 카드를 꺼내들고,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고 치유하기보다 가상으로 외부에 사악한 적을 만들고 신자들 주의를 돌리는 전략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그 이후 도래한 근대는 종교 권력에 대한 극단의 혐오감을 노출하면서, 세속이라 불리는 시민 권력을 종교로부터 해방하는 데 주력한다. 이것이 근대가 무신론의 시대라고 불리게 된 이유이다. 근대 무신론은 중세적 신앙주의가 자초한 결과의 일부라는 말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러한 역사적 몸짓들을 반복하면서, 다음 세대의 무신론과 기독교 혐오를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신학은 투쟁이다. 이는 신학이 싸움과 분쟁이라는 말이 아니다. 신학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신학은 진리를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논리적으로 시대에 맞게 전달하는 문제와 관련돼 있다. 신학은 우리가 지금까지 지켜왔던 신학적 해석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왜 문제가 되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이며, 시대의 변화하는 패러다임 가운데 기독교의 진리를 번역해 내는 문제 등을 다룬다.

신학의 작업은 나의 신학과 다른 의견, 다른 논리, 다른 해석을 고려해야 한다. 내 관점만이 진리에 설 수는 없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에는 내가 진리를 전한다는 확신과 소명으로 해야 하지만, 신학 작업에서는 오히려 내가 전하는 복음이 과연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신 말씀에 부합하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을 요구받는다. 나의 신학적 관점과 다른 이들의 신학적 관점들을 비교하면서, 장단점을 살펴보고 수용할 것과 버려야 할 것 등을 취사선택하는 위치에 놓인다.

다시 말해 신학 작업은 관점이 다른 신학들과의 갈등과 긴장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신학은 투쟁이다. 나의 관점을 '절대적 진리'라고 우기는 투쟁이 아니라, 나의 신학을 철저히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투쟁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신학을 철저히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투쟁이다. 신학이 '투쟁'이라는 사실은 곧 신학들 간의 갈등과 긴장을 서로를 비방하고 조롱하는 부정적 소재로 남용하지 않고, 갈등과 긴장을 창조적으로 전환해 나아갈 수 있는 역량의 문제이다. 이를 신학적 아고니즘(agonism)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실패를 창조적 신학으로 전환해 나아가는 문제이다.

1)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Our Planetary Emergence and the Struggle for a New Public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8), 36.
2) 김은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윤리 문화』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5), 167.
3) 김은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윤리 문화』, 167.
4) 김은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윤리 문화』, 167.
5)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31.
6) 김은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윤리 문화』, 289.
7) 김은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윤리 문화』, 136.
8) 참조 – 박일준, 『정의의 신학: 둘(the Two)의 신학』 (서울: 동연, 2017).

※필자 소개 이미지를 클릭하면 '길 위의 신학' 전체 기사 목록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