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 그리고 내가 사랑한 거짓말들> / 케이트 보울러 지음 / 이지혜 옮김 / 포이에마 펴냄 / 212쪽 / 1만 2800원

병원 생활에 관해서라면, 특히 소아암 병동에 대해서라면 한 다스의 글은 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픈 아이를 돌보던 일상에 대해서 이미 상당한 메모를 남겨 두기도 했다. 남기려고 해서가 아니라, 달리 버틸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12년 전, 다섯 살이던 딸아이는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완치 후 재발하고, 재발한 후 또 재발해서 결국 4년 전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았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글이나 책을 쓰지 못할 이유는 열두 다스쯤 되는 것 같았다. 거듭되는 아이의 아픔에서 지켜보는 일 이상을 할 수 없었던 경험 덕에 고통을 해석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나는 관찰자일 수밖에 없다고 자주 느낀다. 얼마간 조마조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나는 한 여성의 고통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점점 쪼그라드는
"나(그)의 소박한 번영신학"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 그리고 내가 사랑한 거짓말들>(포이에마)은 결장암 4기 판정을 받은 서른다섯 살 역사신학자 케이트 보울러가 썼다. 나 같은 관찰자나 '돌봄 제공자'로서가 아니라['caregiver'라는 이 말을 나는 <아픈 몸을 살다>(봄날의책)의 저자 아서 프랭크에게서 배웠다. '보호자'보다 훨씬 맘에 드는 말이다],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고통을 기록한 책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생각에 그는 쓰지 않아야 할 이유를 고민할 새도 없었을 것이다.

10대 중반에 만난 사랑과 20대 후반에 결혼하고, 30대에 아이를 낳고 듀크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조교수가 된 케이트 보울러는 갑자기 질병에 손발이 묶였다. 그의 전공은 미국 번영신학에 대한 역사적 연구였다. 일찍이 메노나이트 공동체가 정착했던 캐나다 초원 지대 출신으로서, 보울러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 좋은 삶이라고 배웠다. 그러다가 열여덟 무렵에 처음 번영신학을 접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아마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뿌리에서부터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보울러는 미국의 메가 처치 목회자들과 성도들, 유명한 번영신학자들을 인터뷰해서 <축복: 미국 번영신학의 역사>라는 책을 썼다.

번영신학의 믿음에 따르면, 케이트 보울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선하시고 보응하시는 하나님이 아무 이유 없이 질병으로 당신의 자녀를 고통스럽게 할 리가 없다. 혹시 그런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일보 진전을 위한 잠시의 후퇴이고, 더 큰 이야기와 하나님의 멋진 계획을 드러내기 위해서여야 했다. 보울러는 번영신학이 계속 확장하는 이유는 삶의 고통과 회복에 대한 갈망을 철저히 설명해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치유가 성스러운 권리인 영성 세계에서 질병은 고백하지 않은 죄의 징후이다. 즉 용서의 부족, 신실하지 않음, 반성 없는 태도, 혹은 부주의한 말의 징후인 것이다. 고통당하는 신자는 풀어야 할 수수께끼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31쪽)

그러니까, 보울러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가 자신을 향한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이나 '답'이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엄청난 부와 명예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트랙터를 좋아하는 꼬맹이 아들 곁에 오래 머물고 싶다는 소원 같은, 그의 "소박한 번영신학"마저도 아픈 몸과 함께 점점 더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이제 그는 이렇게 기도한다. 벼랑 끝에 닿았을 때 거기 그냥 작은 다리 하나만 놓아주시기를, 그래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다음 스텝으로 그저 건너갈 수만 있게 되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해야 한다거나, 기어이 다음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 고통을 극복하고 다시 산에 올라야 한다고 믿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풍성하다'가 '재산이 많다'는 의미일 필요가 없고, '온전하다'가 '나았다'는 의미일 필요가 없다면 어떨까? '복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 그저 우리가 좋은 소식을 들은 사람이 된다는 의미였다면 어떨까? 하나님은 여기 계신다. 우리는 사랑받고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37쪽)

하지만 인생의 어느 순간에 우리는 가장 소박한 수준으로 끌어내려진 '나만의' 번영신학마저도 욕심인가 싶어질 때를 만나게 된다. 나의 경우 그것은 나의 행복에 관심이 있으시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신 '친절하고 너그러운 아빠 같은' 하나님을 온 세계와 우주의 주인 자리로 되돌려 드리는 일이기도 했다. 최소한 그 당시 우리가 머물던 병원 수십 개 병동에서 매일 밤 신음하며 당신을 불렀을 수천 명의 아빠의 자리로라도.

친밀했던 '나의' 하나님은 그렇게 내게서 멀어져 갔지만, 나는 내가 죽기 전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그분의 '실체'에 아주아주 조금 더 다가서게 되었다고 믿는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 그리고 내가 사랑한 거짓말들>은 서른다섯에 결장암 4기 판정을 받은 신학자가 쓴 에세이집이다. (사진은 기사와 관계없음)

"현재에 갇혀"
'연중시기'를 살다

최초 진단은 "3개월이 남았다"였고, 2년 생존율이 30%도 채 못 된다던 보울러의 결장암은 극적으로 임상 실험이 가능한 '마법의 암'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야말로 벼랑 끝에서 그는 건너갈 다리를 하나 만났다. 매주 수요일, 새벽 비행기로 타 도시 대형 병원에 가서 화학요법과 면역 치료를 받고 돌아오기를 여러 주 반복하면 정밀 검사를 통해 두 달의 생을 선물로 받게 된다.

책을 쓸 무렵 보울러는 그렇게 두 달씩 여섯 차례 죽음을 유예받은 상태였다. 보울러는 자신이 "현재에 갇혔다"고 느꼈다. 고통이란 우리가 완전히 자신에 대한 주도권을 상실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상태라고 썼던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따라 말하자면 케이트 보울러는 여전히, 제대로 고통 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눈앞의 다리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완벽한 수동성과 강력하고 영웅적인 노력 사이에서 경계를 걷고 있는 그에게 사람들은 확신에 찬 해답을 보내왔다. 더러는 "우주적인 관점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전하려 했고, "이런 경험이 몸과 마음의 교육이 될 것"이라고 하거나, 최악의 경우 "태도가 운명을 결정하니, 웃으라!"고 말하는 '해결사'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고통을 계산해서 자신의 고통이 왜 보울러의 그것보다 더 중한지 알려 주기 바빴다. 보울러는 그 모든 말들이 고맙지만 '거짓말'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여전히 종양이 남아 있는 아픈 몸을 여전히 슬퍼하며 여전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로 한다. 그것은 마치 '연중시기'를 사는 일과 같았다. 보울러가 말하는 '연중시기'는 교회력에서 사순절로부터 이어지는 부활절과 성탄절 사이를 의미한다. 각종 이벤트와 과장된 슬픔이나 환희가 떠나고 조금 밋밋하고 심드렁할망정 교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시기이고, 계획을 세우는 시기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여전히 '현재에 갇혀' 있었지만 다시 사소한 계획들을 세우고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들을 헤아려 보게 되었다. 책의 마지막은 그래서 이런 문장으로 끝이 난다.

"나는 죽는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한 나의 거짓말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 그리고 내가 사랑한 거짓말들>을 읽는 일이 나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말을 알고 보는 공포 영화처럼 저자가 살아남아서 이 책을 썼다는 데 안도했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이후로 햇살 따사로운 어느 날엔가 불쑥 케이트 보울러의 부고를 듣게 될까 봐 여전히 두렵기도 하다. 나에게 보울러는 대단히 용기 있고 강한 사람이다. 자신을 위해 기도와 도움을 아끼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또 자신의 글을 읽고 살아갈 용기를 얻었을 사람들에게 상실감과 실망을 안겨 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나는 내가 고통에 대한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했던 열두 다스의 이유에 하나를 더 추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난날, 우리는 너무 이른 축포를 터트렸던가. 두 번이나 재발할 줄 미리 알았다면 치료 종료 후 매번 '완치 잔치'를 하고 사랑하는 이들과 기쁨을 나누며 한 고비 넘을 때마다 그렇게 호들갑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그러니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간 축복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기도 하다).

"기도해 주셔서 감사해요", "당신의 기도와 관심 덕분에 이 아이가 살아났어요"라는 말을 꼭 하고 싶어서,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상황이면 차라리 입을 닫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떤 거짓말들처럼 딸의 고통에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이 바로 '그렇게' 하시기 위해 아이를 아프게 하셨다고는 절대로 믿지 않았지만 말이다.

돌이켜 보면 가장 최악의 상황은 병원에서였다. 완치율에 희망을 걸고 힘들게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 꼬마 환자들에게 – 병동 생활에 너무 능숙하고 좀처럼 말이 없는 – 되돌아온 환자와 돌봄 제공자는 존재 자체로 공포이고 절망이다. 그것은 어쩌면 딸이 투병하던 10여 년 동안 고질병이 되어 버린 나의 불안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그 세계를 떠나왔고 아이가 발병한 순간 가장 작게 쪼그라들어 이제는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나의 소박한 번영신학'이었던 것도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로 응원하는 나의 딸이 '하나님의 영광'이 못 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최소한 절망의 아이콘이 되지는 않아야 했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는 상처가 되는 타인들의 '거짓말'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케이트 보울러의 책은 내가 최저점을 정해 놓은 나의 '소박한' 번영신학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다. 적당히 나를 포장해 줄 가장 사랑스럽고 달콤한 거짓말이 아직 내 안에 남아 있지는 않은가 하고. 그리고 이런저런 핑계를 찾아 타인의 고통에서는 물론이고 자주 나 자신의 문제에서조차 관찰자로 머물고 싶어 하는 나를 고통의 한가운데로 기어이 불러낸다.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오늘은 아닌 것도 알고 있는, 당신과 나를.

최은 / 영화를 읽고 쓰고 말하는 그리스도인. 영화이론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청어람아카데미와 CBS아카데미 숲 등에서 강의했다. 월간 <복음과상황>, 라디오 'CBS광장' 등에서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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