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는 흔히 '역사의 종교'라 불린다. 그리스도교는 초월적 영역과 현실을 구분하면서도, 동시에 초월적 영역이 이 현실에 스며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 곧 하나님이 이 땅에 어떻게 '역사'했는지를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 다른 것을 떠나 이스라엘 역사를 담고 있는 일부 구약성서 문헌, 예수의 생애와 이후 교회의 탄생을 담고 있는 일부 신약성서 문헌도 일종의 '역사서'라 할 수 있다. 이때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 모음이 아니며 역사를 기술하는 것 역시 그렇게 객관적 사실들을 수집하거나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읽는 일,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모두 개별 사건의 중요도를 가늠하는 과정, 각 사건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판단까지를 포함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하나의 전체로서 역사를 바라볼 수는 없다. '역사를 쓰는 인간'으로서 역사가는 자신의 선입관과 기준을 가지고 역사적 사실들의 특정 단면을 드러내 이를 일정한 흐름을 지닌 '역사'로 재구성한다. '역사를 읽는 인간'으로서 우리는 역사를 읽을 때 '이미' 그러한 역사가들 관점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 이른바 '그리스도교적 역사 인식'은 흔히 특정 역사가 본인이 생각하는 관점, 본인의 신앙 혹은 그가 속한 종파의 관점 및 신앙을 대변하기 쉽다. 역사를 중시하면서도 역사를 편향되게, 혹은 결정론적으로 이해하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기 쉬운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캔터베리대주교를 역임한 로완 윌리엄스가 쓴 <과거의 의미 - 역사적 교회에 대한 신학적 탐구>(비아)는 그리스도인이 과거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친절한 지침을 제시하는 저작이다. 그는 역사를 보는 활동이 '지금, 여기'를 새롭게 정의하는 활동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지금, 여기'를 정당화, 더 나아가 자기와 자기가 속한 종파, 자기의 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를 끌어다 쓰는 태도에서 벗어나는 법을 제시한다.

<과거의 의미 - 역사적 교회에 관한 신학적 탐구> / 로완 윌리엄스 지음 / 양세규 옮김 / 비아 펴냄 / 240쪽 / 1만 5000원

저자는 우선 기존의 그리스도교인 역사가들이 써 놓은 텍스트 '너머'를 볼 것을 권한다(28쪽). 그리고 그리스도교 역사를 기술하는 모든 역사가의 노력은 당대의 일을 신적인 관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근본적으로 신학적 작업임을 일깨운다(29쪽). 교회사 텍스트는 역사가가 자신이 속한 콘텍스트에서 형성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자신이 지닌 사상적 가치 기준을 과거에 적용해 생성된 텍스트인 것이다. 전통주의를 고집하는 역사가는 전통의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에 주목하고, 진보·혁신을 고집하는 역사가는 진보의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과거와 현재의 차이·단절에 주목한다. 종교개혁 이후 교회사는 언제나 이러한 연속성과 차이, 혹은 단절의 긴장, 혹은 대립을 이루는 방식으로 기술되어 왔다고 그는 언급한다. 안타까운 점은 둘 모두 각자가 세운 도식을 정당화할 뿐 도식 자체를 반성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로완 윌리엄스는 중간 부분에 해당하는 두 개의 장에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는 시대, 즉 초대교회와 종교개혁 시기를 다루며 어떻게 역사 서술들이 갈등을 일으키는지, 각 역사 서술 입장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를 환기한다. 이를테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와 로마의 관계에서 흔히 교회사가들은 박해, 박해 뒤 승리라는 내러티브를 택하지만 로완 윌리엄스는 그러한 내러티브가 완전히 포섭할 수 없는 과거의 다른 측면, 유대교와 로마제국이라는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빚어 가는 과정을 드러낸다. 또한 당시 교회가 제국의 박해를 받은 것은, 엄밀하게 종교적 이유라기보다 로마 세계의 시민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거류 외국인'으로 제국의 가치와는 다른 가치 체계를 따르기 때문이었다고 언급한다. 즉, 제국에 충성하지 않은 자의식이 초대교회의 자의식이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가치 체계 속에 이른바 순교는 하나의 성사로 비춰지고, 이 세상에서의 삶은 엄격한 금욕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한 고민은 그리스도교가 공인 이후 사회의 주류 세력이 되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된다(95쪽). 교회는 더 이상 거류 외국인이 아닌 이 세상 속에 머무르며 내외로 발생하는 여러 세력을 조우하며 문제를 풀어 가는 땅의 조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 로완 윌리엄스가 언급한 '교리가 발전하는 역사'가 정밀한 신학적 발전의 반영이기보다 교회가 봉착했던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도라는 진단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교 공인과 교리 형성사를 바라보는 전형적 시각을 재고하게 한다(97쪽).

교회 역사를 정통을 형성해 경계를 세우는 과정이라는, 다소간 결정론적 관점(126쪽)으로 바라보기 쉬운 우리에게 저자는 끊임없이 '낯설게 보기'를 주문하고 있다. 승리주의 관점으로 교회를 바라보고자 하는 유혹에 넘어갈 때 우리는 그 여백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해석해 낼 도리가 없다. 종교개혁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마찬가지이다. 초대교회에 대한 접근 못지않게, 혹은 초대교회보다 더 심각하게 종교개혁이라는 과거에 대한 우리(특히 개신교)의 접근은 종파주의적 시각을 견지하기 쉽다. 이에 저자는 종교개혁을 중세를 주름잡던 교회 권력이 세속 권력과의 관계 변화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된 사건으로 풀어 간다(135쪽). 이러한 고민은 (처음)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 역시 마찬가지였음을 그는 보여 준다.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을 개신교의 승리로만 보려는 우리의 고정된 시선에 로완 윌리엄스는 과거의 낯선 면을 보여 주고 익숙한 것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초청한다. 이러한 초청은 사뭇 불편하다. 교회의 과거는 승리·영광으로만 채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단 초대교회 시기나 중세 시기뿐만이 아니다. 종교개혁으로 세속 권력의 영향 아래 놓인 교회는 자주 국가 폭력을 옹호하거나 용인하는 모습을 보였고(156쪽), 무비판적으로 국가주의·민족주의와 결탁했다(157쪽).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기, 더 나아가 제국주의 발생기에 교회는 자주 폭력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쯤 되면 지금껏 우리가 읽어 왔던 교회사는 "엇나간 확신"(185쪽)에 사로잡혀 과거를 직면하지 못한 기록이지는 않은가 반성해 보게 된다. 흔히 역사를 통해 과거를 성찰적으로 회고해 오늘의 길을 밝히고 미래를 전망한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의 낯선 면모에 정직하게 응하지 않는 역사는 오늘의 길을 오히려 어둡게 만들 수도 있다. 오늘의 길을 밝히고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냉정한 관찰이 필요하다. 과거의 낯선 면모에 정직하면 정직할수록 우리의 성찰은 깊어지고 미래에 대한 전망은 날카로워질 것이다. 낯설게 보면 낯설게 볼수록 우리의 전망은 예리해질 것이다. 익숙한 시각을 벗고 대상을 존중하고, 대상을 인내하며(188쪽) 바라볼 때 우리는 현재의 신학적·교리적·종파적 관점을 극복하고 조금 더 명확하게 과거를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에 그치지 않고 조금은 더 오늘을 밝혀 줄 혜안을 얻고 아득하지만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

올바른 역사의식을 지닌 신학자, 그리스도교 역사가는 우리 일상이 과거로부터 일정한 연속성과 차이를 지니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그 속에서 '말씀'이 인간의 삶을 구성해 왔는지 숙고하게 한다. 말씀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 인간의 자기소외, 다양한 방식의 인간의 자기 정당화에 저항하며 신학자는 이 일상에 저 말씀의 '새로움'을 다시금 아로새긴다. 그러므로 교회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은 교회가 매 시대 사회의 긴급한 요청에 어떻게 응답했는지를 정직하게 성찰하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로완 윌리엄스에게 과거를 봐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부가적으로 요청되는 활동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활동이다. '지금, 여기'는 오직 과거를 정직하게, 낯설게 대할 때만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이를 넘어설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한국교회가 여러 문제, 위기에 처했다는 지적과 역사의식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다.

어느 때보다 역사 읽기가 필요한 요즘이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로완 윌리엄스가 표현한 대로 "모든 인간의 문화와 상상력" 안에서 그리스도가 '역사'한다는 믿음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오늘날 세계의 상황은 그저 평면적이고 적대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는 믿음을 강조하지만 저 믿음은 강조하지 않기에, 저 믿음을 믿지 않기에 작금에 상황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의 돌파구를 모색하는 이들, 역사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이 책은 숙독해야 할 중요한 지침서이다.

최종원 / 유럽중세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이며, 캐나다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교수이다. 경희대학교에서 회계학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서양사를 공부하고 영국 버밍엄대학교에서 중세 말 잉글랜드의 대학과 종교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한국교회 회복의 시작이라고 믿는 그는 인문학적 시각과 통찰로 한국교회를 읽어 나가는 글쓰기와 강의를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홍성사),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비아토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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