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때의 감동

2000년 9월 18일. 오스 기니스의 <소명>(IVP)이 번역가 홍병룡의 번역으로 한국에 처음 출판되었을 때, 당시 나는 신학대학원 2학년으로, 서울의 한 지역 교회에서 고등부 담당 교육전도사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사역하던 20년 정도 된 400명 규모의 장로교회에는, 장년 수에 비해 청년, 대학생 수가 많았다. 대학부와 청년부를 모두 합쳐 80명~100명이 출석하고 있었는데, 딱히 청년 프로그램이 잘 구비되어 있거나,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역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시 청년·대학부가 건실하게 운영된 데에는 아마도 외적 성장과 일회성 이벤트에 목매지 않는, 성실하고 꾸준한 사역자들과 청년 리더들의 존재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당시 두 청년부서 지도부는 모일 때마다 열심을 다해 준비하고 참여한 예배와 성경 공부 외에도, 신앙과 신학, 세계관과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칠 만한 좋은 책을 골라서 함께 읽고 공부하고 토론하는 모임을 이끌었다.

책 읽기 모임을 장기간 꾸준히 이끌고 참여율을 높이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 교회 청년들은 이것을 꾸준히 감당했다. 내 기억으로, 당시 이 청년들에게 가장 큰 도전을 주고 강한 반응을 이끌어 낸 책. 그러니까, 그 이전에 읽었던 모든 책을 최종적으로 수렴하고, 이어서 그 이후 읽게 된 모든 책의 방향과 이정표를 제시한 책이 있었다. 바로 오스 기니스의 <소명>이었다. 다른 교회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당시 우리 교회 청년회에서는 이 책은 그렇게 활약했다. 책에서 큰 영감을 받은 한 청년이 독서 후 받은 감동을 아예 자작곡으로 만들기도 했다. 작사와 작곡을 하고 악보까지 만들면서, 전 교인이 이 노래를 예배와 집회에서 함께 부르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명> 2006년 개정판(왼쪽)과 올해 4월 출간된 확대 개정판(오른쪽). 사진 출처 IVP

2. 19년 후 확대 개정판

올해 4월 26일, <소명> 확대 개정판이 소리 소문 없이 출간되었다. 19년 전, 소셜미디어가 없던 시절에도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기독 지성인과 청년을 각성시킨 책의 명성에 비하면, 이번 확대 개정판의 소리 없는(unsung) 출간은 조금은 의외다. 그러나 이미 2006년 한 차례 개정판으로 나왔고, 이어서 올해 두 번째 개정판이 나온 것인 만큼, 과도한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고도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이 책은 핵심 주장이나 본질, 의도에서 이전 책과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는 것 같다. 다만 내용이 확대되면서, 각 장의 내용이 추가 및 보완되고, 3장(차이점은 차이를 만든다), 4장(반문화적 소명), 5장(하나님의 웅대한 지구촌 프로젝트), 15장(소명의 공동체), 17장(시대의 징표) 등 총 6장이 새로 추가되었다. 따라서 총 30개장으로 구성된 책을 독자가 하루 한 장씩 읽어, 한 달에 독파할 수 있도록 구상했다.

이 책이 유명한 365일 일상 묵상집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 My Utmost for His Highest>처럼 고전의 반열에 올라, 기독교인의 일상을 이끄는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이 저자와 편집자가 기대한 바라고 읽힌다. 다만 한글 번역서(스데반 황 번역의 2015년 토기장이 판) 기준으로 416쪽인 <주님은 나의 최고봉>과 비슷한 페이지 수(460쪽)로 편집된 <소명>이 365일이 아니라 30일 분량이라는 점에서, <소명>은 더 심오하고 촘촘한 독서와 묵상을 독자에게 요구한다.

3. 삶의 목적, 의미, 가치: 소명

초판이든, 개정판이든, 확대 개정판이든, 이 책을 얼마간이라도 읽어 본 모든 이들이 공감하듯, <소명>은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저자 오스 기니스는 확대 개정판 마지막에 실린 '감사의 글'에서, 자신이 '소명'이라는 주제와 30년을 씨름했다고 말한다(431쪽).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일평생 살고, 공부하고, 예배하고, 누리고, 일한 모든 일생의 과정과 흔적을 한 단어로 녹여내려고 노력했다. 마치 개신교 역사가 배출한 최고봉 신학자 중 하나인 장 칼뱅(Jean Calvin)이 역작 <기독교 강요>를 라틴어 다섯 차례, 프랑스어로 여섯 차례나 개정했던 것처럼, 오스 기니스도 자신의 대표작(masterpiece) <소명>을 통해 '한 책의 사람'이 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장마다 너무도 주옥 같은 구절이 많은 이 책은 잠언이나 전도서를 닮은 21세기의 지혜서로도 읽힌다. 2000년 출간 당시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던 '유일한 청중'(12장)이 주는 감동도 여전하다.

19년이 지난 후 <소명>을 다시 읽는 내게는 2000년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두 가지 특별한 특징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저자가 각 장을 예화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예화는 문학, 역사, 시사, 지리, 철학, 정치, 신앙계 인물들의 구체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수많은 책과 신문, 저널, 대화, 만남을 통해 스스로 발굴한 이야기들은 저자 기니스가 다루려는 주제에 정확히 부합하며 그의 주장을 보강하는 탁월한 에피소드들이다. 그러나 이 예화들은 각 장의 주제와 관계없이 별개로 읽어도 재미와 교훈이 풍성하다. 깊이와 진정성, 적용성과 균형이 무너진 과장되고 편협한 말과 이야기, 예화가 난무하는 교회 및 교계에 의미 있는 모범이 될 만하다.

또 하나 눈에 띈 점은 18장부터 21장까지 다루는 주제들이다. 18장(고상한 마음이 짓는 탁월한 죄악), 19장(네게 무슨 상관이냐?), 20장(더 많이, 더 많이, 더 빨리, 더 빨리), 21장(나태함이란 이름의 질병)은 각각 서양 역사 및 가톨릭 역사에서 흔히 '가장 치명적인 일곱 가지 죄악'(seven deadly sins)으로 간주된 소위 '칠죄종七罪宗'을 다룬다. 칠죄종은 각각 교오驕傲(pride), 간린慳吝(lust), 미색迷色(greed), 분노忿怒(wrath), 탐도貪饕(gluttony), 질투嫉妬(envy), 나태懶怠(sloth)를 의미하는데, 기니스는 교오, 질투, 탐도, 나태를 각 장에서 다룬다. 물론 다른 죄악들은 따로 한 장으로 배치되어 있지는 않지만, 책 군데군데서 여러 차례 언급된다. 이런 구성은 특히 이 주제들을 역사 및 문화유산으로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힌 서양인들에게는 더 특별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종과 지역에 관계없이, 인간의 보편적 죄악성을 간파하는 통찰로 가득한 내용이라 한국인 독자도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오스 기니스는 흑맥주로도 잘 알려진 기니스 가문 출신이다. 사진 출처 IVP

4. 기니스

오스 기니스라는 이름에 호기심을 품는 이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기니스(Guinness)라는 이름은 아일랜드의 전설적인 흑맥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따라서 맥주 회사 기니스와 저자를 연결한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둘은 하나다. 맥주 회사 창설자 아서 기니스(Arthur Guinness, 1725~1803)는 27살이던 1752년에 성공회인 아일랜드국교회(Church of Ireland) 주교이자 자신의 대부인 아서 프라이스(Arthur Price, 1678/1679~1752)에게서 100파운드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그는 이 자금으로 양조장을 시작한 뒤, 1759년에 이를 사업으로 발전시켰다. 바로 1759년이 흑맥주 기니스가 탄생한 해다. 금주가 기독교인의 의무로 인식되는 19세기 미국 복음주의나 이 유산을 받은 20세기 한국 개신교와는 달리, 유럽 대륙 기독교에서 금주 전통은 대체로 낯설다. 따라서 대규모 양조업자이자 경건한 신앙인, 박애 자선가라는 정체성은 기니스 가문에 속한 인물들이 공유한 유산이었다.

기니스 가문에는 유명한 기독교인이 적지 않다. 19세기 유명 설교자이자 저술가인 헨리 그래턴 기니스(Henry Grattan Guinness, 1835~1910)는 아서 기니스의 손자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형제단(Brethren) 소속 순회 전도자로 활동하며, 동시대의 찰스 스펄전에 비견되는 영광을 누린 인물이었다. 헨리 그래턴 스미스의 손자인 하워드 윈덤 기니스(Howard Wyndham Guinness, 1903~1979)는 성공회 목회자였다. 영국 IVF 운동의 주요 활동가로서, 캐나다와 호주 IVF를 창시한 인물이었다. 1941년에 중국에서 태어난 <소명>의 저자 오스 기니스는 헨리 그래턴 기니스의 둘째 아들인 거숌 윗필드 스미스(Gershom Whitfield Guinness)의 손자이자 헨리 휫필드 기니스(Henry Whitfield Guinness, 1908~1996)의 아들이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내지선교회(CIM)과 관계한 중국 선교사였다. 위키피디아에는 기니스 왕조(Guinness dynasty)라고도 불리는 기니스 가문(Guinness family)을 다루는 항목이 따로 있을 정도로, 이 가문은 맥주 양조 사업, 정치, 금융, 자선, 종교계에서 엄청나게 활약한 유명 가문이다.

이재근 /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선교학),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복있는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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