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사도신경에서 '성도들의 교제'를 고백할 때 어떤 의미로 이해하면서 고백할까. 많은 경우, 이 고백을 하면서 자신과 같은 교회, 혹은 조금 더 넓혀 자신들과 같은 교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생각할 것이다. 조금 더 확장한다면 다른 교파 사람들이나, 아니면 지구상에서 '사도신경'을 같이 고백하는 사람들로 넓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의 교제'라는 의미는 동시대 그리스도인들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들로 시대를 뛰어넘어 확장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육체적인 산 자와 죽은 자의 의미가(마 22:32)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찰은 신앙의 선배들이 써 놓은 글들로 확대될 수 있다. <영성가의 기도>(비아)는 3세기에서 20세기까지 다양한 신앙 전통에 속한 선배들의 기도문을 다양한 주제로 모아 놓았다. 영적 여정 속에서 내가 느끼는 고민과 갈망들에 대한 주제를 찾아 기도문을 읽을 때마다, 신앙의 대가들이 나를 위해 중보 기도하고 계시다는 심정으로 읽어 보자.

<영성가의 기도> / 이블린 언더힐 쓰고 엮음 / 박천규 옮김 / 비아 펴냄 / 264쪽 / 1만 6000원

지금 이 순간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니콜라스 쿠자누스, 아빌라의 데레사, 존 헨리 뉴먼과 같은 영적 거인들이 나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하나님 안에서 신앙 선배들이 이 책을 통해 나를 위해, 나와 함께, 나에 의해 기도하고 있다는 상상은 전혀 다르게 이 책을 접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독서 방식은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성경을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라는 '거룩한 독서'의 방식을 통해, 내가 읽는 성경 말씀을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이런 독서 방식은 중세를 거치면서, 성경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감동을 주는 신앙 서적으로 확대되었다. 언더힐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폰 휘겔도 영성 서적들을 참고할 때 이와 유사한 방식을 권고했다고 한다.

"그는 언더힐에게 몇몇 신학자와 영성가의 글을 추천하면서 그들의 글을 매일 15분씩 읽으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는 영적 독서란 입안에서 사탕이 녹듯 읽는 이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상이 몸과 마음에 스며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폰 휘겔은 신학자와 영성가의 글은 단순히 지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애정을 담아, 기도를 병행하면서 읽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글에 담긴 통찰이 읽는 이의 혈관을 타고 몸과 마음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야 한다고, 그렇게 읽는 사람의 몸과 마음에 뿌리내려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27~28쪽)

폰 휘겔의 권고는 <영성가의 기도>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이 책을 접할 때 단지 신앙의 선배들이 어떻게 기도를 했을까 하는 지적 호기심보다는 그들의 영혼 중심에서 지금 이 순간 울려 퍼지는 기도로 읽는다면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영성가의 기도>는 언더힐이 쓰고 엮은 두 권의 기도서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 이 책에는 160가지 주제의 다양한 기도문이 있다. 이를 다시 크게 정리해 보면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기도들이다. 흔히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무엇을 요청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언더힐은 '모든 기도의 시작'(38쪽)에서 주기도문을 언급하면서 '주님과 더욱 친밀하게 교제'할 것을 간구하고 있다. 그는 모든 기도의 시작과 과정과 목적은 '주님과의 친밀'로 보았다. 기도는 주님을 더 깊게 알고, 사귀고, 동행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선한 주님, 당신과 우리가 속삭일 때 우리는 연인처럼, 오랜 벗처럼 이야기를 나눕니다. 우리가 주님 곁으로 다가가 당신 안에서, 당신과 하나 되게 하소서"(39쪽)라고 기도드린다.

그뿐 아니라 '영원하신 당신 안에서, 당신과 함께 있기를 우리의 영혼이 연모'(얀 반 뤼스브룩, 63쪽)하며, '당신을 향한 사랑과 경외가 자라 우리와 함께 계신 당신을 느끼고 알게'(무명의 그리스도인, 75쪽)하며, '당신을 찾아 나서는 가운데 당신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켄터베리의 안셀무스, 77쪽) 달라고, '우리에게 보이시는 당신의 형상은 사랑뿐입니다. 당신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하기에 당신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니콜라스 쿠자누스, 85쪽)이라고 고백한다. 기도는 오랜 벗처럼 그리움과 친밀함 속에서 주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고, 연인처럼 꿀같이 달콤한 밀어를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둘째,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걷는 신앙의 여정을 비춰 보는 거울이다. 주님과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이 여정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아는 것 못지않게, 자신을 아는 것이 필요 불가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앙의 선배들은 기도를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 준다.

주님을 빛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마음의 빛 잃기 십상인 당신의 작고 약한 종'(토마스 아 켐피스, 45쪽)인 우리들은 '자기 자신을 믿는 나머지 당신을 신뢰하는 법을 잊어'(장 니콜라스 그루, 47쪽)버리고, '나른함과 짜증, 과민함, 무력감, 혼동의 구멍'(존 헨리 뉴먼, 57쪽)에서 헤매며, '마음에서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욕망'(얀 반 뤼스브룩, 62쪽)에서, '이기적이고 쌀쌀맞고 불친절하고 (중략) 게을렀고, 참지 못했고 짜증을 부렸으며, 완고하고 자신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중략) 항상 제멋대로였고, 작은 상처도 견디지' 못하고(레오 기도문, 88쪽),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모르는'(프랑수아 페늘롱, 99쪽)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런 비천한 피조물에게도 '우리 너머에 있으나 우리 안에 있고, 우리 아래에 있으나 우리 위에 있는 성령'(마거릿 크로퍼, 112쪽)께서 '주님,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는 식견과 언제나 당신을 갈망하는 성실과 당신을 알아차릴 수 있는 지혜와 당신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신실한 마음'(토마스 아퀴나스, 132쪽)을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놀라운 선물'(영국 성공회 기도서 1928, 133쪽)로 가져다주신다고 고백을 한다. 이렇게 기도는 주님과 친밀해져 가는 가운데, 주님의 사랑을 더 깨닫고, 그 사랑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발견하며, 그 사랑으로 변화해 가는 모습을 발견하는 거울이 된다.

셋째, 기도는 사랑의 실천이다. 언더힐에게 기도는 단순히 개인적인 과제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과제였다. <영성가의 기도> 곳곳에는 개인적 영성과 사회적 영성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성가의 기도> 곳곳에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보 기도의 내용이 스며들어 있다. '잠 못 이루는 이들을 위한 기도'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적의 위협에서 우리는 지키는 군인에게 당신의 자비로운 보호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어둡고 외롭고 쓸쓸한 곳에서 우리의 안전을 위해 파수꾼이 된 경찰을 기억합니다. 밤이 깊었어도 자신의 노동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노동자를 기억합니다. 밤낮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웃을 기억합니다. 정의를 위해 싸우고 다치고 옥에 갇힌 우리의 이웃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 주님, 당신과 당신께서 주시는 복이 지금부터 영원히 그들과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189쪽)

이러한 중보 기도는 함께 있지 않은 이, 난민이 된 아이, 어린아이, 수고하고 지친 이, 당신의 모든 자녀, 인류와 모든 교회를 위해 계속되고 있다.

<영성가의 기도>는 다양한 장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하면서 기도드릴 수 있는 모범적인 책이다. 하지만 많은 개신교인들이 기도서를 가지고 기도드리는 것을 낯설어한다. 기도서로 기도드리는 것을 힘들어하는 데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천로역정> 저자로 잘 알려진 존 번연은 공동 기도서 사용을 반대한 결과로 12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고 한다. 번연이 공동 기도서를 반대한 것은 기도가 암송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올리는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번연의 입장은 예식서를 사용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 비전례적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공동 기도서를 통하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이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어떻게 사람들이 공동 기도서를 통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욕망대로 하나님 앞에서 떠드는 불경스러운 일을 행할 수 있는가. 이렇게 공동 기도서로 기도드리는 일은 예배할 때 자기가 생각하거나, 욕망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기도드리는 것을 방지하고, 신학적으로 잘 정리되고 신앙적으로 엄선된 언어로 기도드리도록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기도서를 통해 기도드리는 것이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옹호되고 배척되었는지를 이해한다면,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서의 사용은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기도서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기도드리는 것도 아니고, 기도서를 사용한다고 해서 단순하게 앵무새처럼 기도를 암송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언더힐에게 영성 서적들을 참고할 때 폰 휘겔이 조언한 것처럼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한 단순한 지적 행위로 기도서를 대할 것이 아니라, 신앙 선배들의 삶과 영성이 기도서를 읽는 동안 우리의 몸과 마음 구석구석에 뿌리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기도서를 읽을 때는 얼마나 많은 페이지를 읽었는가보다, 하나의 기도를 읽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이는가에 따라서 더 큰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오성 / 목사, 한국샬렘영성훈련원. 재속 수도 공동체를 탐색하면서 수도 영성에 대한 탐문을 계속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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