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의혹의 학창 시절을 보낸 오정현 목사가 저서 <열정의 비전 메이커> 개정판을 내고 자신의 대학 생활 연도를 모두 삭제했다. <뉴스앤조이>는 4월 '심판대에 선 사랑의교회' 시리즈를 보도하며, 오정현 목사의 학력 기록, 저서 내용, 본인 설교상의 연도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1997년 규장출판사에서 낸 이 책은 당시 오정현 목사 인지도를 크게 높이는 데 기여했다. 20년간 20쇄 이상 찍으며 판매고를 올렸다. 그러나 오정현 목사가 1974년 대학 입학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1977년 강릉 관동대학교에 입학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 목사가 1973~1977년 대학 시절을 언급한 부분의 진위가 의혹에 휘말렸다.

오정현 목사는 개정판을 내면서 연도를 바로잡기보다는 아예 빼 버리는 쪽을 택했다. 개정판에서 달라진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초판 / 집 안팎의 어려움 속에 한 가지 어려움이 보태졌습니다. 대학 입시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신 일이었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18살, 한참 예민한 시절이었습니다. 불합격 통지를 받고 나서도 속울음만 삼키었을 뿐 누구와도 진로를 의논하지 못했습니다. (36쪽)

개정판 / 집 안팎의 어려움 속에 한 가지 어려움이 보태졌습니다. 입시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신 일이었습니다. 한참 예민한 시절, 불합격 통지를 받고 나서도 속울음만 삼켰을 뿐 누구와도 진로를 의논하지 못했습니다. (39쪽)

현재까지 기록으로 확인된 오정현 목사 이력은 1974년 대학 입학 자격 검정고시 합격, 1977년 관동대 입학, 1978년 숭전대학교(숭전대) 편입이다. 1956년생인 오 목사가 18살이었을 때는 1973년, 만 나이로 쳐도 1974년이다. 이때 그는 대학 입시를 치를 수 있는 자격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오정현 목사가 1997년 출간한 <열정의 비전 메이커> 개정판을 최근 펴냈다. 1970년대 대학 생활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저서의 기록과 학력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자, 연도를 모두 삭제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초판에서 오정현 목사는 대학 입학 후 내수동교회에 다녔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 뒤 1년 반이 지나 박희천 목사가 내수동교회에 부임했다고 말한다. 내수동교회 홈페이지를 보면 신복윤 목사는 1973년 4월 부임해 1975년 2월 사임했다. 책 내용대로라면 오정현 목사는 1973년부터 대학에 다닌 셈이다. 개정판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모두 빠졌다.

초판 /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입주 과외를 할 수 있어서 생활의 어려움을 조금은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춥고 배고픈 걸 해결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나갔던 교회가 내수동교회입니다. 담임목사님이 신복윤 목사님이셨는데 제가 늘 새벽 기도에 나가니 새벽 기도에 나오는 젊은 학생이라고 칭찬하시면서 얼마나 많이 사랑해 주셨는지 모릅니다.

그후 일 년 반이 지나 박희천 목사님께서 새로 부임하셨는데 그분 역시 새벽 기도에 대한 열심을 보시고 많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39쪽)

개정판 / 훗날 대학생이 되어서는 입주 과외를 할 수 있어서 생활의 어려움을 조금은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을 해결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울에서는 내수동교회에 다녔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신복윤 목사님이셨는데 제가 늘 새벽 기도에 나가니 새벽 기도에 나오는 젊은 학생이라고 칭찬하시면서 얼마나 많이 사랑해 주셨는지 모릅니다.

그 후 박희천 목사님께서 새로 부임하셨는데 그분 역시 새벽 기도에 대한 열심을 보시고 많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41~42쪽)

초판 / 내수동교회에 본격적으로 나가기 시작한 것은 1973년도부터였습니다. 당시 저는 중·고등부 성가대 지휘를 한 경험도 있었고 교회를 열심으로 섬겼지만 마음 한편에는 풀리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습니다. (47쪽)

개정판 / 내수동교회에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 제 마음 한편에는 풀리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습니다. (51쪽)

오정현 목사는 내수동교회에서 대학부 생활을 했다. 공식적으로 그는 1977년부터 대학에 다녔는데, 검정고시 합격 연도인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대학부에서 어떤 신분으로 활동했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초판 / 대학 시절 제가 받은 큰 축복 가운데 하나는 내수동교회 대학부를 섬기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재수하면서 많이 힘들기도 했지만 믿음으로 이겨 낼 수 있었고, 대학에 입학한 후로는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곧바로 내수동교회 대학부 사역에 미쳐 지냈습니다.

1974년부터 1982년 미국에 건너가기 전까지 8년 동안 '병원 전도'에 매달렸던 것은 그때의 열정들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박희천 목사님의 추천으로 총신대학원에 들어가기도 전에 대학부 지도간사로 임명받은 저는 (하략) (65쪽)

개정판 / 대학 시절 제가 받은 큰 복 가운데 하나는 내수동교회 대학부를 섬기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의기투합해서 만나게 되자 우리 가운데서 '전도'의 열정이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병원 전도에 매달렸던 것은 그때의 열정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총신대학원에 들어가기도 전에 박희천 목사님의 추천으로 대학부 지도간사에 임명된 저는 (하략) (67쪽)

이 부분에서는 여전히 몇 가지 의혹이 남는다. 먼저 오정현 목사가 말하는 '재수'가 대입 재수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맥락상 대입 재수에 성공한 후 1974년부터 1982년까지 내수동교회 대학부 생활을 했다고 이해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1973년 오 목사는 대입 시험을 치를 자격이 되지 않았다. 만약 그가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재수했다고 가정하면, 기록상 드러난 학력과 들어맞는다.

또 오정현 목사는 1974년 초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했으니, 1977년 관동대 입학까지 세 번의 대입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가 74년부터 77년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오 목사는 이런 의혹을 말끔히 해소하기보다는, 초판의 '재수 생활 시절'을 개정판에서 모두 지웠다.

사랑의교회는 <열정의 비전 메이커> 초판의 기록이 안 맞는 데 대해, 오정현 목사의 설교 등 구술을 타이핑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그러나 개정판에서는 연도를 수정하지 않고 모두 삭제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오정현 목사는 2006년 세브란스병원 기독인의 밤 설교에서 "제가 76년도에 대학생 시절일 때 강원도 예수원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고 말한 바 있다. 오 목사는 책에 1976년 예수원을 방문했다고 표기한 대목에서도 연도를 삭제했다.

초판 / 저는 1976년, 예수원에서 철저히 성령께 의지하는 대천덕 원장님의 삶을 접하면서 평소에 믿어 왔던 신앙 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에 눈이 뜨이게 되었습니다. (189쪽)

개정판 / 저는 청년 시절, 예수원에서 철저히 성령께 의지하는 대천덕 원장님의 삶을 접하면서 평소에 믿어 왔던 신앙 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194쪽)

이번 책은 따로 판 올림을 하지 않고 26쇄로 나왔다. 출판사는 규장에서 사랑의교회 산하 국제제자훈련원으로 변경됐다. 오정현 목사는 책머리에서 개정판을 낸 이유에 대해 "20년 전 출간된 책이다 보니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때 가독성 면에서 미흡한 점이 있다. 그래서 꾸밈새를 다듬어 다시 펴내게 되었다"고만 했을 뿐, 학창 시절 의혹에 관해서는 따로 쓰지 않았다.

그러나 오정현 목사의 1970년대 대학 생활에 대한 언급은 다른 저서에도 나온다. 오 목사가 1997년 펴낸 <목회 트렌드 2000>(규장)에는 "대학 1학년 때인 73년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제자 훈련 사역을 배웠다"(231쪽)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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