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편집자들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나

창조주 하나님 신앙의 뿌리가 되는 창세기 1장의 기록은, 하나님이 어둠을 물리치셨다는 것보다 하나님이 어둠을 품고 빛을 창조하여 빛과 어둠이 하루에 공존하도록 만드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당시 사람들이 '빛과 어둠의 싸움'이라는 신화적 이미지에 사로잡혀 승자의 신이 진짜 신이라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갈 때, 창세기를 기록한 편집자들은 자신들이 믿는 창조주 하나님이 '승패의 이분법'을 넘어 모든 것을 품고 사랑하시고 주관하시는 위대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증언하고자 했다.

신앙에 대한 이분법적 질문 중 하나인 '창조냐 진화냐' 물음은,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잘 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the 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가 적용된 '잘못된 물음'의 대표적인 예이다. 창조와 진화는, '이것인가 아니면 저것인가' 차원으로 물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과학 이론과, 이론을 통해 밝혀진 과학적 사실에 따라 진위가 판가름 나는 문제도 아니다.

우선 '내가 믿는 바'는 '과학적 사실의 차원'과 전혀 다른 곳을 가리킨다. 나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인다. 이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전제로 한 '절대'이다. 나는 '절대'의 차원을 가리킬 역량이나 능력이 '절대로' 없는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의 '하루'는 조금 특이하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는 이는 첫째 날이니라." 둘째 날도, 셋째 날도, 넷째 날도, 다섯째 날도, 그리고 여섯째 날도 똑같다. 왜 '밤'과 '아침'만 있고, 우리가 하루를 계산하는 '낮의 시간'은 없는 걸까.

역사적 연구 결과지만, 창세기 1장 기록은 창세기 2장 4절부터 시작하는 에덴동산 이야기와 같은 연대에 기록된 이야기가 아니다. 기록 연대를 따지자면, 에덴동산 이야기는 다윗 왕조 시절이고, 창세기 1장은 포로기 때다. 희한하게도 창세기 편집자들은 오래된 이야기를 2장에 담았고, 포로기 때 이야기를 1장에 수록했다. 왜? 편집자들이 역사적 사실에 무지해서일까. 아닌 것 같다. 유대인의 성서는 원래 기록에 의존한 말씀이 아니다. 암기해서 아들에게 구전으로 전달되던 말씀이다. 그래서 장자(the first-born)가 중요했다. 당시에 장자는 아버지가 전해 주는 말씀을 가장 먼저 받는 사람이었다.

포로기가 되어, 아버지나 아들이, 혹은 모두가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되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성서를 말로 전달해 줄 기회가 더 이상 보장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은 말씀을 본격적으로 기록하고 수집하고 모아 편집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포로기 때 유대인들이 경험했던 세계라는 실재는 '완전한 어둠의 세계'였다. 이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전쟁에 져서 포로로 끌려간 민족에게 무슨 미래의 비전이 있겠는가. 인류 역사에서 이런 상황에 처한 대부분의 민족은 그렇게 사라져 갔다. 실패를 인정하고, 승자의 문화로 동화되어 사라져 간 것이다.

그런데 유대 민족은 다소 특이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었다. 자신들의 패배를 결코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잘못을 책망하시기 위해 바빌론과 페르시아제국을 사용하셨다고 믿었다. 하나님이 언젠가 자신들을 본래의 나라로 되돌려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확고한 믿음을 지켰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 창조의 하나님이 어둠의 세계를 이기고, 새로운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실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은 어둠의 흑암 위에 있고, 바람과 물이 가득한 곳에서 하나님이 선포하신다.

"거기에 빛이 있으라. 그러자 빛이 생겼고, 밤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 말씀을 기록한 유대인들은 과학적으로 이것이 맞는지 틀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괘념치 않았다. 과학적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말씀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과학 이론에서처럼, 인간은 언제나 자기 언어를 사용해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이 언어는 언제나 실재로부터 떨어진, 혹은 추상된 매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포로기 때 유대인들이 겪은 실재 하나님 경험이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될 때는, 언제나 말로 다 담지 못하는 실재의 측면들이 생긴다.

이는 말씀을 전하는 인간의 고의적 누락이나 실수가 아니라, 인간 언어에 내재하는 근원적 한계다. 아울러 인간의 인지는 언제나 실재를 환원하거나 축소해서 인식한다. 3차원 공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실재를 3차원으로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실재의 풍경은 3차원 실재를 2차원 평면으로 환원해 인식한 결과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2차원 평면에서 전개되는 화면의 변화를 입체로 경험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언어도 나름의 맥락(context)에서 강조하는 측면이 생기게 되고, 언어적 맥락에서 강조되지 못하는 측면은 우리에게 인식이 안 되거나 간과된다. 그래서 말씀은 거듭해서 계속 읽어야 한다. 앞서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측면을 생각하고 발견하면서, 말씀의 창조적 힘을 발견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바로 그렇기에 '문자주의적 신앙'이 위험하다. 어느 순간 자신에게 다가온 말씀의 경험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사실'로 일반화하여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에게 그것이 절대 진리라고 하며 획일적으로 강요하면, 인간의 유한하고 편협한 언어로 하나님의 진리를 덮어 버리는 불경한 죄를 범하게 된다.

과학 시대 세속 시민을 위한
창세기 이야기

캐서린 켈러는 우리 시대에 빅뱅 이론과 양자 이론이 전해 주는 세계상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세대에게 어떻게 하면 말씀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양자 이론이나 빅뱅 이론 따위에 상관하지 않는다고? 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말을 할 때는 청중이 전제되기 마련이다. 켈러가 생각하는 청중은 바로 과학 시대 세속 시민들이다. 그녀의 창세기 이야기는, 오늘 우리 시대의 무신론적 세속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이 맥락을 전제하지 않으면 심각하게 오해하게 된다. '창조냐 진화냐'의 이분법적 물음이, 늘 말씀이 전하려는 맥락을 완전히 망각한 데서 온 대표적인 결과다.

켈러는 우선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구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에 주목한다. 통상 이 '흑암'은 '태홈'으로 읽힌다. 고대 근동 지역 마르둑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티아마트'를 가리킨다. 남성 신 마르둑이 폭군 여신 티아마트와의 전투에서 이기고 그 몸이 둘로 찢겨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는 신화가 있는데, 이 신화 속 등장 여신이다. 창세기에서는 이 여신이 어떤 신적인 존재로 등장하지 않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흑암'은 '매우 어둡고 깜깜하다'는 뜻이다. '깊음'(the deep) 위에 매우 어둡고 깜깜한 게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깊음'으로 불리는 것이 어둡고 깜깜하다는 말인지 불분명하다. 어둡고 깊은 심연이 거기 있었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태양신인 마르둑이 어둡고 깊은 심연의 신인 바다 여신 티아마트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것이 고대 근동 마르둑 신화 이야기라면, 창세기에는 전혀 싸움의 흔적이 없다. 아니, 이 '깊음'은 누구와 투쟁하는 행위 주체 자체가 아니다. 지금까지 창세기 1장 해석에는 마르둑 신화의 해석적 흐름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래서 "빛이 있으라" 선포하신 하나님 말씀을, 흑암을 정복한 이야기로 해석해 왔다.

켈러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만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신학적 물음을 던진 것이다. 본문은 전혀 빛과 어둠의 싸움, 투쟁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고대 근동 신화나 그리스-로마의 제국 시절 영지주의 이야기 '프레임'이었지 성서의 편집자가 염두에 둔 이야기 틀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독교 성서 해석자들과 주석가들은 종종 간과해 왔다. 오히려 성서는 "밤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어둠과 밝음은 하루를 구성하는 무리였던 것이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다"고 번역돼 있으나,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말의 원래 단어 '토우바보후'(tohuvabohu)는 오히려 '황량하고 야생적(wild)'이라는 뜻이 더 강하다. 창세기 본문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둡고 깜깜한 심연 위에 빛을 선포해, 이전의 어둠과 혼돈을 물리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엘로힘 하나님이 야생적인 땅과 어두운 심연이 생명의 세계로 함께할 수 있도록 빛을 만드시고, 어둠의 밤과 빛의 낮이 '날'을 함께할 수 있도록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다. 여기에는 고대 근동 신화가 전개하는 전쟁이나 투쟁, 갈등이나 번민이 없다. 밤과 낮은 함께해서 전체 하루 시간을 온전히 구성한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구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어두운 심연은 '수면'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깊은 물이었다. 이는 고대 근동 신화의 티아마트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물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물 위에서 '운행'하고 계셨던 것이다. '운행'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므프트'(mrhpht)는 '운행'보다, 호흡의 진동 또는 대양의 출렁거림처럼 '움직인다', '약동한다'는 뜻에 가깝다. 하나님의 영은 물을 정복하고 복종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땅과 물이 생명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 위에서 약동하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빛과 어둠의 전투와 정복 이미지는 고대 근동 신화 영향도 있지만,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본문으로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를 만들어 전한 탓이 크다. 창세기 본문에는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어떤 힌트나 암시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본문 말씀을 자기 나름의 경험으로 해석하면서,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를 만들었다. 아마도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절대적으로 강조하고 싶었으리라. 하나님이 그리스 신들처럼 어떤 재료를 갖고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정말 '무'(nothing)로부터 세계를 만들어 내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았던 그리스-로마 제국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피부에 와닿는다. 그리스 문화 아래서 신은 '데미우르고'로 'maker'이지만, 이는 신에게만 붙는 말이 아니었다. 구두를 제작하는 사람의 경우 'shoe-maker'에서 'maker'를 그리스어로는 '데미우르고'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리스 문화에서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고 이기적이며 변덕이 심하다. 물론 그는 로마 시대 사람이지만, 그리스-로마 제국 문화는 성서의 하나님과 전혀 다른 신 개념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제국 시대의 문화가 고트족 침공으로 무너져 내리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다. 그 문화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통렬히 체감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천지를 자신의 능력으로 온전히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의지해야 할 문제였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강조하고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를 구성했다. 그러는 와중에 '무'는 어둠, 심연, 티아마트처럼 하나님의 절대 능력과 말씀에 무조건적 복종을 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이로써 2000년 서구 신학의 빛과 어둠, 영과 물질(육체) 간 이분법이 설정됐다. 서구로부터 기독교를 배운 우리도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려는 습벽을 물려받았다.

창세기가 전하는 '창생 공동체'와
과학 이론의 한계

창세기를 읽으면서 켈러는 본문이 오히려 전통적인 이분법 시각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경험했다. 이 본문이 우리 시대 여러 과학적 담론과 신학적 대화를 나누는 데 매우 창조적인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간파했다. 신학의 오래된 이분법적 갈등, 초월과 내재의 이분법마저 넘어서는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은 심연 위에 박동하시면서, 그것들과 더불어 세계의 하루를 매번 열어 주신다. 창세기는 세계와 더불어 자신이 창조한 빛이 잘 있음을 보신 하나님이 무척 좋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새로운 세계의 창조인 것이다.

카오스이론에서는 '혼돈'이 임계점을 지나면,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단계로 도약한다고 말해 주는데, 이 본문의 어두운 심연은 그런 창조적 혼돈이었다. 땅과 심연의 물과 빛과 하루는, 하나님과 더불어 새로운 창조의 하루를 만들어 가는 '창생 공동체'였던 셈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들을 그의 능력으로 하늘나라로 들어 올리시지 않고, 오히려 육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셨다는 '성육신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가. 하나님은 사람들이 어둠으로 칭하고 무섭거나 두려운 대상 혹은 혐오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들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창조 공동체로 부르시고 계신다. 임마누엘,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언제나 함께한다. 켈러는 고대 감독 암브로시우스의 '창세기 주석''을 인용한다.

"그(물고기)는 바닷속에 있고 그리고 파도들 위에 있다; 물고기는 바닷속에 있고 그리고 물의 넘실거림과 더불어 헤엄친다. 바다 위에 푹풍이 휘몰아치고, 바람이 비명을 지르며 난립하지만, 그러나 물고기는 헤엄친다; 물고기는 물과 바람에 집어삼키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헤엄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에게 이 세계는 바다이다. 바다의 조류들은 불확실하고, 그 파도들은 깊으며, 거기의 폭풍들은 맹렬하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이 물고기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세상의 파도가 여러분들을 집어삼키지 못한다."1)

그렇다. 물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는 거친 파도와 폭풍우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물고기가 그 거센 물결을 타고 헤엄치기 때문이다. 암브로시우스는 믿음의 자매 형제에게 당부한다. 물고기가 되라고. 물속을 살아가는 물고기가 되었을 때, 세상의 파도가 결코 여러분들을 집어삼키지 못한다고 말이다. 우리 시대 기독교 신앙인들은 두려움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신앙을 위협하는 온갖 것들을 위험하다고 딱지 붙이고 전쟁하는 데 힘을 쏟는 게 아닐까. 역설적인 점은 그렇게 기독교적 가치가 오염될까 봐 두려워하는 이들이, 다른 종류의 이단들에게는 너무 관대하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 가운데 감리교적 가치, 장로교적 가치, 순복음적 가치 등 교리적 가치에 올곧은 교회가 있는가. 혹자는 어느 교단의 어느 교회를 가도, 교단 혹은 교회 사이의 차이를 모르겠다고 한다. 오히려 교회가 공통적으로 자본주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데 매우 놀라워한다. 자본주의 사고방식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창세기 본문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좋아하셨고 '안식'하셨다고 말한다. 우리 시대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신학이 문제 삼아야 하는 상황은 바로 이것이다.

포스트휴먼 혹은 인공지능 시대라고 불리는 지금 상황에서 요구되는 철학은 공생의 철학이다. 이 공생 개념에는 '비인간'(nonhuman)의 존재들까지 포함된다. 인간뿐 아니라, 자연을 넘어 생태계 전체 혹은 지구 행성 전체를 포괄하는 공생 공동체 말이다. 켈러는 창세기 1장이 바로 이 창생 공동체 이야기라고 강조한다.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적을 구별해 정죄하고 판단하는 데 바쁜 이들에게는 '더불어 함께 살아감'의 가치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무분별해 보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창세기 1장에는 고대 근동 신화가 말하는 신들의 전쟁은 없다. 그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문화다.

두 번째로 과학적 이론과 사실은 불변의 것이 아니다. 진화론은 하나의 이론으로서, 지금까지 관측된 여러 자료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에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코 불변의 진리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를 물리학의 역사를 통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천동설 시대에, 사람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몰라서 불편했던 것이 아니었다.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체계는 필요한 여러 예측을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지만, 로마 시대 이래로 축적되어 온 달력의 오차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실제로 지금도 1년은 365일이라고 상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정확히는 365.25일 정도다. 4년에 한 번씩 윤달을 넣어 오차를 수정하는 것이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전환했다고 해서, 진리의 본래적 성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든, 이는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진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

뉴턴은 중력을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만들어 발표했으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뉴턴 이론이 전제하는 몇 가지 가정을 오류로 만들었다. 뉴턴의 우주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빅뱅 이론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이미 본인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빅뱅 이론을 품고 있었다. 정작 상대성이론이 예측하는 빅뱅 이론을 부정한 것은 아인슈타인 자신이었다. 나중에 이것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했지만 말이다.

말하자면, 과학 이론은 경험이나 관측된 사실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오류가 있으면 언제든지 수정이 가능하다. 물론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진화론은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처럼 자연과 우주의 특정 차원을 설명하는 이론이지,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어야 하는 신앙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문자주의'의 위험성

글을 마치기 전에, 과학 이론을 신앙의 대상으로 도착적으로 격상하려 하는 '과학주의'(scienticism)의 위험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설적으로 과학 이론을 신앙적 수준의 절대로 승격하려는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가 바로 갈릴레오 재판이다. 본래 갈릴레오 종교재판의 핵심 쟁점은 '천동설이냐 지동설이냐'라는 이분법적 선택에 있지 않았다. 근대 역사가들은 당시의 종교재판을 이분법적으로 소묘했지만, 이는 말하고 싶었던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역사를 기술한 것일 따름이었다.

종교재판의 진짜 핵심은 갈릴레오가 과학적으로 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웠던 지동설을 사실이라고 주장하고자 마태복음 11장 12절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본문을 책 서문에 삽입한 데 있었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강조하고자 성서 구절 하나를 인용한 것이 뭐 대수이겠냐고 생각하는 신앙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성서 구절을 자기 입맛대로 인용하는 일은 우리 시대에도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당시는 종교개혁 이후 평신도들의 교권 도전 행위에 가톨릭이 무척 민감하게 반응하던 시절이었다. 평신도로서 신학 공부를 한 적 없는 갈릴레오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성서 본문을 사용한 것은 매우 불경한 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갈릴레오는 교회로부터 후원을 받아 연구를 하지 않았던가. 종교적 맹신의 희생자로 알려진 갈릴레오가 정작 자신의 오만한 과학주의를 주장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성서를 남용했다는 사실이 역설적이지 않은가. 갈릴레오는 왜 성서를 인용했을까.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이론은 천체의 궤도를 원 모양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실제 행성의 궤도는 타원형인데, 타원의 정도가 심해 때로는 태양에 제일 가깝다는 수성이 두 번째로 가까운 행성인 금성보다 태양에서 더 멀어지게 될 때도 있다. 그러니 갈릴레오 이론이 행성의 궤도를 정확히 예측하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자신의 이론을 과학적 관측을 통해 증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금 늦은 시기에 요하네스 케플러가 행성의 궤도가 타원이라는 사실과 타원으로 움직이는 행성의 운동 법칙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다음에야, 갈릴레오의 이론은 과학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갈릴레오는 적어도 '과학주의' 정신에 입각해 성서를 비롯한 다른 자료를 무분별하게 남용하고 왜곡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이는 과학주의(scienticism) 정신에 입각해 종교를 조롱하는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저술들에서 반복된다. 종교적 맹신만큼이나 과학적 맹신도 위험하다.

그래서 '문자주의'를 조심해야 한다. 종교적 문자주의와 과학적 문자주의 모두,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고자 다른 쪽 논리를 아전인수식으로 차용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다. 도킨스와 히친스가 그런 전형적인 태도를 보여 준다.

하나님은 빛을 만드시고 어둠을 물리치신 것이 아니라, 밤과 낮이 하루가 되도록 하셔서 어둠을 품으셨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고, 우리의 고통을 당하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창세기 편집자들이 고대 근동 마르둑 신화와 티아마트 신화를 인용한 것은 이를 믿고 반복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 신화들이 전제하는 약육강식, 무한 경쟁, 승자 독식 같은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비판하기 위함이었다.

창조주 하나님은 어둠이나 심연과 경쟁하거나 싸우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셨다. 창세기 텍스트는 혐오와 차별로 기독교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는 일부 기독교인이 드러내는 잘못된 신앙을 향한 경고의 일침인 셈이다.

1) Peter Cramer, Baptism and Change in the Early Middle Ages, c.200-1150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69; Catherine Keller, On the Mystery: Discerning Divinity in Proces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8], 45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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