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진리에 대한 해석 의지,
그 해석학적 방편의 곤혹

유사 이래로 인간은 '세계'의 기원을 해석하고, '인간'의 영혼을 분석 규명하고, '신'을 인식하고 풀어 밝혀 보려고 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완전하게 해결된 적이 없었다. 이것이 결단코 철학적 문제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비판 사태 해명의 해석학(Hermeneutics) 문제가 철학 영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성서라는 경전이 태동한 이후에 그 문자들의 집합 속에 계시된 진리를 해석하느라 온갖 방법을 동원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알레고리든 문자적 해석이든 역사 비평(Historical Criticism)이든 독자반응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이든, 아니면 최근에 등장한 포스트콜로니얼 비평(Postcolonial Criticism)이나 수사학적 비평(Rhetorical Criticism), 더 나아가서 퀴어 비평(Queer Criticism)이든 여러 방법론을 통하여 성서의 진리를 우려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결국 해석학이란 당대의 산물이기도 하고, 지평의 융합을 통하여 축적된 전통과 개념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텍스트를 분석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한국의 현실에서 서양의 철학이나 신학적 개념은 낯설고 소화해 내기가 지난한 것이 사실이다.

최초의 원본은 사라지고 수많은 사본들의 편린이 총집합한 현재의 성서가 정경(canon)으로 공인된 이후에, 그 사본 조각들이 지닌 자료를 분석하는 일에서부터 그 조각들을 수집, 편집했던 저자들의 신학적 의도, 그리고 그 문서를 회람했던 공동체의 역사적 상황까지 분석하다 보면, 정작 만나야 할 예수의 직접적인 말씀(ipsissima verba)의 흔적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애초에 양식비평학자들이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것과는 달리 다만 추론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설교자들이나 해석학자들조차도 구분 짓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성서의 진리와 해석학적 진리를 혼동한다는 점이다. 계시된 진리라고 배워 왔던 성서의 말씀에 대한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는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성서의 완결된 텍스트성에 대한 회의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서도 인간의 손에 의해 쓰이고 전승된 것이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언어로 고착화된 문서의 불완전성을 완전한 신의 말씀, 혹은 예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겸손한 해석학자의 소양이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신의 말씀을 완전하고 무결점의 문자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 말씀을 대하는 역사적 의미와 해석학적 진리가 시대적 맥락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해석학적 식견이 탁월하다고 한다면 그에 따른 성서의 진리도 좀 더 명쾌하게 풀어낼 수 있으나, 어설프게 해석학적 시도를 한다면 오히려 독이 되는 수도 있다. 심지어 해석학적 도구나 장치도 없이 텍스트를 신비롭게 생각하여 아예 문자로만 푸는 것도 위험천만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자의 해석학적 진리가 수만 가지나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해석학적 진리가 성서의 진리를 대신하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경우에 그 발화된 말을 절대적 진리로 알아듣는 청중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청중들조차도 설교자의 해석학적 진리를 성서적 진리와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는 실정을 감안한다면, 이는 더욱더 구분을 해야 한다. 자칫 자신의 해석학적 진리에 신의 권위를 부여하는 오만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말하는 설교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주석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나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주석을 활용하여 자신의 묵상과 관상을 통하여 텍스트를 우려내는 해석학적 기술을 성실하게 활용하는 사례는 보기 드물다(성실하고 탁월한 해석학적 능력을 갖춘 설교자가 없다고 단정 짓는다고 오해하지 마시라). 목회 상황의 긴박함과 그로 인해 텍스트에 해석학을 적용하여 풀어내는 데 소요되는 많은 시간을 확보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물론 해석학적 도구나 기술을 습득하는 데 어려움을 호소하는 안타까움도 그에 못지않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한국 현실에서 적어도 우리말이나 한자어로 된 성서만이라도 제대로 풀어내는 해석학적 도구나 기술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지 않겠는가.

<성경의 원리 - 상> / 변찬린 지음 / 한국신학연구소 펴냄 / 568쪽 / 2만 8000원

해석의 방편, 서구 해석학 극복하기 위한
동양 해석학의 정초

"우리가 하는 것은 차라리 현존하는 조직들, 즉 우리가 구성원 및 활동가로 속한 조직들 자체를 흔들어 놓는 것(désorganiser), 아니 탈-조직하는 것(dé-sorganiser)이다. (중략) '사라지는 매개자' (하략)."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E. Balibar)의 말이다. 탈조직, 탈제도, 탈종교 등을 통한 어쩌면 탈구축(deconstruction)을 시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성서해석학인지 모른다.

그리스도계에서도 서구 신학과 서구 해석학을 극복하기 위해서 한 낯선 인물이 탈구축의 상상력을 발휘했었다. 그가 바로 변찬린이다. 변찬린이라는 이름이 거명될 때 느껴지는 생소함과 궁금증이 있을 것이다. 우선 변찬린은 한국 기독교의 토착화라는 측면만 고려할 때 유영모와 함석헌 계보를 창조적 계승한다는 정도는 알아 두자. 그는 무엇보다 서구 신학의 성서 해석 전통을 성찰을 한 바탕 위에 동방의 해석학 혹은 아시아 해석학의 성서해석학을 개창한다는 역사적 자의식이 있었다고 할 것이다.

게다가 필자가 보기에 변찬린은 서양철학에 대한 식견도 두루 갖춘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의 저서에서 언급되는 서양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그냥 자신의 풍부한 지식을 나열한 것으로 치부하다가는 그를 과소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바탕 위에서 변찬린은 독보적이고 특수한 해석학을 탄생시키는데, 이른바 '선맥해석학'仙/僊脈解釋學 혹은 도맥상징해석학道脈象徵解釋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한국 종교사에서 뿌리 깊은 도와 선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우려낸 유기적 해석 방법론이라고 볼 수 있다. 서구 중심의 해석학이 분석적 해석학이라면, 변찬린의 동양 해석학은 통합적, 유기적 해석학이라고 칭할 수 있다. "성경은 성경으로 푼다"는 그의 해석학적 대원칙에서 볼 수 있듯이, 성서적 언어의 범주와 구조 안에서 성서의 개념과 문맥들을 풀어 밝히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실제로 그러한 의지는 분명히 그가 말하는 이분법적 사유로부터의 탈피를 선언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성경을 정독正讀하고 정해正解할 수 있어야 정각正覺할 수 있다는 논리와 더불어 성서를 사독邪讀하는 것과 사독私讀을 등치시킨 데에서도 신앙인의 해석학적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드러내 준다.

전체를 관통하는 도의 핵심어는 마치 도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처럼 보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반드시 로고스나 빛, 진리라는 틀 위에서 해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변찬린의 해석학을 들여다보면 그의 방법론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볍게 읽고 적용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이해하기가 쉽다는 것을 뜻한다. 적용을 하는 것에 대한 부담과 노력을 줄이고, 그가 말하려는 것에 대한 명확한 이해만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현장 적용에 빠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간간이 등장하는 종교학적 개념이나 철학적 개념들, 심지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체계를 연상하는 개념어들이나 칸트의 현상계와 예지계를 나눈 해석학적 장치들이 어렵게 느껴질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맥락상 평이하게 읽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평자의 판단이다.

변찬린의 해석학적 관점에서 엿볼 수 있는 여러 특수성들 중에 하나는 '아나키즘적 해석학'이다. 성령의 공동체를 공동각共同覺에 따른 성스러운 한 몸의 조직체로 본다는 것은 신자의 개별적 자유와 보완, 보조를 통해서 공동체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코뮌을 연상하게 한다.

종말에 대한 해석도 비교적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종말은 말씀의 부재와 진리의 부재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해석이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론에서 민감할 수 있는 예수의 신성/인성 문제는 그가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임(변찬린의 용어로 하나님의 씨)이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arche가 사람에게서 나지 않았다(an)는 의미에서 예수는 an-archist(아나키스트)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무기원적인 초월적 존재(an-arche)인 예수를 설명하는 새로운 인식의 틀거리는 가히 독창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신령한 빛, 하느님의 빛에 의해 탄생한 예수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빛이 교감된 자들이 빛의 아들들이라는 확장으로까지 나아가 마치 중세의 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 Eckhart)의 신비적 해석학과 같은 길을 터 주는 듯하다.

더불어 성서의 표면상 서술 양식과 본래의 진술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 상징·비유·도맥·선맥 등의 장치를 통해서 성서의 사실 보도를 명확하게 해석하려는 시도는, 설교자의 해석학적 의지는 물론 응용과 적용 능력을 높여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변찬린의 해석학이 익숙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그간에 서구 신학의 해석학적 개념과 방법론에 충실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양의 관점에서 텍스트를 풀어 밝힌 사례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현재 교회의 현장에서는 대부분 습관적으로 훈육된 해석학에 의해 무비판적이고 대중 야합적인 해석학이나 텍스트의 인위적 해석학이 판을 치고 있다. 해석학적 고민도 없고 해석학적 반성도 전혀 없는 무개념적인 언어로,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언어와 소통이 되지 않는 게토화한 언어로 설교를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따라서 설교자는 가능하면 현상학적인 시각에서 편견과 선입견을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 사태 그대로(zu den Sachen Selbst)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인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변찬린의 도맥이나 선맥이라는 것도 하나의 전제가 될 수 있으나, 그것은 성서를 편견 없이 풀겠다는 현상학적 의지와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는 변찬린의 해석학적 특수성과 교회적 공헌의 가능성을 인정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신학계에서 정평이 나있는 출판사인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간이 되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신학계가 검증한 산물이라는 말이다. 과연 한국교회 현장에서 사용하는 해석학은 존재하는가. 아니 텍스트를 읽어 내려는 해석학적 사투가 있기는 한 것인가.

여러 해석학적 도구나 장치가 있더라도 그 역시 당대의 산물이고 완벽하지 않다.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만일 변찬린의 해석학적 방법론을 하나의 방편으로 삼아 풍부한 해석학적 진리를 도출할 수 있다면, 한국 그리스도계는 이를 환영해야 한다.

지금 정체된 한국 그리스도교의 목회적, 설교적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아무런 장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변찬린이 주장한 것처럼, 성서를 닫힌 텍스트가 아닌 열린 텍스트로서 끊임없이 의미와 진리를 재생산할 수 있는 다양한 도구들이 필요하다. 그중에서 변찬린의 도맥상징해석학, 혹은 선맥해석학을 한번쯤 눈여겨볼 만하지 않을까.

김대식 /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대구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 강사

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