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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교회 아픈 사람들

[정신실의 신앙 사춘기] 상처와 분노에서 치유와 희망으로

정신실   기사승인 2019.04.29  16: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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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실 작가의 <신앙 사춘기>를 단행본으로 출간합니다. 기존에 연재한 10편에 살을 좀 더 붙이고 새로운 글 2편과 부록을 추가해 13편의 글로 재구성해 엮습니다. '건강한 교회 아픈 사람들'도 추가되는 글 중 하나입니다. 단행본 제작비 마련을 위해 텀블벅 프로젝트(클릭)를 시작하니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오늘부터 기존 연재는 다시 읽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 믿는데 교회는 싫어요. 무교회주의자? 아니에요. 교회 가고 싶어요. 다니고 싶은데 갈 교회가 없어요. 좋은 교회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

교회 좀 소개해 달라는 지인들 말에 울고 싶은 심정이다. 찬송가 515장('눈을 들어 하늘 보라') 가사 그대로다. 눈을 들어 여기저기 둘러보나 다닐 교회가 없다.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가 들려온다. "좋은 교회 있으면 소개시켜 주오!" 빛을 잃은 많은 사람들, 길을 잃고 헤매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이 일을 어이할꼬, 믿는 자여 어이할꼬. 플래너리 오코너 소설 제목처럼 '좋은 사람은 드물다.' 좋은 사람만큼이나 좋은 교회도 드물다. 좋은 교회라 한들, 내게 맞는다는 보장도 없다. 교회라고 다 같은 교회인가. 친구가 은혜받는 교회가 내게는 시험거리일 뿐이고, 내게 좋은 교회가 누구에게는 이상한 교회로 비치기도 한다.

개교회는 각각의 고유한 집단, 차라리 하나의 인격으로 봐야 할 것이다. 밤하늘에 치솟은 100개의 빨간 십자가는 100개의 인격과도 같다. 일란성쌍둥이끼리도 어딘가는 다르게 생겼단다. 말만 쌍둥이지, 전혀 다른 인격 둘이다. 한 사람은 이 세상 누구와도 같지 않다. 교회 또한 그러한데, '교회'라 부르면 다 같은 교회인 줄 아는 것으로 생기는 문제가 허다하다. 어느 교회에서 성공했다는 제자 훈련, 주일학교 프로그램, 셀 모임 같은 것을 그대로 가져다 쓰며 성공을 기대하지만, 오히려 전보다 더 나빠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 사람이 어우러져 만든 집단의 생태가 관건일 테니 당연한 결과이지 싶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좋은 교회가 있기나 하겠는가. 내게 좋은 교회가 네게도 좋으리란 보장이 없다. "이러이러한 좋은 교회 있으면 소개시켜 줘"라고 하는 벗에게 되돌려 줄 말은 이것뿐.

"그런 교회 있으면 나 좀 소개시켜 줘."

좋은 교회를 찾는 지인이 사는 곳에 흔히 '건강한 작은 교회', 또는 '개혁적인 교회'로 불리는 교회가 있다면 비교적 맘 편히 소개한다. 교회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주로) 평신도들이 주체가 되어 세운 교회이다. 목회자 주도라 해도 권한은 최소화하려는 의지가 역력해 보인다. 목사 평가제나 임기제를 제도화하고 있고, 교회 정관을 갖고 있거나, 정관에 의거해 민주적인 의사 결정을 구조화한 교회들이다. 교회 추천을 요청해 오는 이들은 대개 교회 생활에 지칠 만큼 지친 사람들이다. 상처도 받을 만큼 받았다. 세상 어디 마음에 꼭 드는 교회가 있겠느냐만, 이들이 더는 실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교회에서 받은 상처라는 것이 알고 보면 대부분 목회자에 기인한다. '교회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건강한 교회들은 그 면에서 안전하다 여겨 일단 추천하고 본다. 목회자의 과도한 권한 행사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곳이 개혁적 교회라고 믿기 때문이다. 목사의 인격조차 보장할 수는 없겠지만 그거야 어쩌겠는가, 지인이여!

좋은 교회 추천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교회 개혁의 기치를 내건 '건강한 작은 교회'에 관심도 애정도 많다. 교회 때문에 고난을 겪고 광야로 내몰린 교인들이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모아 일군 교회가 아닌가 싶어서 그렇다. 흔한 교회 사태를 겪은 후에 어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떠난다. 또 신앙은 더 절절하되 밝아진 귀와 눈 때문에 어느 교회도 나갈 수 없는 이들도 있다. 자포자기식으로 아무 데나 가까운 교회로 가서 선데이 크리스천을 자처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선택 중 하나일 것이다. 바라고 꿈꾸는 그 좋은 교회를 우리 손으로 만들자! 이런 교회들에 마음이 간다. 당연히 끌린다. 정말 잘됐으면 싶다. 교회가 무너진 시대, 마지막 희망의 보루라고 여겨진다. 그 교회들에서 일어나는 일에 귀가 커진다.

그러나 어쩐지 갈수록 우려가 깊어진다. 보란 듯이 잘되어야(?) 할 '건강한' 교회가 잘되고 있다는 얘기를 별로 들어 보지 못했다. 언론이나 소셜미디어에 비치는 것처럼 건강하지도, 공동체적이지도 않은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된다. '건강함'을 표방하는 교회들의 아픈 사람을 많이 만나는 탓이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목회자는 물론 어떤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사유하며 교회의 주인 되기로 한 이들이 만든 공동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은혜로, 기도로' 덮다 악까지 덮어 버리는 획일화된 집단보다는 갈등이 있는 공동체가 더 은혜로울 수도 있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헌데, 그럼에도 나는 건강한 교회의 건강을 묻고, 안녕을 묻게 된다. 자꾸 묻게 된다. 갈등하고 논쟁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교회의 온전함이 거기에만 달린 것은 아니다. 건강한 몸 자신하다 중병 걸리는 것 모르는 운동 중독 아저씨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건강, 건강 하는데 정말 건강한가. 정말 잘됐으면 싶은 건강한 교회들이 잘되고 있는 걸까. 애초 '작음'을 지향하니 잘되는 지표가 눈에 보이는 수량은 아닐 테고. 그 안의 사람들은 건강할까. 교회는 민주적이고 건강한데 그 안의 사람들이 남모르게 아파하고 피 흘리고 있다면.

말이 되어 나온 말은,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이면을 더 투명하게 드러내곤 한다. '나는 괜찮다, 정말 괜찮다' 하는 말에서 우리는 쉽게 말하는 이의 괜찮지 않음을 감지한다. 입만 열면 자식이 주는 용돈 자랑하는 어머니들의 말은 돈만 보낼 뿐 따스하게 돌보지 않는 아들에 대한 섭섭함과 그리움을 쓸쓸하게 드러낸다.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결핍을 드러내고 만다. 충분히 행복한 사람은 '행복하다, 행복하다' 떠벌릴 이유가 없다. 지나치게 건강만 걱정하면 없던 병도 생기게 마련이다. '건강염려증'이라는 병이 있지 않은가. 정말 건강한 사람은 건강하다고 떠벌릴 필요가 없다.

엄밀하게 말하면 '건강한 교회이다'가 아니라 '건강한 교회를 지향한다'이다. 즉 '우리는 지금 건강하지 않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건강한 교회'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 건강에 대한 협소한 해석과 집착으로 건강을 해치고 있는 건 아닐까.

목사의 전횡을 막을 정관이 있고,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이 시스템화된 교회. 그것은 건강을 위한 어떤 수칙을 알고 지키는 것 이상이 아닌 것 같다. "야채를 많이 드시고 견과류도 좋습니다. 일주일에 3회 이상 꾸준히 운동하세요." 야채 위주로 식사를 하고 슈퍼 푸드만 골라 먹으며 꾸준히 운동하는 사람도 중병에 걸린다. 심지어 어떤 야채는 체질에 따라서 독이 될 수도 있단다. 그러니 건강을 위한 몇 가지 권고 사항 역시 기계적으로 적용해서 될 일이 아니다. 정관이 있고, 목회자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권한이 적다고 해서 저절로 건강한 교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유연하지 않은 원칙 몇 개를 지키는 것으로, 그것도 실은 지키지도 않고 표방하는 것으로 '건강한 교회'라 자부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심지어 그런 교회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로 스스로 건강한 신앙인이라 자부하는 것은.

건강한 교회 교인들은 아프다.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아프고 그 안의 사람들은 아프다. 하지만 건강한 교회 교인들은 치명적으로 아프다. 기존의 교회에서 떨어져 나오기까지, 이후에 동병상련의 사람들을 만나기까지,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까지의 상처는 '트라우마'라 불릴 만하다. 목회자는 물론이거니와 한때 기도 제목을 나누며 손잡고 기도하던 교우와 법정 싸움을 하는 경험.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바른말하다 외톨이가 되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한다. 교회를 흔드는 자, 기도하지 않고 말만 하는 믿음 없는 자,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자로 몰리기까지 한다.

이런 경험은 삶에서 부딪히는 여느 스트레스와 다르다. 고려대 의대 고영훈 교수 말처럼 일반적 스트레스는 삶의 항해에서 에너지원이 되는 바람과 같다. 이와 달리 폭풍 같은 스트레스, 트라우마는 조금 다르다. 살아남은 자의 돛을 부러뜨리거나 곳곳에 구멍을 내어 삶의 여정을 방해한다. 폭풍을 만나 난파된 몸과 마음은 치유가 필요하다.

건강한 교회 아픈 교인들이 가진 치명적 어려움은 치유의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치유되지 못한 아픔이 어떤 경우 '분노'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거룩한 분노가 되어 교회 개혁과 뼈아픈 자기 개혁으로 연소되고 말면 좋을 텐데, 그러기는 쉽지 않다. 다루어지지 못한 상처와 분노는 교회나 불특정 목사를 향한 분노로 대체된다. 건강한 교회를 세워 정관을 목숨처럼 지키고 권력을 남용하는 목사를 매의 눈으로 감시하는 것은 거룩한 분노이며 동시에 왜곡된 불화살 쏘기일 수 있다. 상처받은 사람은 극단적이 될 수밖에 없다.

순진하게 교회와 목사를 믿으며 십일조하고 복을 빌던 지난날이 있었다면 십일조 폐지를 주장하며 목사의 사례비를 관리한다. 목사의 권력 앞에 굴종 같은 순종을 했던 만큼의 열정으로 목사에 맞서 끝까지 싸워 논쟁에서 이기기도 한다. 자기 손으로 목사를 자르기도 한다. 이것은 주체적 교인, 진격의 교인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태도이며 과정일 것이다. 다만, 그것이 건강과 성숙의 표징 자체는 아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이 상태에서 자기 팽창에 함몰되는 것이다. '전과 같지 않으니 나는 건강해졌고 성숙해졌다', 하는 순간 치유의 길에서 더욱 멀어질 뿐이다.

인간 본성 안의 성장 욕구에 관심이 많았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H. Maslow)는 '건강한 사람'의 특징을 임상적 관찰을 통해 정리했다. 그중 첫 번째로 꼽는 것이 '사실에 대한 뛰어난 자각'이다.1) 사실을 과장하거나 축소해서 바라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각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트라우마 치료는 일어난 사건의 치유가 아니다. 이미 일어난 사건, 이미 목도한 목회자의 횡령과 성범죄를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것을 보지 않은 눈을 사서 다시 끼울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에 당한 종교적 학대 자체를 어찌할 수는 없다. 다만 몸과 영혼에 남은 트라우마의 흔적들을 해결할 수는 있다.2) 그 흔적이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것과 흡사하다. 그런 의미로 트라우마의 온전한 치유는 자라를 자라로 보고 솥뚜껑을 솥뚜껑으로 보는 것이다.

자라 보고 놀란 사람이 단번에 솥뚜껑과 자라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는 없다. 자라처럼 보이는 솥뚜껑이라도 다가가 열어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나 확인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치유가 일어난 것이다. 목사와 교회로 인해 상처받아 아픈 이들의 치유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자각'이다.

과도한 긍정성을 극한의 부정성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사기꾼 아니면 성인聖人 둘 중 하나로 세상의 모든 목사를 분류하려 한다면 아직 아픈 것이다. 삯군 목사를 분별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교회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 '나는 아직 아프구나'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트라우마 치료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건강하지 않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은 내 판단이 극단적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매슬로식으로 말하면 사실에 대해 왜곡된 자각이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건강한 교회의 아픈 교인들은 교회 구조의 건강함과 자기 영혼의 건강을 분리해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도 사실에 대한 뛰어난 자각이다. 목사의 사기꾼 기질과 독재자 기질을 알아채는 육감만이 신앙 성숙의 지표가 아니다. 사기꾼으로 보이는 목사에게서 선함을, 예수님처럼 보이는 목사의 연약함을 발견할 수 있는 '지각'이 어른스러운 판단력이다.

건강한 교회 목회자는 안녕하실까. 개혁적이고 민주적인 교회는 목회자가 내놓은 권력에 기반한다. 건강한 교회 목회자는 대체로 기성 교회 목회자가 누리는 힘을 자발적으로 내려놓은 사람들이다. 그들 역시 교회에 대해 처절한 실망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목회자가 되기 전, 아니 그 이후에도 무너져 가는 교회에 깔려 아플 만큼 아프고 분노할 만큼 분노했기에 거기까지 흘러들었을 것이다. 건강한 교회 목회자 역시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상처받고 아픈 사람들이다. 결국 동병상련의 아픔으로 '건강함'의 결핍에 꽂혀서 만난 것이다.

거기에 더해, 목회자란 이름이 주는 필연의 상처를 자처해야 한다. 목사에게 상처받아 더는 어떤 목사도 믿을 수 없는 교인들은 자동적으로 자기방어를 할 수밖에 없다. 의식적 선택으로 하는 방어가 아니다. 더는 목사에게 속거나 상처받지 않겠노라 자기도 모르게 가시 옷을 입은 형국이다. 바로 그들을 맨몸으로 끌어안는 것이 목회자의 숙명일 터. 건강한 교회의 목사는 자기도 혐오하는 바로 그 목사의 범죄 대가를 치르는 입장에 놓인다. 어느 작은 교회 목사님이 자신의 목회를 이렇게 소개했다. "써 보지도 않은 거액의 헌금, 휘둘러 보지도 못한 권력에 대해 벌 받고 욕을 먹는 중"이라고.

꼭 개혁적인 교회 목회자라서는 아니다. 내 아버지는 지방에서 목회를 하셨다. 어릴 적 기억이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나름 영적 권위, 실질적 권력을 갖고 있는 목사였다. 과일이든 뭣이든 교인들 가정의 첫 열매는 일단 목사 사택인 우리 집으로 왔다. 목사 대적하면 벌 받고 만다는 건 성경 말씀처럼 믿어졌던 것 같다. 그런 토양에서 목회를 하던 아버지였다. 돌아가신지 한참인데 꾸부정하게 앉아 입 안에 알보칠 바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스트레스로 늘 입 안이 헐었고, 그 스트레스 대부분은 교인들이 찔러 대는 말의 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칼에 칼로 맞서지 못하는 것이 목사의 운명인지라 아버지의 입 안은 자주 터지고 헐었다. (물론 맞서지 않았다는 건 아버지의 말이고, 상대 교인은 장도로 찔렸을지 모를 일이지만) 그런 얘기도 들었다. 부자지간에 목사였다고 한다. 교인들의 무분별한 요구, 무례한 태도에 상처를 받은 아들 목사님이 아버지 목사님에게 전화로 하소연을 했단다. "아버지, 제가 이러려고 목사가 된 게 아니에요." 목사 경력 짧은 아들 목사에게 아버지 목사님이 "그러려고 목사가 된 건 아니지만 네 사례비는 그 비용까지 포함된 거란다" 하셨다고.

교우와 교우, 교우와 목회자 간의 아름다운 신뢰를 팔아 개혁을 산 아프고 슬픈 공동체가 건강한 작은 교회가 아닐까 싶다. 교인도 아프고 목사도 아파 치유의 은총이 필요한 곳이다. 이곳에 필요한 치유는 단지 심리적인 것이 아니다. 목사와 교회로 얻은 트라우마는 심리적 치유 과정으로 닿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궁극적으로는 '망가진 하나님 이미지 치유', 즉 영성적인 치유이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과 우리는 어떻게 믿음의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대상관계이론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는 생애 초기 관계 경험으로 형성된 내적 이미지에서 비롯한다고 한다. 목회상담학 교수인 마이클 세인트 클레어(Michael St. Clair)는 그의 책 <인간의 관계 경험과 하나님 경험>에서 "(개인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내적 표상들과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개인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주관적인 이미지 또한 표상들을 사용하여 이루어진다"고 한다.3) 물론 세속 심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그의 표현으로는 '종교에 관한 심리학자') 하나님을 심리적 실재로만 보지는 않는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을 만나는 인간이 만나는 방식이란 자기 경험 안에서의 이미지라는 것이다. 때문에 개인이 가진 하나님 이미지는 변화한다. 예배 시간에 눈 뜨고 헌금으로 과자 사 먹으면 지옥 보내는 하나님 이미지를 붙들고 성인의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렇다면 건강한 신앙 발달이란 하나님 이미지의 발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해 불가의 고난 앞에서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 꽃다운 아이들이 세월호와 함께 침몰할 때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 목사가 무고한 나를 저주할 때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 묻는 순간은, 이전에 붙들고 있던 하나님 이미지가 파괴되는 순간이다. 가장 아프지만 더 투명한 하나님 이미지를 구축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신적인 연결은 반드시 인간 매개자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 이미지는 사람을 통해 형성된다. 아주 어릴 적에는 전지전능한 부모, 자라면서는 영향력 있는 목회자를 보며 하나님 이미지를 그릴 것이다. 목회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 매개자 되기를 자처한, 사람들 안의 하나님 이미지를 투사받는 존재이다. 성공을 향한 교인들의 욕망 투사를 받아 복 받는 처세술 가르치는 데 충실한 목사가 있다면 지고의 청빈함을 대신 살아 주는 목사도 있다. 건강한 작은 교회 목사의 소명은 기대를 저버린 하나님에 대한 분노의 투사를 받아 내는 것인지 모르겠다. 헌금을 탐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는데 잠재적 헌금 도둑으로 감시당해야 한다. 권력을 행사하지 않겠노라 정관에 합의했고 당연한 권리조차 누리지 않으려 하는데 교회를 지배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는다.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도 지켜 내고 싶은 것을 감시당하는 모욕이라니. 그것을 견디는 것은 가시 옷 입은 이들을 안고 무고한 피를 흘리는 것과 같다. 이러려고 목회자 된 것이 아닌데, 이러려고 건강한 작은 교회 목회를 자처한 것이 아닌데 고통스러울 것이다. 무력감이 들고, 의미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신뢰와 존경을 먹고사는 목회자가 의심과 견제의 대상으로 서 있어야 하는 역설. 그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정신과 의사 앨리스 밀러(Alice Miller)는 어린 시절 학대가 성인의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깊이 연구했다. 학대 경험과 분노를 인정하고 진정한 의사소통의 창구를 찾는 것이 치유의 방법이라고 했다. 그 과정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전문가 증인'이다.4) 이는 폭력을 행사하던 부모를 대신하는 존재이다. 내재된 분노를 인정해 주고, 표출해도 괜찮다고 말해 주며, 할 수 있다면 그 분노를 받아 내기까지 해야 한다. 그럴 때 학대 피해자는 치유의 길에 들어선다. 이전 목사에게 받은 상처로 아픈 교인들에게는 전문가 증인이 필요할 것이다. 그 증인이 또 다른 목사라면 어떨까.

책에서 읽은 '영현장교'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5) 영현 처리 장교의 업무는 사망한 군인의 가족들에게 그 소식을 알리는 것이다. 영현장교는 장교복을 갖춰 입고 찾아가 할 일을 한다. 남편이,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가족은 장교를 주먹으로 치고, 때리고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한다. 그러는 동안 노련한 장교는 무엇을 하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가만히 서서 미망인이 자신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받아 내고, 움찔하거나 물러서지도 않는다. 그만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저 맞고, 당할 뿐이다. 귀신 잡는 해병대 장교복을 입고 말이다. 떼어 내거나 겨룰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맞는 것이 임무이기 때문이다.

아픈 교인과 아픈 목사가 만나 세운 건강한 교회 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난무한다. 깊은 상처의 증상들이다. 오고 가는 폭력 속에 더욱 큰 병을 얻고 흩어질 수도 있다. 유일한 희망은 영현장교 같은 목회자 한 사람이 아닐까. 장교이지만, 힘을 가졌지만 행사하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것이 유일한 임무인 영현장교처럼 말이다. 건강한 교회 아픈 목사님들의 얼굴이 스친다. 맞은 자리에 생긴 흔적들을 안다. 불면증, 우울증, 공황, 소화장애, 낮은 자존감. 가장 위대한 영현장교이신 예수님께서 그 길 따르는 제자를 알아주시길 기도한다. 그 아픈 자리를 만져 주시길 기도한다. 그리고 저들 얻어맞다 죽기 전에 보직 변경해 주시길.

김영봉 목사님의 책 제목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사랑의 대가는 인류 최악의 극형 십자가 아니던가. 건강한 교회 아픈 사람들의 분노는 교회를 향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사랑했던 만큼 실망하고, 실망한 만큼 분노하니 그 분노는 사랑이다. 그 분노를 몸으로 맞으며 견디며 낮아진 자존감으로 무력한 목회자 역시 사랑의 다른 이름을 사는 것이다.

교회의 건강을 애타게 갈구하는 사람은 아프다. 목사도 교인도 모두 아프다. '나는 건강하다'는 자부심이나 몇 가지 수칙을 틀림없이 지키는 것이 건강을 보장하지 않는다. 통증을 통증 그대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때로 도움을 구해야 한다.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환자라는 것을 아는 이만 병원을 찾는다. 교회는 병원이라는 말에 모두 고개 끄덕이며 수긍한다. 다만, 모두 환자인데 나만 건강하다고 믿는 것이 치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착각이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환자임을 아프게 인정하는 것이 치유의 희망이다.

1) 에이브러햄 H. 매슬로, <존재의 심리학>, 문예출판사, 116쪽
2) 베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 -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 을유문화사, 321쪽
3) 마이클 세인트 클레어, <인간의 관계 경험과 하나님 경험>, 한국심리치료연구소, 35쪽
4) 앨리스 밀러, <폭력의 기억>, 양철북, 148쪽
5) 캐런 스피어스 자카리아스, <나는 이제 두렵지 않습니다>, 새물결플러스,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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