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 태초에 하나님이 미디어를 창조하셨다?

태초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실 때 언론·미디어도 있었을까. 언론·미디어는 하나님의 거대한 창조 계획 안에 포함될까. 언론·미디어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결과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창조 섭리 가운데 하나인가. 성경에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한번쯤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다.

기독교 창조신학의 중요성은 단순히 창조 사실보다 창조 '목적'이 있다고 믿는 데 있다. 창조라는 신비 속에서 어렴풋 가늠해 보는 생명의 원형성, 생명이 충만하고 조화로우며 기쁘고 평화로운 상태를 아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하나님나라의 완성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한다기보다 '목적의 성취' 측면에서 보는 것이 더 유용하다. 예를 들어, 오늘날 환경·생태계 문제에서는 창조 때로 돌아가자는 것보다 생태계 기능을 보존하고 가꾸는 일이 창조 목적에 부합한 매우 중요한 소명이다. 만일 언론·미디어도 하나님의 창조 아래 있다면, 목적은 무엇이고 회복해야 할 언론·미디어 생태계의 원형은 무엇일까.

미디어의 핵심은 소통이다. 어떤 물체(object)가 매체(media)가 되려면 소통(communication)이 있어야 한다. 이 세상 어떤 것도 무엇인가와 소통하지 않고 온전히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설령 가능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시인 김춘수는 존재와 관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존재의 의미는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관계성에 비롯한다. 관계성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 즉 소통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소통은 곧 존재함의 증거, 생명력을 상징한다. 어쩌면 이 세상은 소통하기 위해 지어졌는지 모른다. 거칠게 표현하면, 창조 때부터 '소통'은 존재했다. 기독교 전통 속 '삼위 하나님' 개념은 하나님의 관계성과 사회적 소통의 중요한 원형적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관계 속 소통에는 '창조적' 특성이 있다.

기독교는 '소통의 종교'다.1) 예수님을 보라. 말씀(메시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사람의 형상(매체)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됐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와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신다. 유비쿼터스의 원형이자 진실한 사귐(소통)의 원형이다. 주님의 말씀은 언어 형태로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달됐다. 인쇄술의 발달로 이제는 누구나 주님의 말씀을 성경책에 담아서 볼 수 있다.2)

우리는 하나님 뜻을 잘 모를 때도 있지만, 그분은 언제나 우리 마음과 생각을 가장 잘 아신다. 어린 자녀가 웅얼거리고 손짓발짓으로 알 수 없는 시그널을 보낼 때, 부모는 기가 막히게 알아듣는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반면 우리는 도무지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소통 오류가 나면 하나님은 종종 대언자를 통해 말씀을 전하신다. 성경에는 천사, 선지자, 이웃 나라 왕, 말과 자연, 심지어 돌들을 명해서 그분의 메시지를 전하는 (혹은 전하시겠다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이 정도면 '성경은 소통의 교과서'로 봐도 무방해 보인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언론·미디어도 있었을까. 그때 하나님은 언론과 미디어를 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을까. 언론과 미디어에는 지으신 이의 뜻과 목적이 있을까. 그때와 비교하면 오늘의 모습은 어떠할까.

타락한 미디어
- 소통의 기능 오류

미디어의 창조성을 '소통'이라고 정의한다면 미디어의 타락이란 무엇일까. 기독교 전통에서 인류의 타락을 가리켜 하나님과 인간(세상)의 '단절'(being disconnected)로 설명하고는 한다. 이런 맥락에서 타락은 행위로서의 죄(misconduct)가 아니라 존재론적 상태(ontological status)를 뜻한다.

(앞서 살핀 것처럼) 존재의 의미가 관계에 근거한다면, 단절된 상태로서의 타락이란 곧 어그러진 소통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타락이란 '존재의 병듦'을 뜻하며, 어그러진 소통은 '병리적 현상'이다. 따라서 미디어의 타락은 소통의 본질적 기능상 문제를 수반하게 된다. 이를 가리켜 '소통의 기능 오류'(malfunction)라고 하고, 크게 세 가지 기능 오류 증상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생각해 보고자 한다.

미디어의 타락으로 나타난 첫 번째 소통의 기능 오류는 '소통 없음'이다. 소통이 없다는 것은 단절의 첫 번째 증상이다. 파편화한 관계성과 개인주의적 무관심이 만들어 낸 단절이다. 관계의 단절은 가장 심각한 기능 오류다. 마을과 이웃이 사라졌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옆집 사람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세대 간 관심이나 이해도 부족하다.

불안한 청년과 억울한 꼰대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는 듯하다. 그렇게 상대방을 이해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은 결국 자기중심 소통 방식을 유지하겠다는 말이다. 특히 오늘날 미디어는 각 집단의 관심사에 따라 세분화·게토화하고 있다. 소셜 네트워크, 유튜브 등 디지털 미디어는 집단 간 차이를 줄이는 소통 도구이기보다 집단 정체성을 더 강화하는 형태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 기능 오류는 이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바로 '소통하지 않음'이다. 주로 일방적·권위적 태도로 상대방에게 대응하지 않는 소통 방식을 말한다. 전자가 무관심이었다면 후자는 거절과 회피에 해당한다. 이런 현상은 권력의 불균형 때문에 종종 발생한다. 약자들 소리를 귀담아듣지 않는 소위 '불통不通의 리더십'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구약성경에서 사회적 약자의 외침, 절규, 변화를 위한 요구들은 예언자적 소리, 하나님의 음성과 같았다. 그럼에도 타락한 미디어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 미디어가 일부 특권층 입장만 대변하고 소외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면 소통의 창조 목적에 어긋나게 된다.

세 번째 기능 오류는 '거짓 소통'이다. 창세기 3장은 인류의 첫 타락 장면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데, 시작은 바로 뱀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뱀은 하와에게 동산의 모든 나무를 먹지 말라 했느냐고 사건의 본질을 과장하고 왜곡한다. 동산의 두 나무를 제외하면 모든 것을 허락하셨지만, 뱀은 교묘하게 하나님이 금지한 것에 눈을 돌리게 한다. 이어서 그 열매들을 먹어도 하나님 말씀과 달리 죽지 않게 될 것이라고 거짓 정보를 전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오늘로 말하면 '가짜 뉴스'인 셈이다.

뱀은 왜 가짜 뉴스를 유포했는가. 창조의 목적을 훼방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이다. 사랑으로 행복했던 신뢰와 존중, 보살핌과 순종의 관계를 망쳐 놓은 것이다. 타락한 미디어는 가짜 뉴스를 통해 언론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진실을 왜곡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킨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거짓 소통의 목적을 이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디어의 구원은 가능한가

타락한 미디어도 구원이 가능한가. 우리는 종종 기독교인이 미디어를 대하는 태도로, '미디어 금식'과 같이 타락한 미디어를 멀리하는 것과 기독교 미디어를 주로 소비하는 것을 권유해 왔다. 이런 접근 방식은 주로 미디어 콘텐츠를 분석하는 수준에 머무른다는 한계가 있다. 콘텐츠 해석 능력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 기준이 단지 '기독교 콘텐츠인가'로 한정돼서는 안 된다. 목적과 영향이 기독교적인가 따져 물어야 한다.3) 다시 말해, 소통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살펴야 한다.

앞서, 타락한 미디어 특징을 세 가지 소통의 기능 오류로 설명했다. 이는 미디어 콘텐츠가 기독교적인지 여부를 묻는 것을 넘어, 소통의 창조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인지에 더 초점을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미디어를 성과 속으로 구분하고, 마치 죄로부터 멀어짐을 구원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은 제한적 세계관으로는 창조적 소통 기능을 회복할 수 없다. 타락한 미디어를 구원해야 한다면, 그 구원은 미디어의 목적 회복, 관계를 살리는 소통의 회복이어야 한다.

창조적 소통 회복은 시민사회에서 공공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구체화 가능하다. 기독교'만'을 위한 미디어가 아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소통 목적을 회복하는 것으로 인식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성과 속으로 피아를 구분하는 방식에서 함께 살아야 할 한 공동체임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적은 많은데 이웃이 없는 시대에서 미디어의 기독교적 가치는 공동체적 상호 책임과 연대의 방식이어야 한다.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목소리는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그들의 '소리 없는 목소리'에 소리를 더하는 것이 언론의 예언자적 소명임을 강조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공영방송의 역할을 재조명해야 한다. 공영방송은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것에서 다양한 의견들을 담아내는 것을 지향하도록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이를 감시하고 요구하는 역할을 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마셜 매클루언이 주장하듯 "미디어가 곧 메시지"다. 이는 교회의 구속적 실천이 가장 창조적 소통의 메시지라는 점을 상기한다. 따라서 교회가 언론·미디어 회복을 위해 할 일은 이기심에 근거한 '소통 없음'을 극복하는 것이다. 돈과 권력으로 소외되는 목소리를 무시하는 '불통'의 시대에 저항하는 것이다. '거짓 소통'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분열하게 하는 일에 맞서는 것이다.

교회가 소통의 창조적 목적을 회복해, 인류가 상호 의존적이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는 운명 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 주리라고 믿는다. 한국 기독교 미디어 담론이 권력과 힘 때문에 누군가를 외면하지 않기를 바란다. 진실과 정의, 생명과 평화를 위한 창조적 소통 도구로 사용되는 일에 힘과 지혜를 모을 수 있기를 바라며, 부족한 연재의 글을 마친다.

1) 기독교 형성과 전파 과정에서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의 발전은 궤적을 같이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피터 호스필드(Peter Horsfield)는 미디어의 발전에 따른 문화 연구라는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하고자 했다. Peter Horsfield, From Jesus to the Internet (New York, NY and London: Wiley-Blackwell, 2015)
2) 인터넷 및 스마트 기기 발달을 통해, 이보다 더 간편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말씀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매체의 발달로 하나님 뜻을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3) 이를 위해 미디어의 구조적 측면과 제작 환경, 역사적 맥락, 수용자 중심의 연구 등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필자 소개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상덕의 미디어와 한국교회' 전체 기사 목록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