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쪽(왼쪽)과 찬성하는 쪽(오른쪽)이 결정이 나올 때까지 집회를 이어 갔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낙태죄 폐지 여부가 결정된 4월 11일. 이날 오전 9시부터 헌법재판소 앞은 이미 경찰들이 줄지어 지키고 있었다. 헌법재판소 정문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이들이, 오른쪽은 폐지를 찬성하는 이들이 자리를 잡았다. 경찰은 양쪽 진영이 만나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를 쳤다.

낙태죄 폐지 운동을 주도해 온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폐)는 오전 9시부터 릴레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청년·청소년 단체들, 성과재생산포럼, 의료계, 정당별로 기자회견을 이어 갔다.

폐지 반대를 외치는 이들은 오후 1시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본격 대응에 나섰다. 낙태죄폐지반대전국민연합(낙폐반연) 주도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맡은 이들은 △생명 보호 명시한 헌법 정신 훼손 △낙태는 태아 살인으로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 불가 △여성 인권 이유로 태아 인권침해 반대 △헌법재판소 판결에 정치적 이념 개입 반대 등을 외쳤다.

낙태죄폐지반대전국민연합은 4월 1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오후 3시경. 모낙폐 쪽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헌법재판소는 형법 269조 제1항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와 270조 제1항 "의사·한의사·조산사·약제사 또는 약종상이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조항이 헌법과 불합치하다고 판결했다.

낙폐반연 쪽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후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이명진 소장이 헌법재판소 결정을 규탄하는 입장문을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이 소장은 "태아는 스스로 자신을 인식할 수 있거나 방어할 수 없는 약자 중의 약자인 반면, 자기 결정권과 낙태를 주장하는 자들은 태아가 마주할 수 없는 강자 중의 강자"라고 말했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 이후, 낙폐반연 쪽은 헌법재판소를 규탄하는 릴레이 발언을 이어 갔다. 아이들도 많이 왔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보수 교계 단체들도 잇따라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전광훈 대표회장)는 "태아를 죽이는 낙태 허용은 절대 불가하며 오히려 살인이라 불러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교회총연합(이승희·박종철·김성복 공동대표)도 "태아의 생명, 즉 타인의 생명을 나의 행복과 유익을 위해 훼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법적으로 보장하고, 옳은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게 함으로써 존재와 생명의 기본 원칙을 뒤흔들어 놓았다"고 평했다.

낙태죄 폐지 운동의 다양한 맥락
여성의 임신·출산 통제 도구
음성화에 따른 건강권 위협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은 정말 생명의 기본 원칙을 흔들어 놓는, '살인'을 정당화하는 일일까. 이런 인식 기저에는 '낙태죄'에서 '죄'를 윤리적 차원으로 받아들인 경향이 강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이야기되는 낙태죄는 말 그대로 임신중절을 택한 여성을 형사처벌하는 '범죄'의 의미다.

많은 개신교인이 혼동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형법으로 처벌받는 '죄'와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다르다. 모낙폐를 비롯한 여러 단체가 주장해 온 '낙태죄 폐지'는 태아를 포기하는 일이 윤리적으로 옳다는 것도, 낙태를 더 많이 하게 해 달라는 권리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위헌 판결을 내린 것도 여성의 낙태 결정을 비범죄화하겠다는 것이다. 

낙태죄 폐지 운동에는 여러 맥락이 존재한다. 먼저 국가가 낙태죄를 이용해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제한해 왔다는 문제가 있다. 한국은 과거 '가족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낙태를 좋은 것이라고 권장했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한 명만 낳아 잘 기르자', '하나만 더 낳고 그만두겠어요'는 1970~1980년대 정부가 공개적으로 내걸었던 슬로건이다. 국가가 임신, 출산, 양육의 주된 역할을 하는 여성의 의사와 상관없이 형법으로 결정을 제한해 온 것이다.

또 국가는 '정상' 여성의 낙태는 제한하면서도 '비정상' 장애인의 낙태는 법으로 보장해 왔다. 모자보건법 제14조에는 우생학적·유전적 정신장애 혹은 신체장애를 지닌 여성, 전염성 질환이 있는 여성은 배우자 동의를 받아 임신중절수술이 가능하다고 명시했다. 일등 시민과 이등 시민으로 사람을 분류하고, 정상적이지 않은 몸을 가진 여성들의 낙태는 적극 권장해 온 국가. 장애 여성들은 이 같은 차별에 저항하고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해 달라며 낙태죄 폐지 운동에 동참했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쪽은 같은 날 오전 9시부터 낙태죄 폐지의 당위성과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임신중절의 음성화도 문제다. 낙태는 법적으로 금지돼 있지만 암암리에 시술받을 수 있다. 하지만 사문화했어도 법은 법이라, 의사들이 시술을 꺼린다. 이렇게 되면 여성의 건강권이 위협받을 수 있다. 실제로 2012년 수능을 마치고 임신중절 시술을 받던 학생이 응급 상황에 처했는데, 처벌받을 것이 두려웠던 집도의는 그를 큰 병원으로 이송하기를 주저했다. 응급처치를 미룬 의사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는 일이 발생했다.

임신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닌데도, 남성은 아무런 제재가 없다는 점도 계속 문제 제기돼 왔다. 위와 같이 음성적으로 임신중절수술을 받다가 사망한 사례에서도, 남자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고 물을 수도 없었다. 여성에게만 임신과 출산 책임을 지우는 일은 옳지 않다는 게 낙태죄 폐지를 주장해 온 사람들의 입장이다.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문화는 한국 사회에 오랫동안 퍼져 있었다. 채용 면접에서 여성에게만 임신 계획을 물어보고, 출산한 여성이 육아휴직을 마음대로 쓰지 못해 퇴사하는 경우가 아직도 다반사다. 임신을 이유로 누군가를 차별하면 안 되지만, 현실에서는 버젓이 차별이 발생하고 있다. 막을 수 있는 뾰족한 방법도 없다.

이번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에는 이런 다양한 맥락이 있다. 헌법재판소는 임신 중지 문제를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결정권'이라는 구도로 다루지 않았다. 국가와 사회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고 안전한 삶의 조건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로, 현행 낙태죄가 헌법에 불합치하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낙태죄 폐지에 함께한 개신교인들
"낙태 칭송 아닌 기만적 권력 규탄
고통스럽고 슬픈 일이지만
감옥 갈 일은 아냐"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임신중절의 윤리적 정당성을 확인해 준 게 아니다.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 특히 개신교인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이번 결정으로 생명 경시 현상이 발생하지도 않을 것이다.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낙태죄가 폐지되면 낙태 시술 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서구 여러 나라를 봤을 때, 낙태죄를 폐지했기 때문에 낙태하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사례는 없다.

같은 날, 낙태죄 폐지를 찬성하는 가톨릭·개신교인들의 기자회견도 열렸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이번 결정은 낙태 책임을 여성에게만 지워 온 부당함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낙태죄 폐지를 지지하는 개신교인도 많다. 4월 1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는 낙태죄 폐지를 외쳐 온 개신교 단체들과 천주교성폭력상담소가 '종교계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여성이 임신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과 경험, 그 몸에 새겨진 사회적 모순과 억압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며 낙태죄 폐지를 촉구했다.

기독여민회 남궁희수 목사는 "이곳에 선 이유는 낙태를 당연시하고 칭송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남궁 목사는 "인간을, 여성을 도구 삼아 사회를 통제하고 조정하려는 위정자들의 위선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지배의 논리를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는 기만적 권력을 규탄하려는 것이다. 타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며 의무는 저버리고 권리만 주장하는 비겁한 부성을 고발하려는 것이다. 임신과 출산, 양육이라는 복된 권리를 두고 움츠리고 두려워하는 무력한 모성을 애탄해하는 것이다. 이 비통한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고 억울한 결박을 풀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낙태죄 폐지 촉구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폐지 판결을 내리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김신애 연구원은 "낙태가 아무리 흉하고 고통스럽고 슬픈 일이라도 임신을 중단한 여성이 감옥 갈 죄인은 아니다. 낙태죄는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에 처해 아파하는 사람 손에 수갑을 채우는 일이다. 지난 66년간 여성들에게 저질러 온 무례와 인권침해에 대해 이 나라는 사죄해야 한다. 다시는 낙태로 인해 죽음의 위협에 몰리는 여성들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사단법인 평화의샘 부설 천주교성폭력상담소 남성아 활동가는 "낙태죄는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국민으로서 보장되는 기본적 권리를, 개인으로서 침해당하지 않는 삶을 위해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 일부에서 주장하듯, 다른 생명을 경시하거나 다양한 성적 주체를 부인하고 유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현재 살아 있는 존재들의 존엄성을 중시하기 위해' 권리가 보장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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