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처음부터 평신도 운동이었다. 교회 역사에 있었던 교회 갱신이나 부흥은 성직자의 권력 독점에 대항해 평신도의 권리와 의무를 되찾으려 했던 운동이었다." - <존 스토트가 말하는 목회자와 평신도>(아바서원)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 봉사만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뉴스앤조이>는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진격의 교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합니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 진격하는 크리스천들의 모습을 통해, 지금 한국 사회에 보여 줘야 할 진정한 기독교의 역할과 모습이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기로에서 소명과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 전문 영역에서 기독교인으로서 고군분투하며 사는 집사님·권사님·장로님, 성경에서 가르치는 모습을 좇아 약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교인분들을 소개합니다. 제보도 환영합니다. 주변에 '진격의 교인'이 있다면 언제든지 <뉴스앤조이> 홈페이지이메일페이스북카카오톡 등으로 알려 주세요. - 편집자 주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평화나무농장'은 북한과 가깝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포천인데 거리상으로는 강원도 철원과 근접하다. 평화나무농장에 가려면 38선을 넘고 한탄강도 건너야 한다. 기자는 봄볕이 내리는 4월 4일, 철원으로 향하는 87번 국도를 1시간 반 넘게 달려 농장에 도착했다.

봄맞이가 한창인 평화나무농장은 분주했다. 밭에서 일을 하던 원혜덕 씨(64)가 반갑게 달려 나왔다. 대뜸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보여 주며 "이 파 좀 보세요. 너무 예쁘지 않아요? 색깔도 모양도 어쩜 이렇게 예쁜지 몰라요. 게다가 맛도 좋아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직접 기른 농산물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이 말투에 듬뿍 묻어났다.

원 씨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디선가 농장의 마스코트 레트리버종 레오와 리키도 달려왔다. 둘은 처음 보는 사람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쓰다듬어 달라며 연신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 뒤로 초록 싹이 무성한 밭에 배를 보이고 누워 한가롭게 햇볕을 쬐고 있는 작은 돼지 한 마리가 보였다. 평화나무농장 동물들은 말 그대로 평화로워 보였다.

평화나무농장에는 소와 돼지가 어울려 생활한다. 레오는 소 물통의 물을 제 것마냥 들이켰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평화나무농장에는 다양한 생명체가 어울려 산다. 소 25마리, 돼지 20여 마리, 산양 20여 마리가 한 축사에서 생활한다. 동물별로 구획이 나뉘어 있긴 하지만 돼지와 소는 경계 없이 어울려 지낸다. 축사를 보여 주는 김준권 대표(72)가 자식들처럼 아끼는 동물들을 소개했다. 농업 재료로 쓰이는 소똥을 설명하던 김 대표는 축사 안으로 들어가 맨손으로 소똥을 들었다. 그러더니 똥이 부드럽다며 짓이겨 보이기까지 했다.

다양한 동물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평화나무농장의 주인공은 사실 동물이 아니다. 이곳의 소 대부분은 생명역동농업(Bio-Dynamic Agriculture)에 꼭 필요한 소똥을 대기 위해 키우는 것이다. 소똥으로 퇴비를 만들어 밀, 콩, 수수, 귀리, 루바브, 호밀, 보리, 토마토, 양파, 파, 고추 등 다양한 작물을 생산한다.

지난해에는 비닐하우스 일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벼를 심었다. 벼농사를 위해 임대했던 동네논이 한탄강댐에 편입하게 돼 내린 결정이었다. 이는 농사일을 아는 사람이 보면 미친 짓이다. 수익 관점으로는 비닐하우스가 훨씬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대표는 벼농사를 포기할 수 없었다.

김준권·원혜덕 부부는 기독교인으로서 정직하고 바른 먹거리를 만들며 이웃, 땅, 동물과 평화를 꿈꾼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김준권·원혜덕 부부는 한국 유기농업의 산증인이다. 김 대표는 정농회 초대 회원으로 평생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농사법을 연구해 왔다. 원 씨는 한국 유기농업 시초 고 원경선 풀무원농장 원장 넷째 딸이다. 두 사람은 풀무원공동체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양주 풀무원농장에 이어 20년 전부터 포천 평화나무농장에서 농사를 짓고, 먹거리를 나누고,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고 있다.

생명이 역동하는 농법?
식물 성장에는 '달'의 역할도 중요
별자리 기운 고려한 농사법
유기농법의 최고봉

김준권 대표는 유기농 농사에 이어 2005년부터는 '생명역동농업'을 실천하고 있다. 이름도 생소한 이 농사법은 1924년 독일의 인지학자 슈타이너가 창안한 것이다. 미국·호주·독일 등 전 세계적으로 유기농의 최고봉으로 인정받는다. 독일 생명역동농업협회가 인증한 제품에는 '데메터'(Demeter)라는 브랜드를 부여한다. 최상의 품질을 지닌 농산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김준권 대표에게 설명을 듣다 보니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얼핏 듣기에는 미신 같은 요소가 포함돼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생명역동농업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두 가지. 하나는 식물 성장에 영향을 주는 달과 열두 별자리의 역할이고, 또 다른 하나는 증폭제(preparation)의 역할이다.

생명역동농업을 설명한 책을 보여 주는 김 대표. 영락없는 농부의 손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식물은 태양이 주는 에너지, 물·온도 등 주변 환경 영향을 받아 성장한다고 배웠다. 어두컴컴한 달빛이 식물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일까.

김준권 / 지구와 달이 서로 잡아당기는 힘, 인력引力은 식물을 위로 자라게 해 줍니다. 우리가 평소에 인력을 느낄 수는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에너지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태양의 중요성은 물론이고, 달과 열두 별자리가 식물에 미치는 영향을 농사에 적용하는 게 생명역동농업입니다. 열두 별자리마다 영향을 미치는 식물 종류가 다르거든요. 물, 불, 흙, 빛의 기운이 언제 강하냐에 따라 파종 날짜가 달라지지요. 생명역동농업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고려해 농사짓는 방법입니다.

평화나무농장 김준권 대표는 소가 막 싸고 간 따끈한 소똥을 맨손으로 들더니 이를 짓이겨 보였다. 소똥은 증폭제 제조에 필요한 주요 원료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또 다른 주요 요인인 증폭제도 생소하긴 마찬가지다. 생명역동농업에서 말하는 9가지 증폭제는 아주 적은 양으로 땅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다고 해 '증폭제'라고 불린다. 파종하기 전 땅에 소량을 뿌리거나 퇴비에 넣어 두면 최상 품질의 농작물을 길러 낼 수 있다.

이 증폭제는 아무나 만들 수 없다. 재료를 구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부는 매년 두 차례 생명역동농업회 회원과 농사법에 관심 있는 사람을 초청해 함께 만들고 결과물을 나눈다. 소뿔에 소똥을 담아 가을에 땅속에 묻어 뒀다가, 봄에 캐낸 뒤 물에 넣고 저어 만든 게 500번 증폭제다. 또 다른 증폭제를 만드는 데는 소머리뼈, 수사슴 방광, 톱풀, 캐모마일, 쐐기풀 등이 필요하다.

일 년에 두 차례, 생명역동농업회 회원들과 함께 증폭제를 만든다. 소똥을 가득 채운 소뿔을 몇 달간 땅에 묻는 작업을 하는 김준권 대표. 사진 제공 원혜덕

증폭제에 쓸 재료를 기르는 것도 평화나무농장 몫이다. 미신처럼 보일지라도 독일·스위스 등지의 유기농업 연구소에서는 이미 생명역동농업과 관련해 연구가 끝났다. 그럼에도 아직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농사법. 김준권·원혜덕 부부는, 15년이 지난 이제서야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늘어났고, 이 농법으로 기른 작물을 한번 맛본 사람들은 이를 다시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창조 섭리 따르는 정직한 농사
45년 전 "돌아서자" 결심에
뚝심 있게 한길만 고집

한길만 걸어온 것을 인정받는 기회도 있었다. 농업 발전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25회 대산농촌문화상 농촌 발전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원혜덕 씨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알음알음 팔고 있는 농산물도 이제 없어서 못 팔 정도다. 한번 맛본 사람 중에는 판매 공지가 뜰 날만 기다린다는 이도 많다.

1975년, 유기농업을 하겠다고 선택한 후 생명역동농업의 길을 가는 지금까지 어려운 일도 많았다. 45년 세월을 2시간 만에 다 듣기는 역부족이었다. 양주 풀무원농장에서 포천 평화나무농장으로 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계획한 대로, 뜻대로만 되지도 않았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원 씨가 잠깐 끼어들었다.

원혜덕 / 남편은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쭉 이어 갔어요. 공동체에 있다가 나왔는데 당시 여기는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아이들 교육비, 생활비는 내가 양주에서 동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충당했지요. 우리가 제대로 농산물을 팔기 시작한 건 5년 정도밖에 안 됐어요. 그럼에도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오히려 남편이 한눈팔지 않고 땅에 뿌리를 두고 농사만을 지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토마토를 수확한 비닐하우스에는 다음 농사를 위해 호밀을 뿌려 둔다. 겨우내 자란 호밀을 베어 염소 먹이로 쓴다. 토마토밭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한 우물만 팔 수 있었던 건 농사일을 소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김준권 /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나도. 허허.

원혜덕 / 남편은 1975년 28살 때 고다니 준이치 선생 강연을 직접 듣고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충격을 받았어요. 신앙인으로서 농사가 딱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 거죠. '신앙인으로서, 또 농부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은 그때의 다짐이, 지난 45년간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김준권 / 개인적으로 기독교인으로서 농사만큼 좋은 일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정직하잖아요.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고. 우치무라 간조가 한 사람이 신앙인인지 아닌지는 직업을 보면 된다고 했어요. 교회 열심히 다니고 신앙 있는 것처럼 말해도 다른 사람과 사회에 유익을 끼치는 일을 하는지 보라는 거죠. 직업은 삶의 바탕을 이루잖아요. 당시 나는 농업이야말로 기독 신앙인이 택하기에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땅·동물·이웃과의 '평화' 꿈꾼다

김준권·원혜덕 부부는 포천 사랑방교회(최성필 목사)에 출석하지만 신앙의 뿌리는 기독동신회다. 기독동신회는 영국 플리머스형제회에 영향을 받은 교파로 '형제단'으로 불리기도 한다. 모든 신자는 제사장이라는 원리로 기성 교단의 목사-평신도 관계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아나뱁티스트와 비슷하다. 고 원경선 원장이 기독동신회 출신이다. 두 사람도 자연스레 그 영향을 받았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새끼 염소들은 김준권 대표를 어미처럼 따랐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두 사람은 요즘 농장 일 외에도 마음을 쏟고 있는 게 또 있다. 4월 27일 DMZ 평화누리길 일대에서 열리는 'DMZ 민 플러스 평화 손잡기'다. 남북 평화를 기원하며 경기도 강화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500km에 이르는 DMZ를 손에 손을 잡은 사람들로 이어 보자는 게 행사 취지다. 볕이 따뜻한 봄날, 강화·파주·연천·철원·화천·양구·고성으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평화나무농장도 손님맞이를 계획하고 있다. 멀리서 오는 참가자들을 위해 하룻밤 숙식을 제공할 예정이다. 공동체 생활에 익숙했던 부부는 평화를 위해서라면 집을 내어 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북한과 가까운 이곳이 하루빨리 평화의 기운으로 가득 차기를 부부는 바라고 있다.

땅에도 해를 끼치지 않고, 동물끼리도 사이가 좋은 평화나무농장. 농장 이름에도 평화가 들어가고, 평화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두 사람이 생각하는 '평화'란 무엇일까. 이들은 평화가 거창하거나 어려운 게 아니라고 했다.

김준권 / 한자 평화平和에서 화는 벼 화에 입 구를 합한 거죠. 쌀이잖아요. 벼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고르게 하는 게 평화예요. 먹거리를 만드는 것은 결국 농사를 짓는 행위고요. 먹거리를 함께 나누는 게 평화라고 생각해요. 평화가 깨진 사람과는 밥상을 함께 하지 않잖아요.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주변 사람과 평화를 이루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닐까요.

원혜덕 / 기독교인으로서 평화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지요. 이 세상에 평화가 없기 때문에 너도나도 평화를 부르짖는 게 아닐까 싶어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세우신 곳도 평화원이고, 사람이 도달해야 할 마지막이 평화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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