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하나님의 신비 말끔히 설명해 버리려 하는 '반신학'을 넘어서

[길 위의 신학] 여성과 과정철학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현대신학의 과제

박일준   기사승인 2019.03.28  20:08:32

아래의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ad42

지난 수십 년간 신학은 소위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라는 명칭으로 신학의 체계를 설명하고 주해하는 과제를 반복해 왔다. 출판된 조직신학 개론류의 책들을 보면, 교리신학 주제들인 신론·삼위일체론·성령론·교회론·인간론·죄론 등을 나열하고, 그것을 현대 학문의 새로운 발견들과 어떻게 조우하게 할지를 고민하는 물음과 신학적 대안을 모색한다. 중세적 교리신학을 반복하지 않고 시대에 맞는 신학적 개론을 구성하기 위해 도입한 '조직신학' 분야는 이제 그 설명적 적실성과 지적 호소력을 상실한 지 오래되었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누가 '신론'·'삼위일체론'·'교회론' 등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우리의 세속적 삶의 방식을 돌아보고자 할지 의문스럽다.

사실 교회 현장에서 선포되는 설교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현대 개신교회를 분할하는 교파나 교단의 구별이 행정권과 사법권의 법률적 권리와 한계를 규정하는 것 이외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감리교·장로교·침례교·순복음 등을 구별하는 교리적 차이가 현장에서는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감리교 목사가 주도하는 성경 공부 교재는 장로교나 침례교에서 사용해도 아무런 교리적 부작용을 야기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교리가 무기력해지고, 교단별 차이가 현실적으로 무의미한 세계에서 왜 현대신학의 구성은 낡은 교리적 주제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현대 신학자들, 특별히 대한민국 신학자들의 학문적 무기력증을 반영한다.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세계는 급격한 변화를 겪어 왔다. 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가 '조직신학'이라는 명칭과 분야를 세우던 시절에는 우리에게 공기처럼 느껴지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없었다. 불과 1980년대만 해도 가상현실은 그저 공상과학소설이나 만화의 일이었지 현실 생활과 접목된 말이 아니었다. 틸리히와 바르트 시절, '여성'은 신학의 주제에서 그저 한두 문장으로 스쳐 지나가는 주변적 주제들에 불과했다. 하지만 21세기 우리에게는 이제 소수자 관점을 대변하는 주요 용어가 바로 '여성'이 되었다. 즉 '소수자'의 개념적 경계가 단지 인구상의 숫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나 역량 면에서 배제된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바뀐 것이다.

이런 시대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채, 기존의 교리적 주제들에다가 변주로 시대가 필요로 하는 주제들을 슬며시 끼워 넣다 보니, 조직신학은 더 이상 시대를 새롭게 이끌어 가거나 변혁해 내는 학문적 역량들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사람들 주의를 끌 만한 이유가 없어진 분야가 되었다. 교회 내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교회 바깥의 사람들에게도 말이다. 이제 교회론은 선교신학 분야에서 더욱더 활발히 다루는 주제가 아닌가. 성령론도 선교학적으로 더 중요한 주제가 되지 않았을까. 아니 이런 교리적 용어들을 왜 이런 식으로 접근하고 이해해야 되는지가 더 이상 신학을 대하는 이들에게 잘 납득되지 않을 때가 많다.

캐서린 켈러의 <길 위의 신학 On the Mystery: Discerning Divinity in Process>은 신학을 접근하는 '제삼의 길'을 모색한다. 사실 '길 위의 신학'(theologia viatorum)이라는 이름은 켈러 본인의 신학적 주제가 아니라, 본래 칼 바르트가 제안한 신학적 개념이다. '길 위의 신학'이라는 말을 통해 바르트는 신학이 결코 진리를 파지할 수 없는 근원적 불가능성을 주장하고자 했다. 켈러는 이 바르트의 용어를 자신의 과정신학적 관점으로 전용한다. 모든 신학은 절대적 진리의 결론을 내리고 판정하는 교리적 작업이 아니라, 인간의 유한한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에 대한 무모하지만 끝없는 탐구의 여정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 말을 차용한다.

켈러는 '길 위의 신학'이라는 말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데, 그것은 곧 '신비이신 하나님'이 될 것이다. 우리말 번역 성경들은 고린도전서 2장 7절을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표현해 놓았으나, 켈러가 참고하는 영어 성경을 직역하면 "그러나 우리는 신비 가운데 하느님의 지혜를 말한다"는 말이 된다. '신비 가운데 말해지는 하나님의 지혜'가 '은밀한 가운데' 말해지는 하나님의 지혜로 표현되면서, '신비'(mystery)의 함의가 상실된 것이다. 우리는 그 신비를 궁극적으로 알 수 없다. 우리의 유한한 이해의 범위 내에서 한정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소위 보수를 자처하는 신학과 진보를 자처하는 신학 모두 자신들만의 특정한 '진리' 개념으로 서로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동전의 반대 면인지도 모른다.

캐서린 켈러는 교리적 주제들의 해석을 놓고 진보와 보수로 집안싸움을 하는 기존 신학의 소란에 발을 들이기보다는, 신학과 교회와 세계와 우주를 전혀 다른 조망으로 바라보는 제삼의 길을 말한다. 제삼의 길이란 하나님의 지혜를 '신비' 가운데 조망하는 것이다.

교의학적 주제를 반복하는 신학은, 진리를 드러내는(re-veal) 작업 그래서 하나님의 신비를 말끔히 설명해 버리는(explain away) 일을 시도한다. 인간의 언어와 개념을 가지고 말이다. 여기서 교의학적 시도는 그 자체의 모순에 처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와 개념을 초월하신 분 아니신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를 인간의 언어와 개념으로 다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신학은 진리를 그대로 다 설명하지 못한다. 신학은 철저히 인간의 작업이다. 인간의 언어적 도구를 가지고 하나님의 신비를 온전히 설명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반신학적이다. 신학은 진리로 나아가는 길에 있는 나와 우리의 시대적 정황 속에서 신-담론(God-talk)이 어떤 의미를 담지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며 대안적 사유를 모색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켈러의 <길위의 신학>은 우리 시대 '보수'와 '진보'로 대변되는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라는 이분법을 강하게 비판한다.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보수 진영의 신학은 인간의 이성적 역량과 언어가 지닌 한계를 망각한 채 자신들의 논리만이 진리를 담지한다고 우겨 대고, 진리의 인식은 시대 상황마다 상대적이라는 생각을 공유하는 진보 진영은 아무런 가치판단의 토대 없이 그저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빌라도의 으쓱거림'을 반복하고 있다. 사실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몸짓은 예수가 아니라 빌라도의 몸짓이었다. 우리 시대 신학은 이 모순된 이분법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한다. 이는 시대가 신학의 주제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시대의 한계를 지렛대로 삼아, 대안적 신학 사유를 모색하려는 것이다.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이분법에서 양 진영의 사유 가운데 쐐기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무로부터의 창조론'이다. 다종교, 다문화, 다인종으로 구성된 제국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의 고유성을 강조하던 역할을 하던 아우구스티누스의 '무로부터의 창조론'은 결코 현대 과학 시대에 창조과학회나 지적 설계론자들이 주장하던 과학주의(scienticism)를 함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둠의 시대에 빛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돌아보면서, 무너진 나라와 민족이라는 시대적 한계가 결코 그들 신앙의 종말이 아님을 외치고 있었다.

이 어둠의 시대를 새로운 시대로 변혁해 나아가는 창조는 결코 과학주의적 전능성이 아니라 감리교적 사유의 근간을 이루는 '신인협동설'처럼, 시대의 변혁은 인간의 책임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고, 존재하는 것들의 이름을 부여할 권한을 위임받은 인간 존재의 창조 세계에서의 의미와 책임이다. 하나님의 전능성을 사유하는 신학적 논리가 이 무너지는 시대의 절망과 비탄함에 대한 인간의 무책임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경우, 전능한 하나님의 위엄이 시대의 폭력적 권력을 정당화하는 (신학적으로 전혀 가능치 않은) 결론으로 치달은 적이 많았다. 한국교회 강단에서 전능한 하나님 개념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는 '담임목사론'을 위한 정당성으로 얼마나 많이 남용되었는지를 성찰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전능성 개념을 신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일 것이다.

켈러는 그래서 전능한 하나님의 개념과 이미지 남용을 넘어서, 사랑의 하나님을 성찰하고자 한다. 전능한 하나님 개념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이지, 우리가 이 시대적 절망에 무책임하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을 통제하거나 감시하지 않고 함께하면서 사랑하신다. 그것은 '모험'이자 도발이다.

자녀들은 언제나 부모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우리 시대 사랑은 습관적으로 아가페와 에로스의 이분법에 갇혀 있다. 얼핏 대립되어 보이는 사랑에 관한 이 두 담론이 공유하는 것은 사랑이 마치 정신적인 사랑 아니면 육체적인 사랑이라는 이분법이다. 이 이분법은 성인 남녀의 이성애적 사랑을 무비판적으로 전제한다. 하지만 사랑은 단지 성인 남녀의 행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랑은 우리 몸을 매개로 삶에서 실현되고,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가는 중요한 발판이 된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com/passion 즉 '고난의 삶의 현장에 함께하는 열정적 사랑'이다.

우리의 고난과 고통은 육신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인간에게 몸이 없다면, 고난도 절망도 고통도 기쁨도 즐거움도 없을 것이다. 이 시대에 고통받고 고난당하는 이들과 함께하려는 열정은 바로 사랑이 '에로스'라는 것, 즉 몸과 더불어 함께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몸만 함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때로 그저 값싼 동정에 그칠 때가 많다. 소비자본주의 시대에서 하는 우리의 기부와 자선 행위가 그렇지 않은가. 자선과 기부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의 아픔에 우리는 전심으로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손해와 폐를 끼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우리는 그들보다 낫다는 안도감으로 참여할 때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토마스 아 캠피스의 유명한 책 제목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 태초부터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는 우리에게 구원의 보증수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과정으로서의 삶을 보여 줄 때, 복음서 예수의 삶이 우리에게 비유로서 들을 귀 있는 자에게 그리고 볼 수 있는 눈을 지닌 자에게 열릴 때, 진정한 그리스도론이 성립될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오순절은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성령의 강림은 시대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음 이후 삶을 일방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순절 이후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교회 공동체가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나가는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황제를 정점으로 귀족과 평민과 노예와 정복민이 신분제를 통해 엄격히 구별되어 있을 때, 예배에 함께한 모든 이가 하나님의 자녀로 동등하게 존중하고 서로 형제와 자매라고 불렀던 초대교회 모습은 로마제국 체제가 결코 보여 줄 수 없었던 새 시대의 모습을 예기적으로 예배 안에 실현한 것이었다. 오늘 우리의 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는 희망의 상징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구태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시대의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는가.

2017년 10월 방한한 캐서린 켈러 교수가 강연하는 모습.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시대가 산업자본주의 체제에서 기호자본주의 혹은 인지자본주의 체제로 바뀌었다. 근대라는 시대에서 포스트모던 시대를 거쳐 이제는 포스트휴먼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인류 문명의 3대 난제였던 전쟁과 기아와 죽음이 극복되는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시대, 신학은 무엇을 가지고 성찰을 해야 할 것인가. 적어도 우리들의 교리 체계가 근대라는 시대에 맞추어 출현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권 개념도 인간주의(humanism) 정신도 결국 근대의 산물이다. 그 근대라는 개념적 체계 속에서 개신교회는 지구 문명에 나름 막대한 기여를 해 왔다. 요즘에야 교회가 인권 기준을 맞추지 못한다고 타박받는 일이 많지만, 적어도 근대의 출현기에 종교개혁은 인권의 개념적 기초를 제시한 획기적 사건이었다.

요한 웨슬리의 감리교 혁명은 '인간 역량' 개념을 알기도 전에 구원은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며, 사회 속 개인들이 모두 인간적 역량을 발휘하며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에 참여할 역량을 갖추어야 함을 직시하고, 공립학교 교육 시스템이 미처 정착하지 못한 시절 '선데이 스쿨'을 통해 공장 노동에 시달리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교육 선교를 전개했다.

시대에 뒤처진 교회 또한 교회라는 모습의 일부일 것이다. 시대가 교회를 앞질러 나가는 시기에 교회와 신학이 이전 시대의 개념 체계에 매달려, 바꾸어야 할 것과 지키고 보전해야 할 것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한 탓이리라. 그래서 신학 방법론을 다시금 조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켈러의 <길 위의 신학>은 바로 대안적 신학 방법론에 대한 하나의 제안이다.

※필자 소개 이미지를 클릭하면 '길 위의 신학' 전체 기사 목록을 보실 수 있습니다.

ad47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동영상 기사

default_news_bottom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