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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 교회와 세상, 인간과 자연 모두를 사랑하고 사랑받은 엉클 존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⑩] 존 스토트 - 목회자·BBC 복음주의자·엉클 존·애조가·한인애요한

이재근   기사승인 2019.03.15  19: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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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John R. W. Stott, 1921~2011)를 수식하는 말은 아주 많다. 마틴 로이드 존스와 함께 '20세기 영어권 최고의 설교자'로 자주 꼽힌다. 빌리 그레이엄과 함께 '20세기 세계 복음주의의 세계화와 확산을 이끈 지도자'라는 평가도 유명하다. 제임스 패커와 더불어(사실은 그보다 훨씬 많이) '20세기에 가장 많이 판매된 기독교 서적들을 쓴 저자'이기도 하다. 칼 헨리와 함께 '20세기 복음주의를 고립된 게토에서 공적 영역으로 끌어내어 자신감을 갖게 만든 인도자'라는 수식어도 가능하다.

다른 탁월한 지도자들과 공유한 이런 유산 외에도, 그의 이름을 단독으로 새겨 넣을 수 있는 유산도 풍성하게 남겼다. '세계 성공회 복음주의의 대변자', '전 세계 기독 청년 학생의 대부', '전 세계 개신교 목회자 및 사역자들의 멘토',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성공회 교회의 주임사제', '세계 선교 운동의 방향을 조정한 항해사', '여왕의 사제' 등이다. 이런 평가는 기독교 내부에서만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2005년에 시사 주간지 <타임 Time>은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하나로 선정했다.1)

BBC가 그의 사망 부고 기사에서 언급했듯이, 만약 개신교에도 가톨릭처럼 교황이 있다면, 그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은 존 스토트라는 데 많은 이가 동의했다.2) 물론, 격의 없는 편안함을 사랑한 스토트는 분명히 그 자리를 거절했을 것이다. 교황 같은 추앙을 받았지만, 교황 같지 않은 소박한 삶으로 후대의 가슴에 남은 존 스토트의 유산을 다음 다섯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보자: △목회자 △BBC 복음주의자 △엉클 존(Uncle John) △애조가愛鳥家 △한인애요한韓人愛約翰.

존 스토트.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1. 목회자

존 스토트가 지적이면서도 동시에 정서적으로 안정된 목회자가 된 데는 몇 가지 중요한 배경과 요인이 있었다. 먼저, 그의 가정환경이었다. 1921년에 태어난 스토트의 부모는 아들의 안정감과 따뜻한 성품의 요체였던 것 같다. 아버지 아놀드 스토트는 1차 대전 당시 영국군 의무부대 소령으로 복무했고, 런던 웨스트민스터병원에 심전도검사 학부를 개설한 저명한 의사이자 학자였다. 할리스트리트(Harley Street) 58번지에 진료실 겸 집을 가진 그는 노년에는 왕실 의사가 될 정도로 실력과 경력을 인정받은 인물이었다.

아버지보다 다섯 살 많았던 어머니 릴리 스토트는 독일인 모친에게서 태어났기에,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 자랐다. 어머니는 존보다 각각 아홉 살, 두 살 많은 두 딸 조애나와 조이를 독자이자 막내인 존과 함께 어릴 때부터 신앙으로 길렀다. 가족이 다니기로 결정한 교회는 랭엄플레이스에 위치한 성공회 올소울즈교회(All Souls, Langham Place)였다. 아버지는 별로 신앙이 없어서 거의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가족은 열심히 다녔다. 이 교회가 바로 스토트 가문의 모교회로, 나중에 이 교회 목회자가 되는 스토트는 일평생 한 교회에만 정식 등록한 '한 교회의 사람'이 되었다. 신앙의 유산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지만, 세상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물려준 이는 아버지였다. 그는 과학이 세상을 더 낫게 해준다고 확고히 믿은 인본주의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열정적인 자연주의자이기도 해서, 음악, 우표 수집, 제물낚시, 와인 수집, 곤충 채집, 식물 관찰을 즐기면서, 아들을 이 취미에 끌어들였다. 존은 우표 수집과 와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음악과 곤충에 대한 애정이 나중에 새에 대한 더한 애정으로 변했다.

8살에 존은 글로스터셔 소재 오클리홀기숙학교에서 학생회장을 역임하고 졸업한 후, 1935년에 명문 사립 기숙학교 럭비스쿨(Rugby School)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아버지 모교이기도 했던 이 학교에서 존은 오케스트라 첼로 주자로 활약했고, 채플 성가대 솔로 주자로도 봉사했다. 여름방학에는 독일과 프랑스에서 가서 언어를 배웠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외교관으로 키우기 원했기 때문이었다. 15살인 1936년 성공회에서 견진을 받고 입교 신자가 되기는 했지만, 이 시기까지도 그에게 기독교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신앙에 별로 관심이 없던 존의 변화는 에릭 내시(Eric John Hewitson Nash, 1898~1982)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다. 럭비스쿨에 다니던 1938년 2월 그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뚜렷하고 의식적인 회심을 경험했다. 배시(Bash)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진 내시는 성공회 복음주의 사제이자 성서유니온(Scripture Union) 소속 사역자로, 1932년부터 영국 내 상위 30개 명문 사립 기숙학교(영국에서 'public' school은 공립이 아니라 기숙형 사립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특수 사역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내시의 사역을 통해 영국 개신교, 특히 성공회를 이끄는 복음주의 지도자 다수가 배출되는데, 존 스토트도 그 열매 중 하나였다. 스토트는 학교에서 공부 외에도 연극, 연설 등 과외 활동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학생 대표에까지 선출되었지만, 자신이 성공회 목회자 소명을 받았다고 확신했다. 당연히, 신앙이 별로 없었던 데다가, 아들이 외교관이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와는 극심한 갈등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3)

럭비스쿨 졸업 후 스토트는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칼리지에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중심으로 언어를 전공한 후, 이어서 신학을 공부했다. 두 전공 모두에서 최우등 성적을 받고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시기에는 케임브리지기독학생연합[Cambridge Inter-Collegiate Christian Union·CICCU(KICK-YOU로 발음)]에서 활동했다. 세계 대학생 선교 단체의 시조로서 1877년 설립된 CICCU는 1928년에 옥스퍼드의 OICCU 및 다른 대학 조직들과의 연합을 통해, 기독학생회(Inter-Varsity Fellowship·IVF)로 재탄생했다. CICCU 활동과 에릭 내시를 도와 배시캠프(Bash Camp) 운영에 참여한 일은 그가 목회 후보자로 준비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케임브리지 소재 성공회 신학교 리들리홀(Ridley Hall, Cambridge)에 입학해 목회자 교육을 받았다. 1881년에 설립된 리들리홀은 헌장에 복음주의 신학교라는 명시가 있었음에도, 스토트가 다니던 당시에는 신학적으로 훨씬 자유로운 성향의 교수가 적지 않았다. 성경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팽배한 이런 분위기가 오히려 스토트를 더 자극했다. 그는 이 상황이 자신이 더 철저한 성경 연구를 통해, 오히려 성경에 내재된 일관되고 신뢰할 만한 논리를 찾아낼 수 있게 만든 '영적 광야'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4)

신학 공부를 끝낸 후 1945년 12월에 스토트는 성공회 부제로 안수를 받았다. 그의 첫 사역지는 모교회 랭엄플레이스 올소울즈교회였다. 당시 이 교회의 교구사제는 해럴드 언쇼-스미스(Harold Earnshaw-Smith)였다. 케임브리지대 크라이스트칼리지에서 고전을 공부하던 중에 CICCU를 통해 회심한 경력에서 알 수 있듯, 스미스도 복음주의 성공회 사제였다. 영국의 대표적인 신앙 갱신 연례 사경회인 케직사경회(Keswick Conference) 강사로도 활약한 그는 1936년부터 올소울즈에서 사역하면서, 전시 공습 기간에도 지하 방공호에서 겁에 질린 시민을 위로하는 사역을 한 성실한 사역자였다. 스토트는 "나는 그분의 구두라도 기꺼이 닦았을 것"이라 말할 만큼 언쇼-스미스를 존경했기에, 그를 통해 복음주의 설교와 목회를 잘 배웠다. 또한 올소울즈교회는 복음전파의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은 교회이기도 했다. BBC 방송국이 바로 옆에 있었고, 병원과 상점, 기업체가 즐비한 곳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언쇼-스미스는 59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수면 중에 갑작스러운 심장성천식으로 급사했다. 1950년 3월이었다.5)

올소울즈는 수상의 조언을 받아 왕실이 교구사제(vicar)를 임명하는 전통이 있는 교회였다. 수상과 교구위원회 추천을 받은 왕실은 29세의 스토트를 교구사제로 임명했다. 후임자가 너무 젊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일부 교인의 우려에도, 그는 훌륭한 설교자, 능력 있는 행정가, 가난한 이들과 청년, 어린이 사역자로 인정받았다. 교구사제가 된 후 스토트는 기도, 강해 설교, 정기 전도, 새 신자 제자 훈련, 평신도 지도자 훈련을 교회의 우선순위로 삼고 전략적으로 목회했다. 특히 교구사제 시기에 그는 건실한 목회와 탁월한 강해 설교를 하는 젊은 복음주의 성공회 목회자로 널리 명성을 떨쳤다.6)

명성이 높아지면서, 국내·북미·오세아니아·남아프리카 등지의 IVF(국제 조직은 IFES) 등의 청년-학생 집회, 케직사경회, 복음주의연맹, 성서유니온, 티어펀드(복음주의연맹 구호 기금), 어바나 대회 등에서 강사로 초빙되거나 임원으로 봉사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 결과, 그는 교구사제가 된 지 20년째 되는 1970년 교구사제직을 마이클 본(Michael Baughen)에게 위임했다. 스토트는 일상 목회의 의무를 경감받은 교구담임사제(rector)가 되어 외부 사역에 한층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1975년에는 은퇴사제로서 명예직만 유지할 수 있게 되자, 이후 30년간 전 세계를 교구로 삼는 사역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스토트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처음 다닌 교회에서 부제와 교구사제, 교구담임사제, 은퇴사제를 거쳤다. 그런 이유로, 여러 훌륭한 전임자와 후임자의 존재에도, 런던 매러번(Marylebone) 랭엄플레이스 소재 올소울즈교회는 주로 한 사람의 이름으로 널리 기억되었다.

1956년 10월, 설교차 방문한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존 스토트(중앙의 검은 코트)와 캐나다 학생들. 사진 출처 플리커

2. BBC 복음주의자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만일 영국 복음주의의 놀라운 성장을 어느 한 사람의 공로로 돌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스토트일 것이다"라며 스토트를 현대 영국 복음주의 대표자로 평가한다.7) 한 지역 교회 목회자로서의 존 스토트가 세계의 지도자가 된 것은 그가 전도 집회 및 사경회에서 설교로 20세기 복음주의 신앙 운동의 전 세계적 확산을 도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확산된 복음주의 공동체가 어떤 신앙과 실천을 그 공동체의 핵심 강령으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해 일종의 매뉴얼을 제공한 인물이 스토트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스토트의 복음주의는 그 자신도 자주 언급한 대로, 영국 공영 방송국의 이름을 따서 주로 BBC로 불린다. 'Biblically Balanced (또는 Biblical and Balanced) Christianity', 즉 '성경적(으로), 균형 잡힌 기독교'였다.

스토트의 복음주의 신앙이 자란 모판은 이미 언급한 대로, 럭비스쿨 시절 배시와의 만남이었다. 스토트가 자신이 회심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배시에게 보낸 후, 배시는 이후 5년간 매주에 한 통씩 스토트에게 기독교 교리나 신앙 훈련, 훈계 등을 담긴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배시의 여름 캠프에 참여하면서 그를 도운 일도 복음주의 신앙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케임브리지 CICCU에서 강조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및 이신칭의 등의 정통 교리도 그를 복음주의자로 만들었다. 리들리홀에 다니면서 복음주의 신앙의 내적 일관성을 발견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런데 스토트는 이런 형식적인 과정 이외에, 자신이 복음주의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회심'을 경험하게 된 과정을 내밀하고 개인적인 언어, 즉 아주 전형적인 복음주의적 언어를 통해 고백한다. 천국의 사냥개가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 말콤 머거리지, C. S. 루이스를 추적했듯이, 자신도 그 사냥개의 추적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가 직접 찾아오셔서 문을 두드렸을 때, 자신이 그리스도께 끌린 두 방식 중 하나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감, 두 번째가 자신의 패배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두 감정 속에서 마음의 문을 꽁꽁 닫고 있던 자신에게 그리스도는 지속적으로 문을 두드려 결국 마음 문을 열었다고 고백한다.8)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측면에서 고백적인 복음주의 목회자였던 그가 일개 교회의 사역자 범위를 넘어, 처음에는 영국 복음주의권, 이후에는 미국을 포함한 세계 복음주의권의 지도적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한 시기는 1955년 이후였던 것 같다. 이 과정은 1945년 이후 영국 복음주의 진영 전반의 흐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역사가 브라이언 스탠리에 따르면, 전후 영국 복음주의에는 미국에서와 같이 극단적으로 보수적이고 분리적인 성향을 가진 근본주의자가 거의 없었다. 영국의 교파 지형은 미국만큼 다채롭지 않았고 개교회적이지 않았기에,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교단을 바로 뛰쳐나가 새로운 교파나 회중을 설립하는 경우도 많지 않았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라는 용어 자체도 영국에서는 대체로 미국보다 더 느슨하게 적용되었다. 주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며, 그러므로 바로 그 성경이 명령하는 대로 전도에 우선순위를 두는 공동체를 지칭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에 이 느슨한 연대에 좀 더 분명한 색깔과 경계를 규정해야 하는 현실이 찾아왔다. 하나는 잉글랜드국교회, 즉 성공회 내부의 일부 진보적 복음주의자 그룹이 뚜렷한 자유주의 성향으로 이동하면서, 자신들을 더 이상 복음주의자라 지칭하지 않게 된 현상이었다. 이로써 성공회 복음주의 왼쪽의 한 영역에 자리매김하던 집단이 사라졌다. 또 하나는 미국 복음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의 영국 런던 해링게이 집회(1952~1954)와 케임브리지 집회(1955)가 준 충격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전국구 부흥사로 떠오른 빌리 그레이엄은 원래 미국 남부 근본주의 배경 출신이었다. 그가 근본주의자가 아닌 다른 진영의 기독교인과도 관계를 확장한다는 이유로, 미국 근본주의 진영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반대로, 영국에서 그레이엄은 전형적인 미국식 근본주의, 분파주의, 인기영합주의를 추구하는 인물로 비판받았다.

이 때문에 영국 복음주의자가 빌리 그레이엄과 연대할 수 있는지, 할 수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할 수 있는지가 논란거리였다. 이 논란에 스토트가 끼어든 것이 1955년으로, 그는 그해 11월과 이듬해 5월에 잡지 <크루세이드 Crusade>에 글을 실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은 신앙의 근본을 붙든다는 의미에서의 근본주의를 지지하고 인정하므로 빌리 그레이엄 사역을 지지하지만, 미국식 근본주의의 과장, 이벤트성, 반지성주의, 반문화주의에는 반대하는 복음주의를 지향한다고 밝혔다. 이 두 기고문이 1956년 소책자 <근본주의와 전도 Fundamentalism and Evangelism9)로 재출간되었다. 이 책이 스토트를 무대 전면에 등장시킨 계기를 만든 작품으로, 이후 그는 "영국판 신복음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설계자"가 되었다.10)

이렇게 무대에 등장한 스토트의 복음주의 특징은 비교-대조의 방식을 취하면 더 분명해질 것이다.

첫째, 빌리 그레이엄을 대표로 하는 미국 복음주의와의 차이. 나이가 비슷했던 스토트(1921년생)와 그레이엄(1918년생)는 서로를 아끼고 존경하고 협력한 특별한 친구였다. 1946년부터 영국에서 집회를 인도한 그레이엄이 1952년에 세계복음주의연맹(WEA)의 초청으로 런던 해링게이에서 2년간 연속 집회를 연 이후, 두 사람은 절친이 되었다. 그레이엄은 집회가 없는 날에 스토트의 교회에서 예배하거나 성찬에 참여했고, 스토트는 자기 교인들과 함께 그레이엄 집회에 꾸준히 참석했다. 마지막 해링게이 집회가 열린 1954년 5월 22일 집회에는 한 번에 12만 명이 모였다. 영국 역사상 한 자리에 가장 많은 청중이 모인 신앙 집회였다.

영국의 신앙이 전반적으로 쇠퇴하며 교회가 비어 가는 와중에 그레이엄의 집회에 이토록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사람들의 의문에 스토트는 "빌리는 이 사람들이 지금껏 보아 온 사람들 중 가장 투명하고 신실한 설교자"였기 때문이라고 응답했다.11) 그레이엄은 1955년 11월의 케임브리지 집회가 끝난 후 스토트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 두 사람은 아직 젊소. 많은 사역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소. 우리 우정이 더욱 성장하고 깊어지기를 기도하겠소. (중략) 웨슬리와 휫필드의 우정처럼 우리도 그분께 쓰임 받기를 바라오. 이렇게 짧은 시간을 만나면서 당신처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된 사람은 별로 없었소. 케임브리지에서 해준 모든 일에 진심으로 감사하오."12)

이런 우정에도 스토트는 그레이엄이 대변한 미국식 복음주의의 전반적인 대중영합주의, 상업주의, 반지성주의,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태도와는 선을 그었다. 예컨대, 1974년 로잔 대회의 성격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의가 대표적이었다. 1966년 베를린 전도 대회의 후속 대회를 전 세계 규모로 방대하게 열자는 그레이엄의 제안에, 스토트는 이 대회가 이벤트성 집회가 아니라 충분히 준비된 학술 대회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며 참가를 주저했다. 스토트의 견해는 당시 영국 복음주의자 전반의 의견을 대변했다. 또한 대회의 최종 결과로서 로잔 언약이 복음 전도와 함께 사회참여를 기독교인의 실천의 양 날개로 규정한 것도 이런 차이를 보여 준다. 당시 북미, 특히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이 개신교 에큐메니컬 진영이나, 가톨릭 해방신학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라며 크게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스토트는 성경의 원리는 인간의 영혼과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과 광범위한 도덕 이슈에도 같은 무게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점에서 스토트의 BBC 복음주의는 그레이엄의 것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전인적이고, 총체적이었다.13)

왼쪽부터 빌리 그레이엄, 존 스토트, 모리스 우드.

둘째, 마틴 로이드 존스를 대표로 하는 영국 비국교도 개혁파 복음주의와의 차이. '독터'(Doctor) 마틴 로이드 존스는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영국 보수 복음주의 르네상스를 이끈 영혼이었다. 1943년부터 1968년까지 독립 교회인 런던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개혁파 신앙에 근거한 탁월한 강해 설교와 저술로 세계 복음주의자들의 말씀 및 지성에 대한 갈급함을 채워 준 인물이다. 1899년생인 로이드 존스는 스토트보다 22살이 많았으므로, 동시대에 활약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로이드 존스가 스토트보다 한 세대 앞선 선배였다. 둘은 서로를 존경하고, 설교와 강연, IFES 사역을 통해 영국 복음주의의 지성적, 영적 부흥에 함께 했지만, 교회론에서 강조점이 달랐다.

성공회가 아닌 독립 교회 소속, 정규 신학교를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한 신학 교육, 잉글랜드인이 아닌 웨일스인 민족 정체성, 성공회식 중도(via media)보다는 엄밀한 개혁파 교리를 강조하는 신학이 어우러져서, 로이드 존스의 분리주의 성향을 주조해 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66년 10월의 제2차 전국복음주의자회의(National Assembly of Evangelicals)였다. 로이드 존스가 복음주의자는 배도한 교회에서 나와 복음주의 신앙관이 투철한 이들만의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연설한 유명한 사건이었다. 대회장이 충격으로 술렁거리자, 대회 의장이었던 스토트는 연설 중간에 개입해 로이드 존스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 대회 후에는 스토트와 같은 성공회 소속의 제임스 패커도 이에 반대하는 글을 언론에 기고했다.

영국의 두 주요 복음주의 진영의 갈등은 1967년 4월에 킬(Keele)에서 열린 전국 복음주의 성공회 대회(National Evangelical Anglican Congress)와 직후 탄생한 킬 성명서(Keele Statement)를 통해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대회에서 스토트, 패커, 마이클 그린, 필립 휴즈 등이 이끄는 성공회 복음주의자 1000여 명이 자신들은 분리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명확히 하고, 동시에 복음의 사회적 측면도 강조했다. 이로써 스토트가 대표한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는 분파적 고립주의를 피하고, 교회의 공교회성과 일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복음주의로 자리매김했다.14)

셋째, 성공회 내부 고교회 및 광교회와의 차이. 스토트는 일평생 성공회 신자이자 사제였음에도, 성공회 정체성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1980년대에 다음과 같이 말한 적도 있다.

"가장 먼저 저는 하나님의 순전한 자비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다음으로 저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중략) 셋째로, 저는 성공회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제가 속한 역사적 전통과 교파가 성공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교파주의를 변호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저는 성공회를 가장 먼저 내세우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어떤 사람을 복음주의 '성공회' 교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성공회 '복음주의자'라고 부르는 편이 더 옳은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독교 정체성의 순서를 그리스도인, 복음주의자, 성공회 신자 순으로 두었다. 이 점에서 성공회 내부의 고교회파(Anglo-Catholics), 광교회파(Liberals)보다도, 성공회 바깥의 복음주의자와 더 친밀감이 높았다. 그럼에도 스토트가 성공회 신자였다는 점이 그의 복음주의가 띠게 될 색깔을 대략 예측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성공회 특유의 중도성, 즉 유연성과 공존을 강조하는 에큐메니컬 정신 때문에, 고교회파가 성공회를 이탈해 가톨릭으로 가지 않듯, 광교회파가 성공회를 이탈해 자유주의 교단을 만들지 않듯, 저교회파 복음주의자인 스토트와 그의 동료들도 로이드 존스의 요청을 따르기를 거부한 것이다.

넷째, 르네 파디야가 대표하는 남미 복음주의와의 차이. 주로 전도와 영혼 구원을 우선순위로 두는 복음주의는 대체로 정치·사회 문제에 관심이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19세기 복음주의 2차 대각성이 영적 해방으로서의 회심, 부흥, 선교의 영역을 억압받고 소외되고 핍박받는 흑인, 여성, 고아와 과부, 이민자, 문맹자, 노동자의 사회적 해방으로 확대 적용한 전례가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1947년 이래 미국 신복음주의 운동의 지도자 칼 헨리는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을 통해 복음주의 사회참여 지향성의 역사적 유산을 소환한 바 있었다. 그러나 헨리가 주로 애통해했던 미국 근본주의/복음주의 전통과는 달리, 각국 국교회인 잉글랜드성공회와 스코틀랜드장로회는 교회와 세속과의 관계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미국식 정교분리 제도는 영국에서는 낯선 전통이었다.

아마 이런 이유로, 로잔 대회에 초대받은 남미 복음주의자들이 대회에서 급진적 제자도에 근거하여 정치 상황에 대하여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자고 요청했을 때, 미국 지도자들은 화들짝 놀라고 진의를 의심했다. 이와는 달리, 스토트를 비롯한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그 요청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남미 급진 복음주의 지도자 르네 파디야는 그 일을 평생 잊지 못했던 것 같다.

"하나님은 존을 로잔 1차 대회의 핵심 인물로 사용하셨다. 나는 '복음 전도와 이 세상'이라는 주제에 대한 회의에서 발제를 하도록 초청받았다. 거기서 나는 복음주의자들이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고 믿은 여러 이슈들, 즉 생활 방식의 문제, 교회 성장을 위한 '종족 단위 원리' 채택의 문제, 복음과 문화의 관계,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와 같은 이슈를 제기하였다. 그 결과 나는 대부분의 복음주의 진영, 특히 미국 복음주의 진영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거부당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이슈는 로잔 언약에 포함되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여전히 존에게 깊이 감사하는 것은, 그가 1977년부터 1982년까지 로잔의 신학과교육위원회의 의장으로 주도한 일련의 회담에서 같은 이슈들을 다루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 모든 회담에 나를 주강사 중 하나로 초대해 주었다."15)

서양 지도자 대부분에게 거부당한 남미 지도자 파디야, 사무엘 에스코바르, 올란도 코스타스를 스토트는 품었고, 그 결과 20세기 복음주의 운동의 일대 전환을 만든 로잔 언약이 탄생했다.16) 그러나 남미 복음주의자들과 친밀했고 그들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음에도, 그는 이 급진 복음주의자들의 일부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즉,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시므로, 남미 해방신학의 '해방' 개념을 기본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그는 남미 지도자 일부가 그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로 끌어들이는 논리, 또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서구, 특히 미국 탓으로 돌리는 주장, 폭력혁명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과도함에는 동의하지 않았다.17)

3. 엉클 존

많은 이들이 스토트에게 20세기 기독교의 명설교자이자 목회자, 세계 복음주의 운동 최고의 지도자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동료와 후배, 제자, 독자, 청중에게 가장 오래도록 남긴 인상은 이런 공적이고 외적인 찬사나 호칭 이면에 있는 다른 무엇인 것 같다.

스토트가 2011년 사망한 직후 영국 IVP에서 펴낸 <John Stott: A Portrait by His Friends>에는 스토트와의 개인적인 만남을 추억하고 회고하는 이들의 글이 35편 실려 있다. 그해가 가기 전에 신속하게 번역 출간된 이 책 한국어판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에는 원서와는 달리 44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스토트에게 영향을 받은 한국인 저자 9명의 글이 원서의 35편에 추가로 실린 것이다. 저명한 인물이자, 일평생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한 거인의 죽음 직후 그를 추모하는 글을 모은 책에는 어느 것이든 고인의 밝은 면, 중요한 업적, 좋았던 추억 위주의 글이 실리게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있을 어두운 단면, 실수와 오류, 껄끄러운 관계는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법이다. 이 책도 그 점에서 다르지 않다.

필자(이재근)는 평전이나 회고록 종류의 책이나 논문을 자주 대하는 편이다. 연구 중심 종합대학의 박사과정에서 엄격한 학문적 틀로 문헌을 대체로 '삐딱하게' 읽으며 비평하는 훈련을 철저하게 받은 역사가다. 그런 역사가의 눈으로 보면, 비록 내리 찬사로 가득한 글이라도, 이면에 담긴 꼬인 속내, 뉘앙스, 차마 노골적으로 밝혀 꺼내지 못하는 부정적 감정과 비아냥이 행간에서 자주 읽힌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44편이라는 상당히 많은 회고자의 글에서는 사실상 상투적이고 틀에 박힌 찬사, 혹은 마지못해 주저하며 내리는 씁쓸한 인정 같은 것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 모두는, 한두 차례 짧은 접촉이었든 동료로서의 잦은 만남이었든, 존 스토트와의 만남이 자신들의 과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거나, 심지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고백을 진심을 담아 전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 저자들은 스토트와의 개인적인 추억을 상기하는 자체만으로도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깊은 감회에 젖어든 것 같다. 냉정한 필자에게도 그 감흥과 젖은 눈시울이 전염될 정도였다.

1976년 케직사경회 강사들과 존 스토트(맨 위 왼쪽에서 두 번째).

이들이 공통적으로 회고하는 스토트의 가장 위대하고도 중요한 유산은 전염성 높은 '친밀함'이다. "개신교의 교황"이라 불릴 정도로 무게감을 가진 인물이지만, 그가 확보한 권위는 조직과 제도, 형식이 부여한 것이 아니었다. 나이·국적·성별·교파·인종·배경에 상관없이, 스토트를 개인적으로 아는 이는 그를 '교황 성하'가 아니라, '스토트 신부님/목사님'(Reverend Stott)도 아니고, '존'(John), 또는 '엉클 존'(Uncle John)이라 불렀다. 책 제목이 알려 주듯, 이들 모두에게 존 스토트는 '친구'였다.

그는 개신교에서는 권위와 형식, 질서와 서열을 가장 많이 강조하는 성공회에서 교구사제이자, 왕실 목회자(Chaplain to the Queen)까지 지명된 인물이었다. 케직사경회 주 강사, 영국복음주의연맹, 성서유니온, 티어펀드, 국제기독학생회 등의 주요 복음주의 기관 회장을 수없이 역임했다. 어바나 대회 정기 성경 강해자, 로잔언약 작성위원장, 로잔계속위원회 특별위원, 성공회복음주의협의회 회장, 런던현대기독교연구소 소장에다, 잉글랜드국교회에서 학문적으로 탁월한 공을 세운 성공회 사제에게 수여하는 램버스 명예 신학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최고위 성직자가 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거절했다. 잉글랜드 여러 주교좌의 주교, 호주 시드니 대주교, 몇몇 신학대학 교수, 옥스퍼드 위클리프홀 학장, 세계복음주의협의회 회장이 될 기회를 모두 거부했다.18) 그는 오직 한 지역 교회 사제로 봉사했고, 권위와 명예보다는 실제적 헌신이 필요한 자리에서만 회장직을 맡았다.

일평생 독신으로, 런던 올소울즈교회 근처 작고 소박한 플랏(flat, 아파트에 해당하는 영국 영어)에 살면서, 단벌 양복과 단벌 구두만으로 만족한 인물. 가난한 제3세계 출신 유학생과 나그네에게 늘 손수 자신의 주식이던 햄버거와 수프를 대접하고, 이들 각자에게 편지를 쓰고, 함께 기도했던 인물. 비서실 쓰레기통을 손수 비운 인물. 가정이나 숙소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 늘 먼저 설거지를 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친구를 위해 기도하고, 진흙에 엉망이 된 친구의 신발을 닦았던 인물. 한 번 만난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고, 만날 때마다 그들의 가족의 안부를 물었던 인물. 하나님의 구속과 은혜의 손길이 교회와 인간에만이 아니라, 자연과 동식물에게도 미친다고 믿고, "공중 나는 새를 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인물. 그래서 세상의 모든 새를 찾아 헤맸던 인물.19) 스토트는 그를 만난 모든 이들의 친구였다.

4. 애조가愛鳥家

스토트는 단순한 애조가를 넘어, 아마추어 조류학자였다. 그는 자신이 찍은 새 사진들을 신앙 묵상과 섞어 엮은 <새, 우리들의 선생님 The Birds Our Teachers>을 1999년 출간하기도 했다. 이 책 서문('들어가면서')에 따르면, 스토트의 자연, 특히 새 사랑은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이었다. 전문직업에서는 의사였고, 취미에서는 식물학자였던 아버지는 존을 매 여름마다 시골로 데려가, 입은 닫고 눈과 귀만 열어 놓으라는 자연 관찰법을 아들에게 가르쳤다. 학교에 다니느라 새에 대한 관심을 얼마간 잃었던 스토트가 다시 새를 찾게 된 것은 런던에 사제로 부임하고 난 후였다. 런던의 여러 저수지, 공원, 심지어 폭격 맞거나 오래되어 붕괴된 건물이 1년 내내 수많은 새의 은신처가 되어 준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관심사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거의 모든 세계 집회 일정의 일부로, 그 지역에 서식하는 특별한 새 관찰 일정을 집어넣고, 언제나 망원경을 휴대했다. 북극과 남극에서부터 사막, 열대우림을 포괄하여, 그는 전 세계 약 9000종에 이르는 새 중 총 2500종 이상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관찰했다고 한다. 이는 일반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경험으로, 4500종, 7208종, 8000종을 본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전문 조류학자나 탐험가도 이렇게 많은 종류의 새를 실물로 직접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20)

실제로, 스토트가 한국에 첫 방문한 1993년에 비무장지대와 한반도 최서단 칠발도로 떠난 새 탐방 일정에 동행한 유명한 한국 최고의 '새' 박사 경희대 윤무부 교수는 스토트가 자신보다 새를 훨씬 많이 보았을 뿐만 아니라, 더 전문가라고 인정했다. 그해 한국 방문 일정 전체에서 스토트를 수행한 한림대 경영학 안동규 교수는 스토트에게 "당신은 새에 너무 미쳐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스토트는 "나는 예수님이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하신 명령을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21)

스토트가 안동규 교수에게 한 대답은 농담만은 아니었다. <새, 우리들의 선생님>의 '차례' 전 페이지에는 성경과 마르틴 루터, 키에르케고르가 신앙과 새를 연결 지어 이야기한 명언이 실려 있다. 그런데 첫 문구가 "공중의 새를 보라 - 예수님, 마태복음 6:26에 있는 산상수훈"이다. 서문에서 자기 육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한 후에, 스토트는 성경에서 새에 대해 이야기하는 본문들을 끄집어내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 선하다고 선언하신 피조 세계를 열심히 주목하고 관찰해야 하고, 그 관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탐구하는 이 분야를 '조류 신학'(orni-theology) 혹은 '새의 신학'(theology of birds)이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익살을 부린다.22)

스토트의 기독교 및 복음주의 신앙이 포괄적이고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것에는 자연과 생명, 환경에 대한 그의 이런 관심과 애정도 한몫을 한 것 같다. 기독교 세계관은 창조-타락-구속의 패러다임을 이야기할 때, 구속을 단지 인간의 영혼 구원에만 한정짓지 않는다. 구속은 재창조를 뜻하기도 한다. 인간의 타락과 함께 썩어짐의 종노릇하던 (새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도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롬 8:18-23).

2010년, 새를 관찰하러 나온 존 스토트. 사진 출처 플리커

5. 한인애요한韓人愛約翰

존 스토트는 전 세계 기독교인의 사랑을 받았다. 올소울즈교회를 제외한 스토트 사역의 공식 후계자라 할 수 있는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 편집을 맡아 서문을 쓰면서, 스토트 최고의 은사는 그가 놀랍도록 친구를 잘 사귀는 것이라고 했다. 독신인 스토트에게 '혼자'라는 말은 너무 무색해서, 그를 만난 후 미담을 회고하고 싶은 이들의 글만으로도 백과사전 한 질을 만들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23)

한국인 9명 포함 총 44명의 회고가 담긴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를 읽어 보면, 라이트의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스토트는 20세기 개신교인 중 가장 사랑과 존경을 많이 받은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런 스토트에 대한 한국 기독교인의 사랑 또한 아마도 세계 최상위에 자리하지 않을까 한다. 한인애요한韓人愛約翰. 한국인은 요한(John)을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한다. 스토트 책은 거의 다 한국어로 번역이 되었다.

스토트 책을 읽고 회심했다는 이, 신앙을 버릴 뻔 했다가 회복했다는 이, 소속 신앙 공동체의 폐쇄성에 숨 막혀 있다가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는 이, 지성과 사회를 기독교적으로 조망하는 눈을 떴다는 이, 설교와 성경의 가치를 확신하게 되었다는 이,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들을 만난다. 번역된 스토트 전작을 구비하고 있다는 이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시간이 조금 지나긴 했지만, 2010년 <목회와신학>이 한국 목회자 86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가장 선호하는 기독교 작가로 뽑힌 인물도 존 스토트였다.24)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에 글을 실은 한국인 9인의 회고는 지극히 감동적이고, 에피소드는 하나하나 모두 흥미진진하다. 그 중 스토트가 처음 한국을 방문한 1993년 IVF 전국 수련회 당시 3000명이 모인 연세대 원주캠퍼스 노천극장에서 있었던 일화가 특히 인상적이다. 갑작스러운 우천 때문에 설교를 끝내려는 스토트에게 장대비를 맞으면서도 "계속해 주세요", "Go on, Please!"라고 외쳤던 쳤던 IVF 학생들. 그 현장에 있었던 학생들에게는 "그 수련회가 학생 시절 최고의 수련회”였다. 스토트 역시 "장맛비 속에서도 꿈쩍하지 않고 말씀을 듣는 학생들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옥한흠, 하용조, 홍정길, 김상복, 김명혁, 한철호, 이기반, 안동규, 이태웅, 권영석, 김중안, 정옥배, 양희송, 지강유철은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 및 그 외 다른 매체에 실은 회고를 통해 자신이 받은 엉클 존의 유산을 추억했다.

1) 100인의 목록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http://content.time.com/time/specials/packages/completelist/0,29569,1972656,00.html. 선정된 각 인물에 대한 간략한 전기와 선정 이유가 설명되어 있는데, 스토트에 대한 글은 빌리 그레이엄이 썼다. http://content.time.com/time/specials/packages/article/0,28804,1972656_1972717_1974108,00.html.
2) https://www.bbc.com/news/uk-14320915.
3) 로저 스티어, 『존 스토트의 생애』, 이지혜 역 (서울: IVP, 2010), 29-58.
4) J. P. Greenman, "존 로버트 웜슬리 스토트," in 티모시 라슨 편, 『복음주의 인물사』, 이재근, 송훈 역 (서울: CLC, 2018), 755f.
5) 스티어, 『존 스토트의 생애』, 90-110.
6) 스티어, 『존 스토트의 생애』, 111-122; Greenman, "존 로버트 웜슬리 스토트," in 『복음주의 인물사』, 756.
7) 알리스터 맥그래스,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정성욱 역, 이재근 해설 (서울: IVP, 2018), 53.
8) 존 스토트,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양혜원 역 (서울: IVP, 2004), 32f.
9) John R. W. Stott, Fundamentalism and Evangelism (London: Crusade Booklets, 1956).
10) 브라이언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 확산: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 이재근 역 (서울: CLC, 2014), 72-78.
11) 스티어, 『존 스토트의 생애』, 147-149.
12) 스티어, 『존 스토트의 생애』, 159-160.
13)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 확산: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 제6장; 이재근,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서울: 복있는사람, 2015), 제5장.
14)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 확산』, 89f; 맥그래스,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57-61; 크리스토퍼 캐서우드 편, 『5인의 복음주의 지도자들』, 김영우 역 (서울: 엠마오, 1987), 112-122.
15) 크리스토퍼 라이트 편, 정옥배 외 기고,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 (서울: IVP, 2011), 167.
16)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 확산: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 제6장과 이재근,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제5장을 참고할 것.
17) 스티어, 『존 스토트의 생애』, 282.
18) J. P. Greenman, "존 로버트 웜슬리 스토트," in 티모시 라슨 편, 『복음주의 인물사』, 759f.
19) 크리스토퍼 라이트 편, 정옥배 외 기고,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 (서울: IVP, 2011).
20) 존 스토트, 『새, 우리들의 선생님』, 이기반 역 (서울: IVP, 2001), 7f.
21) 라이트 편,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 , 328f.
22) 스토트, 『새, 우리들의 선생님』, 8-10.
23) 라이트 편,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 , 11f.
24) http://christian.nocutnews.co.kr/news/749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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