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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한국형 좀비 몰이

[김상덕의 미디어와 한국교회] 시민 상상력, 공포와 혐오 넘어야

김상덕   기사승인 2019.03.11  15:5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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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이다! 역병이 돈다!" 사극에서 역병은 신적 처벌이자 국가적 재난의 상징이다. 그 책임은 임금에게로 향한다. 그래서 왕의 정적政敵들은 역병을 이용해 왕을 견제했다. 심지어 역병을 일부러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 사실을 퍼뜨리는 역할은 입담꾼이 맡는다. 마을 장터에 나가 역병이 퍼지고 있으며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고 최대한 부풀려 떠벌린다. 이 재난의 책임을 모두 '부덕한 나라님' 탓으로 몰아간다. 정쟁 속 가짜 뉴스와 언론 조작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근래에 좀비(zombie)를 소재로 하는 영화와 TV 드라마가 제법 눈에 띈다.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킹덤'은 서양 좀비와 사극의 역병이라는 소재가 흥미롭게 섞인 '퓨전 좀비 사극'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좀비 장르'는 특성상 무섭고 잔인한 공포 영화의 옷을 입고 등장하고는 한다. 좀비 장르는 시작부터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B급 정서'를 표방했고, 일부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발전해 왔다.

열성적인 사람들은 좀비 장르의 독특한 세계관에 집중하기도 하는데, 좀비의 등장을 '종말론'(Zombie Eschatology) 형태로 이해하기도 한다. 좀비의 등장이 인류가 멸망 위기에 처해 있다는 위기의식의 발현인 셈이다. 사실 이 주장이 과학적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좀비란 이 시대의 악과 부조리가 만들어 낸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로 인해 인간성을 상실한 괴물의 묵시적 투영이고 인류의 멸망이라는 두려움이 만들어 낸 허구의 상징과도 같으니 말이다.

기괴한 B급 정서에 비합리적이고 묵시적인 좀비 장르를 그럴듯한 상업 영화로 둔갑하게 하는 그릇은 '재난 영화' 장르다. 사실 재난의 종류만 달라졌을 뿐 미디어 속 좀비 영화들은 '좀비라는 재난으로부터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공통된 구조를 갖고 있다.1) 이런 측면에서 좀비 장르에는 재난에 대응하는 국가의 역할이나, 좀비와 맞서 싸우는 주인공의 용기와 희생, 가족의 중요성 등의 주제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또 한편, 좀비는 위협과 혐오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이를 이용해 권력 통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모습도 재현되고는 한다. 좀비라는 허구적 설정에도 대중에게 관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미지의 위협에 대한 공포심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일 것이다.

좀비 장르의 또 다른 특징은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말이 통하거나 대적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피해야 할 것에 가깝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분노와 혐오를 구분한다.2) 분노는 대상에게 향하도록 만드는 반면, 혐오는 대상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 혐오의 감정은 분노와 달리 대상을 회피하고 배제하고 말살하도록 작동한다.

좀비 영화의 경우, 좀비는 맞서 싸워야 하는 대상이라기보다 회피해야 할 대상이다. 그것은 죽여도 죽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와 마침내는 잠식해 버리는 공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왜 좀비가 나타났는지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현상이며 중요한 것은 이 위협으로부터 살아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퓨전 좀비 사극 '킹덤'의 한 장면. 영화나 드라마 속 '좀비'는 회피해야 할 공포 대상으로 그려진다. '가짜 뉴스'는 위협적 대상을 상정해 공포와 혐오를 조장한다. 넷플릭스 '킹덤' 홈페이지 갈무리

공포와 혐오의 정치

원인 불명의 위협을 통해 공포를 조장해 사회적 통제력을 얻으려는 시도는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외부의 적은 내부 단결력을 높이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강력한 국가 정체성은 보통 전쟁이나 침략 등 외부의 적을 필요로 한다. 공포와 혐오, 이 두 가지 개념은 독재 권력의 특징이다. '공포정치'라는 이름을 알리게 한 프랑스 로베스피에르파는 자신들의 정적들을 차례로 숙청해 권력을 차지했다.

1980년 5월의 광주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전두환 군부 세력은 '12·12 쿠데타' 이후 생긴 정치적 혼란을 잠재워야만 했다. 서울대학교 최정운 교수는 5·18 민주 항쟁의 정치학적 관점에서 신군부가 지역주의와 공포정치가 결합한 정치적 선택이었다고 평가한다.3) 결속과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공포와 혐오를 선택한 것이다. 광주에 도착한 계엄군은 독재 타도를 외치며 민주화 시위 참가자들을 상대로 폭력 진압을 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진압을 이어 갔다. 진압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보란 듯이 가해졌던 정치적 학살에 가까웠다. 신군부에 대항하고자 하는 의지를 꺾어 버리고자 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학살이라는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광주시민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들은 당시 독재 정권의 정적 김대중을 감금하고, 이로 인한 반발이 전라·호남 지역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한다. 당시 시위는 독재 정권 타도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광주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그럼에도 유독 광주였다. 왜 광주인가에 대해서는 지역적 혐오를 이용한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그것도 아주 위협적이고 혐오스러운 적이 필요했다. 그렇게 탄생한 가상의 적(위협)이 '폭도', '반란' 그리고 '빨갱이'다. 한국형 좀비의 탄생이었다.

언론통제 또한 필수였다. 언론을 장악한 신군부는 광주에 대한 진실을 가리고 거짓 정보들로 국민들을 속이고 선동했다. 지금 광주에서 빨갱이가 주도하는 반란이 일어났다고, 이 나라를 위협하는 혼란의 주범들이자 집결지라고 왜곡 보도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광주 항쟁의 피해자들은 가족을 잃은 것도 모자라, 오랜 기간 '폭도'나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을 지닌 채 살아야 했다. 신군부가 만들어 낸 공포와 혐오는 트라우마로 남아 여전히 한국 사회를 괴롭히고 있는 듯하다.

공포, 혐오, 망언의 정치학(?)

최근 또다시 '5·18 망언'이 정치권에서 이슈가 됐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왜곡하려는 일부 집단이 존재해 왔지만, 그런 주장이 현직 국회의원들 입에서 나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4) 이 사안을 일부 극우 정치 성향을 지닌 국회의원 개인의 일탈로 볼 것인가,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일에 집중할 것인가. 그것만으로 '5·18 망언'이 사라질 것인가. 제2·3의 역사 왜곡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왜 '5·18 망언' 및 가짜 뉴스들이 생산되고 유통되는가와 관련한 정치적 의도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시민 언론 및 시민 상상력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한다. 현재 언론·미디어를 통해 일어나는 '5·18 망언' 및 가짜 뉴스들은 그 의도가 역사적 논쟁(그들은 그렇게 주장하지만)에 있다기보다 전략적인 정치적 선택에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당성과 집단 결속력을 높이고자 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하면, 그들은 적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래서 공포와 혐오의 정치를 다시금 선택한 것이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적이 혐오스러우면 혐오스러울수록 유리하다. 속칭 '광수'라는 저급한 표현을 보라. '광주'라는 지역주의와 '빨갱이'라는 냉전 트라우마가 극우 세력을 강하게 자극하고 유혹한다.

공포와 혐오는 최근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핵심 개념 중 하나가 됐다. 과거에는 전쟁과 독재 등 물리적 폭력을 직접적으로 경험했다면, IMF 이후 양상은 신자유주의 속 경쟁과 생존에 대한 불안과 구조적 불평등 속에 낙담하는 형국이다. 공포와 혐오의 외적 표현은 달라 보일 수 있지만 그 내적 동기는 같다. 혐오는 공포와 두려움의 또 다른 표현이다. 과거 전쟁 및 냉전 세대야 이해할 만하더라도, 최근 사회 이슈가 되고 있는 '20대 극우 집단'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5) 이 질문은 "청년 세대에 나타난 '혐오의 문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관련 있다. 이에 대해 칼럼니스트 박권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쉽게 어떤 당위, 즉 '잘못된 일에는 분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신, 질문을 던져보자. 왜 분노해야 하는 것을 혐오하게 되었는가? 왜 오늘의 청년들은 잘못된 일을 '미개하다'고 하는가? 불평등과 부정의를 판단할 분별력이 없어서? 그렇지 않다. 판단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불평등과 부정의의 시정을 체념했기 때문이다. 혐오해서 체념하게 된 것이 아니다. 체념을 합리화하기 위해 혐오가 동원된 것이다. 그 결과 사회 모순은 자연재해처럼 묘사되고, 나와 무관하게 발생한 사태로 타자화된다. 거기서 나는 내 몫의 책임을 짊어진 연루자가 아니라 재난의 일방적 피해자일 뿐이다. 지옥은 나에게 고통을 주는데 나는 너무 혐오스러워 지옥에 손댈 수 없다. 그렇게 지옥은 날이 갈수록 더 끔찍해진다."6)

박권일은 청년 세대 속 혐오의 '증상'보다 '원인'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나도 동의한다. 우리 사회가 고통받는 다양한 원인을 설명하고 실체를 직시할 수 있도록 할 때, 우리는 그것이 불공정하며 불합리하다고 분노하며 저항하고 마침내 바꿔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난 그것이 언론의 역할이라고 본다. 그런데 가짜 뉴스는 어떠한가. 합리적 판단을 내리거나 저항하도록 하기보다 불안에 떨게 하거나 그 내적 공포를 '타자' 탓으로 돌리고 있지 않는가. 최근 극우 세력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가짜 뉴스'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 사지로 내몰린 청년들의 아픔마저 이용해 증오와 공포, 혐오를 증폭하고 있다.

2월 8일 자유한국당 김진태·이종명 의원 주최 5·18 공청회에서, 김순례·김진태·이종명 의원이 5·18 폄훼 발언을 해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었다. 사진은 2017년 2월 4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당시 김진태 의원. 뉴스앤조이 이용필

시민 언론과 시민 상상력

가짜 뉴스가 어떤 식으로든 정치 세력을 모으고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제2·3의 '5·18 망언'들은 계속 등장할 것이다. 오늘날 미디어 환경에서는 가짜 뉴스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것이 너무도 쉽고 빨라졌다. 나는 이전 글들에서 언론의 공정성과 언론인 역할에 대해 이야기했다. 매우 원론적인 이야기였지만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 혼란스러운 언론·미디어 현실을 마냥 낙관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큰 우려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공포와 혐오를 조장하는 가짜 뉴스 현상에 어떤 대안이 있는가. 나의 대답은 바로 시민(citizen)이다.

가짜 뉴스를 읽어 내는 능력, 이른바 미디어 독해력(media literacy)의 중요성은 가장 중요한 시민 역량의 하나가 됐다. 미디어 리터러시 관련 교육이 공교육 과정에서부터 이뤄져야 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미디어 환경과 함께 언론 미디어 공신력과 정보의 정확한 근거 등을 확인하는 방법 등이 다뤄져야 한다. 소수 엘리트에 의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민 영역의 해석 공동체(interpretive community)가 늘어나야 한다. 나는 교회가 이런 해석 공동체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 부분은 다음 연재에서 상세하게 다뤄 보겠다.

시민은 단지 수동적으로 정보를 접하기만 하는 청중(audience)만이 아니다. 일방적 주입식 소통은 사라지고 양방향적(interactive)이고 참여형(participatory) 소통이 늘어나고 있다. 시민은 언론·미디어 생태계에서 언론을 감시하는 감시자 역할(watchdog)을 수행할 뿐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언론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 가리켜 '시민 언론'(citizen journalism)이라고 한다.

시민 언론의 중요성은 디지털 미디어와 스마트 기기의 발전과 함께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특별히 인터넷을 통해, 시민 언론은 능동적으로 언론과 정보를 공유하며 언론 보도의 진실 여부를 가리거나 보충하는 역할을 시작했다. 광화문광장에 직접 나아가 특정 언론사 편집 데스크를 거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1인 방송을 표출하기도 한다. 시민 언론의 전문성은 점점 높아져 가는데, '1인 미디어'와 '시민 언론사' 등의 다양한 형태와 활동을 접할 수 있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반대 촛불 집회로 기억한다. 집회 참가자와 경찰 사이에서 과잉 시위와 과잉 진압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당시 보수 언론들이 시위대의 폭력적인 장면을 부각해 보도하는 경향이 보이자, 시민들이 직접 거리로 나와 아프리카TV 같은 인터넷 방송을 통해 현장 중계 및 팩트 체크를 하기도 했다. '세월X'를 제작한 '자로'의 경우 정부 및 주류 언론만큼 대중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도 했다.

과거 언론·미디어는 대중을 선동하고 세뇌해서 공포를 조장하고 혐오를 양산하는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시민들은 성숙해졌고 정보 접근성도 용이해졌다. 시민 언론은 감시자 역할과 함께 언론에서 주체적 역할을 하고 있다. 시민들 눈으로 이 사회에 대해 목격자 역할과 대안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과거 미디어 상상력은 대다수 사건을 대중매체를 통해 목격하는 것에 의존했다. 푸코가 지적하듯, 미디어는 다양한 기억과 해석의 가능성을 줄이고 편협하고 대중적인 기억을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가짜 뉴스는 사실이 아닌 왜곡된 역사의식, 공포 및 혐오의 문화를 조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시민이 주체가 되는 시민 언론의 힘은 이러한 시민 스스로가 보고 느끼고 만들고자 하는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다. '시민 상상력'(civil imagination)은 공포와 혐오를 넘는 힘이다.

1) 최근에는 좀비의 인간성(?)에 집중해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좀비라는 주제를 선택하기도 한다.
2) <혐오와 수치심> 마사 누스바움, 조계원 옮김, (민음사 2015)를 참조.
3) <오월의 사회과학> 최정운 (오월의봄, 2012) 참조.
4) 이와 관련해 국회윤리특별위원회에 징계안이 상정되고 3월 7일부터 논의가 되기로 했지만, 현재로는 강력한 처벌로 가기까지는 요원해 보인다.
5) 20대 극우 세력이 실제 존재하는지 그 특성과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학문적으로 관찰되고 검증될 필요가 있다.
6) 박권일, <한겨례> 칼럼 '[세상 읽기] 왜 분노하는 대신 혐오하는가' (2016. 2. 11.)

※필자 소개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상덕의 미디어와 한국교회' 전체 기사 목록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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