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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과 번민은 신앙의 본질, 회의 자체가 신앙 아닐까"

[인터뷰] 난잔종교문화연구소 김승철 교수②

강동석 기자   기사승인 2019.03.04  17:5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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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는 베르나노스 표현을 빌려 신앙이 90%의 의심과 10%의 희망이라고 말했다. 신앙의 본질을 건드리는 이야기다. 회의 자체가 신앙이 아닐까."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김승철 교수는 <침묵>(홍성사)의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1923~1996) 말을 통해 신앙의 본질은 의심하고 물음을 던지는 것에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기독교와 타 종교의 대화를 위해 개설된, 일본 난잔대학교 난잔종교문화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가톨릭 소설가 엔도 슈사쿠 전문가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스위스 바젤대학교 신학부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를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학자면서 불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시아의 밑바탕에 있는 불교를 연구하는 것이 '아시아적 기독교 형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엔도 슈사쿠도 '기독교의 아시아적 수용'이라는 주제를 놓고 일평생 치열하게 고민했다. 작품을 통해 '일본 사람인 나에게 서양의 기독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질문을 던졌다.

한국에 번역 출간된 <침묵>의 마지막 부분에는 원작에 있는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가 없다. 이 내용이 사실 <침묵>의 결말인데, 역자가 부록처럼 생각한 것도 있고, 엔도가 16세기 고문서를 각색해 어려운 표현이 많아 현지인도 읽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일본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물어 가면서 이 부분을 번역했다.

그가 2016년 번역 출간한 <침묵의 소리>(동연)에 이 내용이 담겼다. 엔도 슈사쿠를 주제로 <기독교사상>에 2년간 연재한 글을 묶어서 2017년 <엔도 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비아토르)을 출간하기도 했다. 2월 15일 엔도 슈사쿠 강의를 하러 한국에 온 김 교수를 서울 필동 카페바인에서 만났다. 1부 인터뷰에 이어, 이번 기사에서는 엔도 슈사쿠를 통해 살펴본 신앙 이야기를 담았다.

엔도 슈사쿠 전문가 김승철 교수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 난잔종교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에는 어떻게 건너가게 됐나.

바젤대에서 같이 공부했던 선배 중 일본인 학자가 있었다. 부산에 있을 때 전화가 왔는데, "일본에 오지 않겠느냐"고 하시더라. 나고야에 있는 대학에서 생명윤리를 가르치는 신학자를 뽑는다고 했다. 바젤에서 박사 논문을 쓸 때 일본어로 된 불교 서적도 읽었어야 해서 공부는 했지만, 일본어를 잘하지는 못했다. 일본어를 못하는데 어떻게 가느냐고 했더니 "일본에 와서 배우면 더 빠르지 않겠느냐"고 하더라.(웃음)

그 이야기가 2000년에 시작됐는데, 2001년 안식년을 갖게 되면서 대학에 취직하게 됐다. 2001년부터 나고야에 있었다. 내가 지금 소속돼 있는 난잔대학교는 가톨릭 계열 학교로 2012년부터 있었다. 신언회(하나님의말씀의회)라는 수도회에서 세웠다. 난잔종교문화연구소는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목적으로 만든 곳이다.

- 엔도 슈사쿠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엔도 슈사쿠는 언제 처음 접했나.

대학교 2학년 때였을 것이다. 지금은 강남이 서울의 중심이지만, 그때는 명동과 종로밖에 없었다. 우리 집은 명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곧잘 명동으로 나가고는 했다. 친구들과 놀기도 했지만, 명동에 갈 때마다 두 군데는 꼭 들렸다. 기독교 계통 책을 파는 성바오로서원과 독일어 서적만 파는 소피아서점이었다. 당시 성바오로서원에서 샀던 <침묵>(성바오로출판사)은 김윤성 선생이 번역한 것으로, 사막 같은 곳을 두 사람이 걸어가는 장면이 담긴 까만 표지의 책이었다.

<침묵>을 다 읽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으니까. 겨우 읽었는데, 이상하게 그 책이 잊히지 않더라. 흔히 기독교 계통의 소설은 답을 정해 놓고 그것을 부각하려 하지 않나. 호교론護敎論이라고 말하는데, 간증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침묵>은 전혀 달랐다. 답을 주지 않고 읽는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신앙이 대체 뭘까' 자꾸만 묻게 했다.

엔도 슈사쿠는 기독교 작가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기독교 작가라고 하면, '기독교'라는 답을 갖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되니까. 일본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해도 전체 인구의 1%가 되지 않는다. 마이너리티의 기독교인으로서 엔도는 '일본인에게 기독교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본 사람인 나에게 서양의 기독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평생 고민했다. 답을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고민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 했던 사람이다.

엔도 슈사쿠. 뉴스앤조이 강동석

- 나고야에서 엔도 슈사쿠 작품을 읽는 모임을 이끌고 있다고 들었다. 어떤 모임인가.

2013년부터 시작한 모임이다. 1달에 1번 모여 책 1권을 읽는다. 지난번이 65회였다. 65권을 읽은 셈인데, 아직 못 읽은 책이 그만큼 있다. 엔도의 특징 중 하나는 작품이 무척 많다는 것이다. 멤버 중 한 명은 한 10번쯤 하고 그만둘 줄 알았다고 하더라. 엔도의 작품이라고 해 봐야 <침묵>이나 <예수의 생애>(가톨릭출판사)를 포함해 몇 권 안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작품이 많은 만큼, 장르도 많다. 흔히 순문학이라고 분류되는 작품이 많다. 신앙 문제나 인생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침묵>, <깊은 강>(민음사), <바다와 독약>(창비) 등이 대표적이다. 엔도는 순문학의 순이 인간 내부 가장 깊은 곳에 추를 드리우고 무언가를 건져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엔도의 모든 작품이 순문학이다. 어떤 작품에서든지 인간 가장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움직여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지 쓰려 했기 때문이다. 대중소설도 많이 썼는데, 대중소설 형태로 인간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문제를 건드리려 했다. 그다음에 많이 남긴 장르가 역사소설이다. 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가 금지됐던 시기를 많이 다뤘다.

유머소설도 많이 남겼다. 엔도가 사람들에게 죄송하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자기는 술집도 가고 카바레도 가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침묵>의 작가로만 생각한 나머지, 늘 신앙·하나님·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게 괴로워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엔도는 생전에 TV 광고에 나와서 마이크 잡고 노래도 부르고, 유머소설도 썼다. 자기 정신 건강 때문이기도 하고,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니까. 지금 보면 썰렁한 유머가 많다. 탐정소설도 쓰고, 일기나 기행문, 에세이도 수없이 남겼다.

- <침묵> 같은 순문학 말고, 엔도가 남긴 다른 장르 작품을 소개해 준다면.

엔도가 대중소설로 인간 내면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려 했다고 말했는데, 대표적으로 <내가 버린 여자>가 있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요시오카라고 하는 젊은 녀석이 미츠라는 젊은 여자를 만난다. 둘이 만나다가 요시오카가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미츠를 버린다. 여자는 평생 슬픔 속에 살아간다.

이 여자는 중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는데, 어느 날 술집에서 근무하다가 팔에 반점이 생긴다. 병원에 가서 조사하니까 한센병이라고 한다. 수녀원이 운영하는 격리병원으로 보내진다. 거기서 몇 년 지낸 후 재검사하니까 한센병이 아니었다. 그래서 짐 다 싸 들고 역으로 가서 기차 오기를 기다리는데, 발걸음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한센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축하해 주는, 부러움과 절망이 섞인 환자들 눈을 잊을 수 없었다. 결국 미츠는 다시 격리병원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일하게 되는데, 비극적 사건을 만나 세상을 떠난다.

격리병원의 수녀가 유품을 정리하다 미츠가 요시오카에 대해 쓴 일기를 발견한다. 그것을 모아 요시오카에게 보낸다. 요시오카는 회사 중역의 딸과 결혼해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옛날 일이라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옥상으로 올라가 미츠가 자신에게 남긴 흔적을 생각한다.

소설은 "미츠가 나에게 무언가 가르쳐 줬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인생을 단 한 번만이라도 가로질러 갔던 것은 지워질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는 것인가", "신이라는 존재가 정말 있다면, 신은 그런 흔적을 통해서 말을 건네는가. 이 적막함은 대체 어디로부터 온단 말인가" 하면서 끝난다.

결국 마지막 독백을 쓰기 위해 300쪽가량 책을 쓴 것이다. 엔도 슈사쿠가 가톨릭 작가인 것은 이런 기법 때문이다. <내가 버린 여자>로 엔도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내가 버린 그리스도'였다. 무거운 주제이기에,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배반 등으로 직접 표현하면 독자들이 다가가기 어렵다. 그래서 읽기 쉬운 대중소설 형태로 표현했다. 남의 이야기인데, 읽다 보니 독자 자신의 이야기가 되고, 이 이야기가 하나님과 연결되면서 끝이 난다.

엔도의 작품에는 '미츠'라는 여자 주인공이 많이 등장한다. 미츠를 거꾸로 읽으면, 'つみ(츠미)', 즉 '죄'다. 다시 말해서, 미츠는 미츠를 버린 사람들에게 죄를 일깨워 준다는 말이다. 죄를 자각하는 곳에서 구원이 시작되니까, 미츠의 흔적이 요시오카와 독자를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하나의 창이 되는 셈이다. 이런 작품이 많다.

<침묵>의 배경이 되는 나가사키 소토메의 시츠성당 앞에 있는 '침묵의 비'. 엔도 슈사쿠가 직접 쓴 글씨로, "인간은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는 너무나 푸르기만 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뉴스앤조이 강동석

- 엔도가 남긴 작품을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한다면.

크게는 '흔적'일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사상>에 2년간 연재해서 낸 책 제목이 <엔도 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이다. <기독교사상>에는 당시 편집장 홍승표 목사 제안을 받아 연재했다. 원서에는 있지만 한국의 <침묵>에는 없는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 이야기부터 쓰기 시작했다. <침묵>의 맨 마지막에 들어가 있어서 부록이라고 착각하기도 하는데, 이게 사실 <침묵>의 결론이다. 조금만 겁만 줘도 배교했던 기치지로가 결국에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원문을 찾아 번역했다. 16세기 고문서 형식으로 쓴 것이라서 쉽지 않았다. 일본문학 전공도 아닌 나는 뜻을 알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일본 고전문학을 전공한 사람들 도움을 받았는데, 그분들도 바로 답을 못 하고 찾아보고 연락을 준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읽기가 어려웠다. <엔도 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과 내가 번역한 <침묵의 소리>에 이 내용을 담았다.

<침묵의 소리>에서 엔도는 <침묵>의 결론 '기리시단 주거인 관리인의 일기'를 어렵게 쓴 것을 후회한다고 밝힌다. 쉽게 이해할 수 없도록 쓴 것이 엔도의 기법이다. 신앙이 그야말로 숨겨진 흔적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A=B라고 결론을 짓고 답을 주는 것은 직접적이니까, 옛날 문서 형식을 빌려 추리소설처럼 숨겨 둔 것이다.

그다음이 '추적'이다. 엔도 슈사쿠에 대해 2년간 <기독교사상>에 연재하면서 '흔적'을 중요하게 다뤘는데, 연재가 끝나갈 때쯤 흔적이 있다면 추적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흔적을 추적하는 사람이 탐정일 텐데' 싶어서 엔도가 남긴 <작가의 일기>를 찾아보니까 탐정 이야기가 수도 없이 나왔다. 엔도 슈사쿠가 젊었을 때 하드보일드(hard-boiled) 계통의 탐정소설을 많이 읽었더라. 특히 <제3의 사나이>(문예출판사)나 <권력과 영광>(열린책들)을 남긴 그레이엄 그린을 좋아했다. 그레이엄 그린이 주로 쓴 것이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이야기, 탐정소설이다.

이번 3월 일본 출판사 교문관教文館에서 책이 나온다. <遠藤周作と探偵小説 - 痕跡と追跡の文学(엔도 슈사쿠의 탐정소설 – 흔적과 추적의 문학)>인데, 추적이라는 키워드를 담고 있다. 사실 성서도 훌륭한 탐정소설이다. 하나님은 아주 유능한 탐정이고, 성경의 첫 사건은 살인 사건이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지 않았나. 신약도 단순하게 보면, 누가 왜 예수를 죽였느냐는 이야기다. 범인은 우리라고 이야기하지 않나. 신약의 스토리도 구조도 기본적으로 탐정물이다. 탐정소설의 근원은 성경이다. 이미 많이 연구돼 있다.

에도가와 란포江戸川乱歩가 탐정소설의 3요건으로 밝힌 것이 있다. △출발점에서 믿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난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서스펜스가 있다 △의외의 결말로 끝이 난다. <침묵>은 여기에 아주 잘 맞는 소설이다. 첫 장면이 "로마교회에 하나의 보고가 들어왔다"로 시작한다. 유명한 페레이라 신부가 고문으로 배교했다는 것인데, 아무도 믿지 않는다.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로드리고 신부가 가는데, 탐정의 조수로 기치지로를 데려간다.

기치지로는 신뢰할 만한 조수가 아니어서 로드리고는 조수 때문에 잡힌다. 그리고 마지막에 로드리고가 배교의 표시로 '후미에踏繪'(목재나 금속으로 만들어진 성화상)를 밟는데, '밟아도 좋다'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 의외의 결말이다.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도 또 다른 의외의 결말이다. 그런데 작품을 가만 보면, 로드리고가 페레이라를 쫓고 이노우에는 로드리고를 쫓는데, 이노우에는 하나님에게 쫓긴다. 이노우에도 기독교 신앙인이었다가 신앙을 버리고 거꾸로 신자를 잡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도 실은 자신을 쫓아오는 하나님에게 쫓기는 형국이다.

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pson)의 유명한 시 중 'The Hound of Heaven(하늘의 사냥개)'이 있다. '하늘의 사냥개'는 중세 때부터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스도는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사랑해서 붙잡기 위해 추적해 온다. <침묵>도 '하늘의 사냥개' 관점에서 볼 수 있겠다. 사실 신앙인이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을 쫓는 탐정이다. 조그마한 탐정이 되어 세상 속에, 타인 속에, 자기 자신 속에 있는 흔적을 통해 하나님을 추적한다.

- 작품들을 읽으면서 느낀 엔도의 매력을 소개해 준다면.

엔도의 매력은 솔직함이다. 아까 유머소설 이야기를 하면서 언급했던 것처럼, 엔도는 자기 자신에게 아주 정직했다. 엔도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작가연하는 사람이었다. 인생의 고민을 다 짊어진 것처럼 구는 것을 싫어했다. 가면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일종의 자기 훈련이 아닐까 싶다. 자기가 자기에 대해 웃는 것이다. '네가 <침묵>을 썼지만, 사실 그렇게 진지한 놈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이다.

엔도가 제일 부러워했던 사람은 어른이 돼서 자기 결단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었다. 엔도는 12살 때 어머니를 따라 가서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그것이 평생 화두가 됐다. 이를 '비자발적 세례'라고 표현한다. '왜 그때 세례를 받았을까', '내가 받은 세례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이 누구이고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세례를 받아도 괜찮았던 것일까' 같은 고민을 솔직하게 작품에 담았다.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아주 용기 있는 것이다.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人生の踏繪>(포이에마) 맨 마지막을 보면, 엔도는 세 가지 '나'가 있다고 말한다. '나는 알고 다른 사람이 모르는 나', '나는 모르고 다른 사람이 아는 나', '나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르는 나'. 세 번째는 하나님만 아는 나일 것이다. 엔도는 그것을 늘 의식하는 사람이다.

엔도는 베르나노스 표현을 빌려 신앙이 90%의 의심과 10%의 희망이라고 말했다. 신앙의 본질을 건드리는 이야기다. 회의 자체가 신앙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드는 힘 말이다. 끝없이 의심하면서 신앙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는 것이다.

나가사키 소토메에 있는 엔도슈사쿠문학관. 뉴스앤조이 강동석

엔도는 배교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신앙을 생각했다. 숨은 그리스도인(가쿠레 기리시단隠れキリシタン)이라고, 기독교 박해가 있을 때 나가사키 근처에서 몰래 신앙을 지키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불교의 관음상 비슷한 것을 그려 놓고 예배했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불상이지만, 이들에게는 성모마리아상이었다. 이를 학술적으로는 '마리아 관음상'이라고 한다.

이들은 매해 정월 초 관헌에 가서 후미에를 밟아 신앙을 버렸다고 확인받아야 했는데, 엔도는 이들이 이렇게 하고 난 후 마리아상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 눈물 흘리며 기도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쩔 수 없이 후미에를 밟았겠지만, 그것을 밟는 발에도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엔도는 이 아픔이 그들에게 여전히 신앙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한다. 끝없는 회의와 번민 속에 신앙이 있었다.

- 엔도 슈사쿠 연구를 통해 받은 선물이 있다면.

나는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내가 왜 엔도 슈사쿠를 읽을까 자문하고는 했다. <전시회에 간 예수, 영화관에 간 부처>(시공사)에 쓴 비유가 있다. '탁본을 뜬다'는 말 있지 않나. 오래된 비석이 마모돼 글씨가 안 보이면 하얀 종이를 붙여 칠을 한다. 그러면 글자가 떠오른다. 엔도의 문학은 삶에 신앙이 어떻게 용해돼 들어가는지 가르쳐 준다. 엔도가 하려 했던 작업은 글로 칠을 해서 일상에 숨겨져 있는 신의 발자국, 신의 흔적을 떠오르게 하는 것 아니었을까.

이 이야기는 기독교인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엔도는 사후에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 엔도슈사쿠클럽이라는 모임이 있는데, 해마다 소식지도 내고 활발하게 활동한다. 이 모임 사람 대부분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확률적으로도 1%밖에 안 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엔도를 읽을까 떠올려 보면, 우리 삶 속에 숨겨져 있고 놓치는 부분을 엔도가 지적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기가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 앞으로의 계획은.

탐정이라는 키워드로 대중서를 하나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신학자도, 신앙인도 일종의 탐정이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에 이 주제로 글을 써 보면 재밌을 것 같다. 자연과학과 불교와 신학을 통해 하나의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 관련해서 책을 읽어 오다 보니, 중국을 놓친 것 같다. 중국에 대한 것도 살펴야 하지 않나 싶은데, 잘될지 모르겠다. 이렇게 세 가지다.

김 교수는 엔도의 작품을 '흔적'과 '추적'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엔도를 번역하려 하는데, 지금도 두어 권 번역했다. <바보>가 올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될 것이고, 내년에는 바오로딸 출판사에서 <여자의 일생>이 출판될 예정이다. 욕심 같아서는 엔도의 선집이나 전집을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낼 수 있었으면 한다.

형식적으로는 일본과 한국의 교류라는 이유도 크다. 신앙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여러 문제의식을 갖고 번민하는 많은 기독교인에게 엔도 슈사쿠 책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엔도의 책을 통해, '의심하고 번민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이구나' 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복음 아닐까. 의심과 번민이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신앙의 본령이라는 것을 공유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의심 속에서도 이미 하나님이 나를 이끌고 계시다고 자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으로 깊어져 간다고 본다. 톰슨의 '하늘의 사냥개'에 있는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

"수많은 밤, 수많은 낮을 / 나는 신을 피해서 돌아다녔다
참으로 여러 해에 걸쳐서 / 신을 만나지 않으려고 도망다녔다
하지만 그분은 / 서두르지도 / 발걸음을 흩뜨리지도 않고서
나를 계속해서 쫓아오고 계셨다 (중략)
이제 그 오랜 추적의 소리가 / 내 몸에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 소리는 으르렁거리는 파도 소리처럼 / 내 몸을 집어삼킨다
그 소리는 지금 바로 내 옆에까지 와 있다
나를 뒤덮고 있던 어두움은 / 그분이 펼치신 사랑의 그림자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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