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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3·1 정신 따라 시대의 모순·아픔에 함께해야"

3·1운동100주년을기억하는기독인연합, 기념 예배 및 선언

장명성 기자   기사승인 2019.02.28  13: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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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인연합이 2월 28일 청어람홀에서 연 3·1 운동 100주년 기념 예배에는 20여 명이 참석했다. 뉴스앤조이 장명성

[뉴스앤조이-장명성 기자] 교회개혁실천연대·기독교윤리실천운동·성서한국·청어람ARMC·두레교회·일산은혜교회·사랑누리교회 등 복음주의 단체 및 교회 20곳이 '3·1운동100주년을기억하는기독인연합'(기독인연합)을 결성해, 2월 28일 낙원상가 청어람홀에서 3·1 운동 100주년 기념 예배를 열었다. 이들은 3·1 운동 정신을 계승해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에서 실현해 나가겠다고 했다.

이날 설교는 일산은혜교회 강경민 목사가 맡았다. '너는 나를 알지 못해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강 목사는 기독교인들이 3·1 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모든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강 목사는 "민족의 독립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과정이었다. 이를 위해 천도교인도, 불교인도 사용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적 독선이나 제국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역사 속에서 공의·정의를 확장해 가시는 하나님의 대사大事를 위해 이 땅의 모든 종교인, 모든 사람과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틀간 진행 중인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라고 했다. 강경민 목사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고레스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셨다. 이 땅에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김정은과 트럼프도 고레스처럼 사용하실 것이다. 한반도 평화통일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공평·정의가 넘치는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경민 목사(일산은혜교회)는 "기독교인들이 3·1 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모든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장명성
기독인연합은 예배 직후 탑골공원에서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한국 그리스도인의 선언'을 발표했다. 뉴스앤조이 장명성

기독인연합은 예배 직후 탑골공원으로 이동해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한국 그리스도인의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3·1 운동은 불의한 정권과 이민족의 압제를 거부하고 공동체에 생명을 불어넣은 신앙의 혁명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복음이 이 땅에 뿌린 자유를 부정하고 교인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 목회자의 성폭행, 교회를 사유화하고 세습하는 죄악을 보고도 저항이 없는 교인들은 주님이 매지 말라 하신 종의 멍에를 지고 있다"며 한국교회가 3·1 운동이 제시한 정의와 평화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정병오 공동대표는 "당시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1.8%밖에 안 됐지만, 시대의 모순과 아픔을 알고 있었고, 시대의 불의와 악에 저항했다. 기독교 혼자가 아니라, 공동의 선을 위해 타 종교와도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고 말했다.

정 공동대표는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가 시대의 모순과 아픔에 함께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교회는 3·1의 정신을 붙들고 있는가. 기독교는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다른 이들과 함께하고 있는가.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단지 옛 추억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의 불의와 아픔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저항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래는 선언문 전문.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한국 그리스도인의 선언

독립, 평화, 혁명

1919년 3월 1일, 우리의 선진들은 유구한 한반도 공동체의 주인들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독립을, 세계만방에 대해서는 평화를 선언했다. 이 선언이 분출한 배경은 공화적 자유와 평화였으며, 선언의 결과인 모든 임시정부의 정체政體는 민주 공화정으로의 혁명이었다. 이 선언을 살아 내기 위해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희생을 치른 선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일본 제국'이 한반도와 아시아를 능욕하다가 그들의 왕 3대를 채우지 못하고 패망한 역사는 부도덕한 패권과 이웃 공동체에 대한 탐욕을 체제에 내장하는 행위, 곧 거대 집단을 범죄 조직화하는 죄악이 자기 파멸로 치닫는다는 교훈이다. 타자에 대한 억압을 선으로 여기는 체제에는 앞선 근대 문명과 자원이 오히려 스스로를 살라 버린 땔감이었다.

우리 선진들은 국권을 되찾을 방도로 당당한 선언과 희생을, 찾아야 하는 이유로 혁명, 곧 이상理想을 채택했다. 무능한 왕과 귀족의 체제를 버리고 본래의 주인인 민이 저작하고 이끌어 나가는 민주 공화제의 여정이 곧 독립의 여정으로 제시됐다.

후일 "독립이 될 줄 알았냐?"던 변절자들만이랴, 그때 누가 일제 사멸이 26년 남은 줄 알았을까. 부당한 압제 아래, '좋은 것'과 '옳은 것'의 판단이 갈라섰고,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옳은 것'만이 실상이라는 믿음 위에 있다. 그 믿음을 굳게 지켜 현실로 만들어 낸 희생이 얼마나 고마운가.

지성, 사죄, 평화 연대

일본이 패전 74년을 맞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기미 독립선언서가 천명한 대로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붙들어 지탱하는 자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데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반성과 사죄가 생존의 길이라 판단하게 하고, 그들의 도덕성을 격려할 때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피해국들의 통합성이 미약함을 보고 사죄의 절실함을 도외시한다면, 아직도 파탄난 집단 도덕을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대하여 다시 기미 독립선언의 정신을 구현하려면 스스로 강한 도덕 자산을 확보하고, 그들의 위력威力이 크든 작든, 도의道義와 인도人道에 입각한 평화의 체제로 돌아설 것을 요구하여야 하며, 이에 부합한 말과 행동을 격려할 것이다.

일본은 '패전 50년 총리 담화'에서 미흡하나마 식민 지배를 반성하였고, 남북한에 이를 표명했으며, 2010년 한일 양국 지식인 1000명이 병합 조약 자체가 불법이고 무효임을 밝히자, 간 나오토 총리가 이를 받아들이고,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심정'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발전은 기미 독립선언의 높은 뜻을 실천하려는 양국 시민사회가 연대함으로 맺은 결실이었다. 2019년 일본의 지식인들은 1987년 한국의 '군부독재 정권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민주혁명'으로 인해, 1910년 병합 조약의 '전문前文도 본문도 거짓'이라는 핵심적 역사 인식을 일본 총리가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도덕'과 '평화'라는 열쇠

일본을 탓하지 않겠다는 3·1 정신은, 우리 스스로의 도덕적 자산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그토록 인도와 정의를 갈구하던 집단이 헌정을 유린하고 정치권력을 탈취물로 여기는 체제를 가만둔다면, 압제에 항거한 선열들을 능멸하고 희생자들을 더욱 수치스럽게 하였다면, 공정한 질서를 기만하고 차별을 온존케 한다면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 흔들리는 일본 대중들의 마음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겠는가.

2013년, '양승태 대법원'과 '박근혜 청와대'가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일본 전범 기업 상대 확정판결을 고의로 지연시켜 피해자가 죽을 때까지 보상받지 못하게 한 중범죄와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이른바 '한일 위안부 합의'로 자국의 피해 당사자들을 모멸한 순간들은 참으로 어딘들 묻어버리고 싶은 우리의 부끄러움이다.

또한, 지난 74년간 해소하지 못한 분단과 남북 적대 관계는 일본이 승전국에만 머리를 조아리고 희생자들을 모독하는 어그러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였다. 이를 증명하듯, 남·북·미·중 간에 평화가 예견되자 북·일 수교 논의도 되돌아오고 있다.

인간의 도덕은 완전무결의 영속이라기보다는 오류를 바로잡는 속도에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부정한 정치권력을 수년이 못 되어 평화로운 촛불로 물리쳤기에, 그 힘으로 아시아 평화의 큰길을 열어 가고 있기에 실리와 도덕 모두에서 일본에 '사악한 길'에서 벗어날 동기를 선물한다.

교회여, 한국교회여…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회 밖의 싸늘한 시선이 하나님의 경고인 줄 알아야 한다. 100년 전 선배들의 신앙 유산은 물론, 후대들이 누릴 자부심조차 갉아먹고 있다. 떠나는 신앙인들을 다잡고자 하여도 정의를 외면하는 교회는 그들을 붙잡을 매력이 없다.

3·1 정신은 불의한 정권과 이민족의 압제 모두를 거부하고, 타 종교인들과 공동선을 일으켜 공동체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은 신앙의 혁명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불의한 정권을 축복하고 압제를 미화하는 망령에 사로잡힌 줄도 모르고 타 종교인들에게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 주님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달으라고 하신다(마 7:3).

복음이 이 땅에 뿌린 '자유'를 부정하고, 교인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 목회자들의 헌금 도둑질과 성폭행, 교회를 사유화하고 세습하는 기막힌 죄악을 보고도 저항이 없는 다수의 교인들은 주님이 다시는 매지 말라 하신 '종의 멍에'(갈 5:1)를 지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일하신다. 예배당이 비어 가는 이유는 성도들이 광장으로 나와 '소리치는 돌'이 되었기 때문이다(눅 19:40). 교회의 회복은 그들을 받아 낼 신앙 역량에 달려 있다.

3·1 혁명이 우리게 무거운 짐을 지운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불기둥과 구름 기둥처럼 우리가 갈 길을 시대를 앞서 제시하니, 이처럼 고마운 선물이 또 있을까. 우리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이 길을 걷는다.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2019년 2월 28일
3·1 운동 100주년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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