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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교수 "3·1 운동, 3·1 혁명으로 불러야"

기윤실 회원 총회 강연…"100주년 맞은 한국교회, 한반도 평화통일 지향해야"

박요셉 기자   기사승인 2019.02.26  13: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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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국사편찬위원회 전 위원장 이만열 교수(숙명여대 명예)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가 분단 체제를 평화로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고 조국의 완전 자주 통일과 독립을 구현하려고 노력했던 선진들을 되돌아보며, 한국교회가 평화통일이라는 지향을 가슴에 품어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2월 11일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공동대표 배종석·정병오·정현구) 회원 총회에서 '3·1 운동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3·1 운동의 배경과 의의를 소개하며, 한국교회 역할을 살폈다. <뉴스앤조이>는 기윤실이 홈페이지에 게시한 이 교수의 강연문을 요약했다.

"3·1 운동, 거족적 독립운동"

무장 독립 투쟁, 국내 민족운동 영향

3·1 독립선언서 "새 나라 주인은 백성"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을 포함해 전국 8~9개 지역에서 동시에 시작했다. 이날 오후 2시 길선주·유여대·정춘수·김병조 4명을 제외한 민족 대표 29명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독립선언을 통보했다. 비슷한 시각,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서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열고 시가행진에 나섰다.

만세 운동은 서울을 비롯해 평양·진남포·정주·안주·의주·선천·원산 등에서 일어났다. 이 지역들에서는 기독교가 운동의 중심이 됐다. 사흘째 되는 3월 3일은 고종의 장례일이었지만, 예산·개성·사리원·수안·송림·곡산·통천 등에서 만세 운동이 계속됐다.

이 교수는 "3·1 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동시에 독립을 선포하면서 시작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이다. 이후 1년여 동안 계속된 국내외 항일 민족 독립운동을 총칭한다"고 했다.

이만열 교수는 3·1 운동이 백성을 한반도 역사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혁명이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이 교수는 3·1 운동이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위정척사 운동, 개화운동, 농민운동으로 분화한 민족운동을 하나의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3·1 운동 이후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무장 독립 투쟁이 가속화했고, 국내 민족운동이 활성화했다고 말했다. △고등교육을 위한 민립 대학 기성회 조직 △조선산 물품 애용 운동 △근검·절제 운동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등 다각적 운동이 일어났다고 했다.

이만열 교수는 3·1 운동을 '3·1 혁명'으로 불러야 한다고 했다. 한반도에서 백성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최초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3·1 운동은 양반 지배자 중심의 왕조적 질서를 걷어 내는 계기를 만들었다. '3·1 독립선언서'에도 새 나라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라고 명시돼 있다"고 했다. 민주국가가 세워졌다는 의미에서 한민족은 출애굽을 시작했고, 민족적 새 생명을 탄생시킨 것이라고 했다.

"3·1 운동 기독교 참여 지역, 전국 25~38%

기독교인 전체 인구의 1.3~1.5% 불과"

교단 차원 대응 부재 한계

3·1 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가 합작한 독립운동이었다. 이만열 교수는 3·1 운동이 지방화·전국화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교회나 기독교계 학교가 있는 지역 대부분이 기독교인 중심으로 만세 운동을 진행했다. 3월 1일, 서울을 제외한 다른 7개 지역에서는 기독교가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그중 의주와 평양은 목사들이 주동했다.

이 교수는 "기독교 참여 지역이 전국에서 25~38%에 이른다. 당시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1.3∼1.5%에 불과했다. 3·1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이들 중 기독교인이 20%를 상회했다면, 3·1 운동과 한국교회의 관련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기독교의 참여가 적극적이고 광범위했기 때문에 일제 박해도 다른 종교보다 컸다고 했다. 대표적으로, 제암리교회에서는 29명(비기독교인 포함)이 희생됐다. 이 교수는 "당시 장로교 8회 총회에서는 사살·타살이 52명, 체포된 교인이 3804명이라고 집계했다. 총회에 보고한 노회 문서에는 '대한(조선) 독립운동' 혹은 '독립 사건'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했다.

운동이 전국화하는 단계에서 기독교가 보인 문제도 있었다. 이 교수는 3월 1일 당시 기독교 대표 16명 중 4명이 불참했다는 사실은, 이유가 납득된다 하더라도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선교사 베커의 제안으로, 독립선언서 낭독 장소가 태화관으로 변경된 것도 기독교 운동의 한계와 관련돼 있다고 했다. 일제가 폭력으로 나오는데도 교단 차원의 대응이 없었다는 점, 주요 교단 연합 기관지 〈기독신보〉의 미온적인 보도 태도 등도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기독교를 핍박했다. 사진은 당시 일본군이 29명을 학살하고 방화한 제암교회 모습. 이근복 그림

"당시 기독교인, 신앙과 민족 사랑 일치

히브리 고난사, 민족사와 대비

3·1 운동, 평화 강조한 운동"

이만열 교수는 당시 기독교인들이 모세·삼손·다윗·다니엘 등을 통해 본 히브리 민족의 고난사를 민족의 역사와 대비시키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교계가 교인들에게 배포한 '독립단 통고문'을 소개했다.

통고문에는 △매일 3시에 기도 △주일은 금식 △매일 성경을 읽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월요일에 이사야 10장(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화요일에 예레미야 12장(유다가 멸망한 원인에 대한 설명), 수요일에 신명기 28장(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에게 침략받아 고통당한다는 예언), 목요일에 야고보서 5장(고난당하는 기독교인에게 기도와 인내를 권면), 금요일에 이사야 59장(죄 지은 백성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예언), 토요일에 로마서 8장(성령이 주시는 생명)을 묵상했다.

이 교수는 "3·1 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의 신앙적 행동에서, 신앙과 민족 사랑을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민족운동과 신앙 운동을 함께 진행하면서 민족과 신앙을 일치시켰다"고 했다.

그는 오늘날 3·1 운동 1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가 선조들의 신앙과 행동을 숙고해야 한다고 했다. 3·1 운동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지역과 계층, 종교와 이념, 남녀와 노소를 초월해 전개된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이 교수는 이러한 연대와 협력이 지금 한국교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물었다.

이 교수는 3·1 운동이 평화를 강조했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3·1 독립선언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오늘 우리의 조선 독립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나와 동양 지지자의 중책을 온전케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몽매에도 면치 못하는 불안 공포로부터 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써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3·1 독립선언서 1절)"

이 교수는 "오늘날 남북 분단은 주변 국가의 평화·안위와 관련 있다. 한반도 평화통일은 한민족의 완전 자주독립을 의미할 뿐 아니라 동양 평화, 나아가 세계 평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교회가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세계에 줄 수 있는 귀한 선물이 한반도 평화통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민족 분단을 평화적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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